지워지지 않고, 당신 안에서 존재할 거예요.
그러니 조금만 아파해요.
자연스럽게 놔두고 굳이 꺼내지 말아요.
그러면 괜찮을 거야.
당신의 진심 속에 깃들어 우리는 잊혀 지더라도 함께일 거고, 하나일 거예요.
그것으로 족하지 않나요?
저는 사라져도 굴레는 반복해서 움직이겠죠.
하나가 소멸하면 또 다른 하나가 탄생할 거예요.
두려워 말아요.
새로운 탄생을 만나게 될 테니까.
얼마나 자신을 떠올리며 쓴 건지, 글체가 꾹꾹 눌러쓴 흔적이 있었다. 번진 눈물까지 남겨져 있어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혼자라도 자신의 안에서 지켜보겠노라, 끝까지 당신을 떠날 수 없다고 전해왔다. 미련한 여인이지 않는가, 어리석지 않은가.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진심에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를 기억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그 날을 고대하며 버티고 있는데. 과인이 너를 잊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짐이 그리 약해보이는 거냐...?
“후궁마마를 뵈러 가실 겁니까?”
“그래.”
“따르겠습니다.”
“아니, 되었다. 지함만 호위하도록 하고 물러들 가거라.”
“알겠사옵니다.”
순백의 궁, 태지전. 황제의 여인답게 빛나고 하늘이 축복한다는 의미의 거처였다. 아영은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며 정원 뜰에서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 호들갑을 떠는 궁녀가 윤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 예법이고 뭐고 없이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으시다 더냐?”
“소인도 모르겠사옵니다.”
“내 모습은 이상하지 않느냐?”
“언제나 고우십니다.”
하아- 한숨을 한 번 내쉰 아영이 발을 서둘렀다. 뒷모습조차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자신의 님은 언제쯤이면 뒤돌아 저를 봐주실까... 사라진 여인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게 야속하기만 했다.
“폐하, 강녕하셨사옵니까?”
“연후(姸煦)아영, 같이 만찬을 즐기겠소?”
“예...? 예! 꼭 그리하고 싶습니다.”
“연후라 불러도 되겠소?”
“예! 예, 폐하...”
드디어 마음을 열어주신 걸까. 섭섭함과 간절함, 행복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품에 안고서 달래주시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곁에 있어주신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왠지 모르게 폐하께서 마음이 안정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가 내린 연후...가 이토록 감사하다니...
“폐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옆에서 뒤에서 지켜보게 해주세요.”
“과인이 너무 야속했소. 다시 황비로 복권할 것이오.”
“폐, 폐하!”
황제는 뒤를 돌아 손을 내밀었다. 아영도 혹여 사라질까봐, 얼른 붙잡았다. 아영의 아랫사람들도 한결 부드럽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절망하고, 아팠던가. 주인의 영향은 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 * * * * * * * * * *
“미주상궁! 이거 봐! 꽃이 피었어.”
“태자전하, 넘어지십니다!”
“예쁘다. 그지?”
“그렇지요. 단 하나뿐인 나무인 걸요. 황제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나무이기도 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나한테 말하는 것 같아.”
“감수성도 참 풍부하십니다, 태자저하.”
푸른 매화나무는 꽃을 피웠다, 연한 자색의 작은 꽃이. 만개한 나무를 태자는 좋아했다. 계룡전에 들린다면 꼭 보고서야 돌아갔다. 저 멀리에서 미미하게 들리는 어미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봐야 할 시간이다.
((안녕.))
“응?”
((드디어 만났구나.))
“미주! 뭐라고 했어?”
“네? 아니요.”
“그럼 이 소리는 뭐야?”
“예?”
가지가 흔들리며 태자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제 귀에 속삭인 건 뭐지? 누구지? 다시 자신을 부르는 상궁에게 뛰어가면서도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 다음날, 다시 찾은 매화나무.
“네가 말한 거야? 어떻게?”
((히헤헷 너와 나는 남매야. 그래서 들리는 거야.))
“남매라고? 아니야. 난 형제가 없어.”
((폐하께 물어봐. 나는 어머니와 함께 황궁을 지켜봐왔어.))
“엉?”
황제가 오고 있었다. 으아- 들키면 혼날 텐데! 도망가려는 태자를 부르는 황제. 그러나 온화한 얼굴이었다.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인자하게 웃었다. ‘뭐를 하고 있던 게냐?’ 아비는 아들이 눈치 살피는 것을 괜찮다고 다독이며 물었다.
“저... 이상합니다, 폐하. 이 나무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 같아요.”
“말을 한다고?”
“저랑 남매라고... 그렇지만 아직 후궁들은 아이가 없잖아요.”
“그리고 뭐라고 말하더냐?”
“어머니와 함께 황궁을 지켜봤다고...”
언제나 굳건했던 강한 군주는, 그 말에 크게 동요했다. 눈빛이 흔들리며 아득히 나무를 바라봤다. 과인의 진심이 아닌, 여기에 있던 게냐? 그런 거야?
“폐하?”
“강론이 있지 않느냐. 언제든 허락할 테니, 오늘은 가보거라.”
“예-, 폐하.”
자리를 떠나면서도 황제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뭘까? 무엇이... 폐하가 다른 때와 다른 걸까?
“린- 여기 있어?”
((아뇨.))
“누구냐?”
((어머니는 저를 ‘란’이라 부릅니다.))
“누구냐 물었다.”
((당신의 아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린은 그녀와 당신의 아이를 탄생시켰습니다.))
숨이 막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어미가 어디 있냐는 말에는 대답을 피했다. 이렇게 뒷통수를 치나? 끌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허망하고 화로 들끓었다.
((령의 모집지. 신들의 세계와 인간들이 속한 세계의 중간지점에 계셔요. 하지만 산 자는 가지 못해요. 하늘님의 안배로 흔신(痕新)에서 환생을 기다리고 있어요. 만나시려면 기다려야 되요. 제가 말했다고 린에게 말하지 마세요!))
“결국 털어놓는군.”
((당신도 알아야죠. 나의 아버지인데.))
“고맙구나, 란.”
((나도 어머니도 그리웠어요. 나는 이제 안식을 취할 거예요. 언젠가 다시 만나요.))
“그래. 과인의 아이야.”
((헤헤히힛))
너는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삶은 아니더라도, 나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우리의 추악한 탐욕이 서로를 해쳤구나.
너를 만나러 가겠다. 이 생의 책임을 다하고 너를 찾겠다.
“지함.”
“예, 폐하.”
“이 나무는 누구도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너를 만나면 나를 두고 간 것에 대한 벌을 주어야겠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거라.
우리는 잠시만 이별하는 거다. 너의 각인이 지워지지 않아서... 나에게서 너는 잊혀 질 리가 없지 않느냐. 소원은 대신령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너와 과인이 이뤄낸 것이다.
이젠 놓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