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줄에 꽁꽁 묶어 최근 골머리를 썩이게 만들었던 산적은 물론 도주 중이던 마범죄자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가디언을 다시 찾은 미로.
낮에 마물을 넘겨받았던 가디언이 너울을 쓴 그녀를 알아보고는 달려나왔다.
"곧장 왕국군에 넘겨 주시겠죠?"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밧줄을 넘겨받은 그가 진중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범죄좌와 그 일당을 끌고 갔다.
손을 탁탁 털어낸 미로는 개운한 듯 불어오는 밤바람을 마음껏 만끽했다.
밤은 좋았다. 어둡지만 간혹 주위를 밝히는 불빛도 있고, 쌀쌀한 바람이 불지만 춥지만을 않아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 미로는 천천히 밤길을 걸어 수레로 돌아갔다.
이미 밤이 깊어 평소라면 이곳에 머무르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났을 테지만.. 오늘은 곧장 출발해야 했다.
왕국을 떠돈 지 3년. 그녀는 가디언 사이에선 꽤나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너울로 얼굴을 가린 의문의 마녀가 골머리 썩는 일을 해결해주며 전국을 떠도니 소문이 퍼질 수밖에.
마범죄자를 넘겨받은 그 가디언이 '소문의 마녀'가 자신임을 알아보았기에 미로는 이곳을 곧장 떠나야했다.
어차피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기에 딱히 미련도 없었다. 다만 조금 피곤할 뿐.
하지만 괜스레 머물렀다가 가디언의 지역 관리자가 찾아오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토토마을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수레 뒤로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아직은 어린 다갈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 아인 바르베로타.
수레를 따라 걷던 그는 마을을 벗어나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조심스레 손을 뻗어 뒤에서 수레를 밀었다.
"응?"
수레가 스윽 밀려와서 고개를 돌린 미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따라와?"
아인은 대답없이 수레를 밀기만 했다.
"밤이 되면 산길은 위험해. 얼른 돌아가."
여기까지 쫓아온 그를 냉정히 밀어내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다정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아인은 수레를 밀던 손을 떼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도 데려가."
"뭐?"
미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물론 아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 마을에 있을 이유도 없고 난 돌아갈 곳도 없어.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어디든 상관없어."
똑바로 너울 너머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어쩐지 애처로워서 미로는 잠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잠깐 들었던 대화로는.. 아마도 그 마범죄자에게 가족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난 대단히 착한 사람은 아니라서. 미안하지만 보호자 노릇은 사절이야."
아인의 머리를 헤집은 미로는 그대로 아인을 조금 힘주어 밀어냈다.
"읏-"
그러자 아인은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이런 거! 선물로 안 줘도 되니까 그냥 나 데려가라고!!"
그러면서 불쑥 내민 것은 낮에 미로가 의뢰를 하러 찾아온 노인에게 주었던 목각인형이었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미로가 가만히 아인을 바라보았다.
"그냥 나 좀 데려가!! 여기 더는 혼자 있기 싫으니까!!"
그 마범죄자가 마을에 남아있었다. 모두가 죽고 혼자 남았는데도 이렇게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서럽고, 서럽고, 서럽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 내어 우는 아인을 잠시 바라보던 미로는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녹스까지만 데려가면 되겠지 뭐..'
다음 목적지까지 데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면 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아인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미로는 수레를 길 한쪽에 세웠다.
그리고는 마녀 만물상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문을 열었다.
안으로 한걸음 들어선 미로가 천천히 뒤를 돌아 여전히 훌쩍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인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말하자면 그곳은 별천지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그냥 조금 낡은 나무로 만든 마차처럼 생겼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완전히 딴세상이었다.
마치 호화 저택이라도 되는 듯 밖에서 보았을 때와 그 크기도 천차만별이었다.
전체적으로 옅은 상아색으로 꾸민 내부는 어쩐지 포근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입을 떡 벌린 아인은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 신기한 공간에 훌쩍이던 것도 잊었다.
마녀라서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어쩐지 아인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제껏 마력을 지닌 사람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으니.
향초를 피우고 소파에 몸을 맡긴 미로는 평소였으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벗어 던졌을 너울을 곱게 쓰고 쭈뼛쭈뼛 걸어와 곁에 서는 아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고 싶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앞뒤 다 짤라 먹어 뭐라고 답해야할 지 알 수 없는 그 질문에 아인은 한참을 미로를 바라본 끝에 답을 내놓았다.
"어디든지."
미로는 빙긋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쪽 방에서 쉬어. 녹스까지는 멀지 않으니까 금방 도착이야."
미로가 가리킨 방향에 있는 문으로 아인이 걸어갔다.
방은커녕 장정 두세사람이 겨우 들어가 앉을 크기로 보였던 마녀만물상의 내부는 방도 있고, 거실도 있고, 생활하는데 하나의 불편함도 없을 만큼 넓었다.
문고리를 잡은 아인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라고 해줘서 고마워."
짧은 감사 인사와 함께 닫힌 방문.
선반으로 다가가 약초가 담긴 병들을 매만지던 미로는 아인에게 딱히 어떠한 대답도, 시선도 주지 않았다.
***
녹스. 일명 밤의 도시라 불리우는 왕국의 대도시 중 하나.
왕국을 보호하고 있는 결계의 영향으로 낮은 짧고 밤은 긴 도시이다.
밤의 번화가만은 못해도 낮에도 여전히 사람이 많은 도시이다.
수레를 끌고 녹스에 도착한 미로는 곧장 도시 한구석에 마녀만물상을 세워놓고는 아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비교적 사람이 많은 번화가를 거니는 미로를 아무런 의심없이 따라오는 아인을 보며 미로가 물었다.
"넌 내가 널 팔아 넘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딜 가는지 묻지도 않고 따라와?"
그러자 아인은 되려 의아한 얼굴로 아직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너울을 쓴 미로를 올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그런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거리를 걷던 미로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따라 멈춘 아인이 미로를 한번 살피고 정면을 살피니, 그 앞엔 왕국군도, 가디언도 아닌 것같은 병사들이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미로가 아인을 이끌고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빼꼼 고개를 내밀어 살핀 그곳엔 여전히 험악한 얼굴의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스친 미로는 즉시 골목을 통해 녹스 중심부의 게이트를 찾았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노블의 저택이 있어 번화가가 있는 중심부에 게이트가 하나, 그리고 사람들이 주거하는 외각 끝자락에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지나야 하는 게이트가 하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도시 중심부에서 외각으로 나가는 게이트를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지나는 이 하나하나 모두 얼굴을 확인하며.
입술을 문 미로가 아인의 손을 붙잡고 일단 향하던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된 상황인지 그에게 들어야 대책도 마련할 테니.
**
"분명 녹스로 들어섰으니 반드시 찾아라."
"예."
"게이트를 지나지 않고는 녹스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으니 독 안에 든 쥐야."
**
녹스의 중심부 번화가. 그 한구석에 자리한 작은 약방.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지긋이 나이를 먹은 노인이 약초를 정리하다 고개를 돌렸다.
"저 왔어요."
열린 문틈으로 너울을 쓴 여인이 들어서자, 노인은 마치 손녀가 찾아온 것처럼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웃었다.
"미로가 왔구나."
약초가 늘어선 작은 약방의 안쪽 문을 지나 마련된 작은 객실.
그에게 약을 지어가는 손님 뿐인 작은 약방이기에 평소에는 쓸 일이 전혀 없는 곳이다.
이곳은 늘 미로가 방문할 때에 그가 사용하는 방.
가게 문을 잠시 닫은 그가 방으로 들어서 미로와 함께 잇는 아인을 바라보았다.
"그새 엄마가 된 게냐?"
"실없는 농담 마세요."
허허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푸근한지 아인은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이 아이는 토토마을에서 데려온 아이예요. 갈 곳이 없다기에 할아버지와 이곳에서 지내면 어떨까 하고요."
"싫어!"
미로의 말에 약방의 주인, 그린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미로를 따라간다고 했잖아!"
"어디든 가겠다고 한 건 너야. 난 널 어디까지 데려가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린이 내어준 차를 머금으며 냉정히 말하는 미로를 분한 듯 노려보는 아인.
실제로 그녀는 토토마을에서 녹스까지 오는 내내 단한번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두 사람을 난감한 얼굴로 보던 그린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오는 길에 보았느냐?"
그가 무엇을 묻는지 눈치 챈 미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저희가 지나온 게이트는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그린이 내온 차에 손도 대지 않는 아인을 보며 다시 껄껄 웃은 그가 선반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인 앞에 놓았다.
"노블의 사병이야."
그의 말에 미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노블의 사병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가디언 사이에서 떠도는 너울을 쓴 '소문의 마녀'에는 요만큼 관심도 없던 놈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최근 들어 너를 찾겠다고 혈안이 되었더구나."
찻잔을 내려놓은 미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범죄자를 잡고, 마물 퇴치를 해주고.. 값을 치르면 의뢰를 들어준다는 소문의 마녀.
저들이 처음부터 소문의 마녀를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회유가 목적이었는지 억류가 목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소문의 마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소문의 마녀는 쉽게 접촉할 수도 없었고, 정체를 확인할 길도 없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자 그들은 왕국에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 소문의 마녀를 점차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죠?"
당연히 그것까지 알고 있겠죠? 하고 묻는 투였다.
픽 웃은 그린이 슬쩍 아인을 살폈다. 이 아이가 있는 곳에서 얘기 해도 상관 없는 것이냐고 묻는 듯이.
괜찮다고 미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티폰 산맥이 마물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야."
갑자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튄 이야기에 미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 이번에 널 찾는 건 아마도 회유가 아닐까 싶다."
티폰 산맥은 녹스의 반대편, 왕국 끝자락에 위치해 꽤나 먼 거리에 있는 산맥이다.
게다가 지형이 험악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인 그곳은 정령의 안식처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하늘과 어우러진 그 모습이 아름다운 산맥이다.
그런데 그런 곳이 마물에게 점령. 점령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이면 그 수가 한둘이 아니라는 뜻인데..
"..어떻게..."
국내에서 산맥을 점령할 만한 마물이 생겨났을 리가 없다. 그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계 때문에 외부에서 국내로 들어올 수 있을 리도 없다.
혼란스러워 하는 미로에게 미소를 지운 그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벌써 산맥 주변 마을들은 마물들 때문에 피해를 입는 모양이야. 머지않아 그 피해는 에스타스나 마네에까지 퍼지겠지."
"..그.. 결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죠?"
결계의 문제. 그것은 즉 왕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음을 뜻한다.
"왕녀의 신변엔 문제가 없네."
돌아온 그린의 대답에 미로는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뱉아냈다.
"하지만 결계에 문제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네."
미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소를 지워냈던 그린은 다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구나 이런 위험한 소식이라."
당황스러운 소식에 긴장했던 몸에 힘을 뺀 미로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아인을 힐끔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이해할 수 없으나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것은 인지하고 있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
"후.."
길게 한숨을 내쉰 미로가 다시 그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게이트를 빠져나갈 방법은요?"
그 질문에 그린은 곤란한 듯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얼굴을 일일히 확인하는 병사들이다. 맨얼굴을 드러내도, 드러내지 않아도 문제가 될 미로가 지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하늘을 나는 것 밖에 없을 터였다.
"후..."
대답이 없는 그린을 보며 미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하게 신뢰하는 녹스의 정보통인 그린이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이곳에서 게이트의 병사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티폰 산맥의 소식을 들은 이 시점에서 그렇게 한가하게 이곳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
곤란함이 묻어나는 침묵만이 내려앉은 공간에 긴장한 얼굴로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인이 고심끝에 입을 열었다.
"나를.."
적막을 깨트리는 작은 목소리에 두사람의 시선이 아인을 향했다.
"나를.. 데려가겠다고 약속하면."
주먹을 꼭 움켜쥔 아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미로를 바라봤다.
"나를 믿어주겠다고 하면 내가 지나게 해줄 게. 병사들이 지키는 게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