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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햇살
작가 : 하랑
작품등록일 : 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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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3     조회 : 62     추천 : 5     분량 : 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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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되묻는 미로의 목소리엔 곤란함과 당혹감이 묻어났다.

 

 "네가 무슨 수로-"

 

 말을 잇는 미로를 향해 아인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미로의 얼굴을 가린 너울의 천 끝자락을 움켜쥐고는 말했다.

 

 

 "날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 안나?"

 

 

 말을 멈춘 미로는 아인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겉모습은 물론, 목소리마저 의심할 여지 없는 노인이었다.

 

 "얼굴을 보여줄 만큼 날 믿어주면. 지나게 해줄 게."

 

 

 미로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데려간다고 약속..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머리속을 차지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우리 극단은 물론, 외부에서 온 극단 사람들도 나만큼 분장 잘하는 사람은 없댔어."

 

 그 실력은 딱히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적에 당연하게도 노인인 줄 알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하지 못하는 미로가 끝끝내 고개를 저으려는데, 그린의 목소리가 그 행동을 가로막았다.

 

 "그리하는 것이 좋겠구나."

 "할아버지!"

 

 반대의 의미를 담은 미로의 외침이 그린을 향했다.

 반발하듯 벌떡 몸을 일으킨 덕분에 아인의 손에 붙잡혔던 너울이 소리없이 빠져나왔다.

 

 

 "노블이 손 안에 쥐고 흔드는 도시가 녹스뿐일 리가 없지 않느냐. 지금 병사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린다고 해도, 에스타스에서, 마네에서, 프리나에서, 같은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저 아이가 만일 병사들의 눈을 피해 당당히 게이트를 지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앞으로도 너를 도울 수 있을 터. 아니면, 앞으로는 노블이 관리하는 도시는 가지 않을 셈이냐?"

 

 몸을 일으켰던 미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린이 하는 말은 다 옳았다. 이것은 지금 한번 무사히 넘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을 다시 탐내기 시작했고, 이번엔 그들의 명분이 분명한 만큼 전처럼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미로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인에게 미로는 그가 원하는 것을 마냥 들어줄 수만은 없었다.

 

 

 "난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아."

 

 실망감과 원망. 그 눈빛을 받아내던 미로가 천천히 손을 올려 너울의 천을 걷어냈다.

 

 

 "하지만 얼굴을 보여줄 만큼은 믿어줄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천. 그리고 드러나는 하얀 얼굴.

 아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껏 목소리만 들어오던 미로의 얼굴.

 

 검은 흑발과 대조되는 선이 고운 하얀 얼굴과 도톰한 복숭아빛 입술. 무엇보다도 깊고 깊은 숲 속에 갇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그녀의 눈. 마치 금빛 햇살을 푸르른 숲을 보는 듯한 녹금안.

 

 미로의 얼굴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인을 보며 그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저 얼굴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굳이 쫓기는 처지가 아니어도 구애하는 남자들에게 쫓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리고 마치 그에겐 손녀 같은 아이라, 그린은 차라리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가려 놓으면 최소한 날파리들이 달려들지는 않을 테니.

 

 

 "할아버지 말이 맞아. 앞으로 녹스 이외의 모든 도시에서 이렇게 게이트를 매번 봉쇄한다면 나 혼자서는 지날 수 없어. 하지만-"

 

 말을 잇던 미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천을 걷어내 맨 얼굴이 보이자,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듯 했건만 표정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함께 있어도.. 괜찮을까?'

 

 의문이 들었다. 정말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괜찮은 건지.

 10년전에 이미 지명수배가 떨어져 자신은 쫓기는 신세였다. 그 어린 시절부터 7년간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스승은 결국 그녀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었다. 그리하여 그곳을 뛰쳐나와 3년. 미로는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으며 각 도시마다 정보상 이외에는 연을 맺지 않았다.

 

 말이 없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있던 그린이 여유롭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삐그덕 하고 탁자를 짚고 그가 일어나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니 당장 출발하기는 어렵겠구나. 무리하면 오히려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게야."

 

 괜한 옛일을 떠올리며 불안에 잠겨 있던 미로가 정신을 차렸다.

 

 

 "아, 하지만 서두르는 편이-"

 "먼 길 가는 것이니 어차피 내게서 약초를 받아가야 하지 않느냐. 밤 축제가 끝나는 새벽녘까지는 준비를 마칠 터이니."

 

 그는 선반 서랍을 뒤적이더니 입술 위로는 전부 가려주는 가면 두개를 미로에게 건넸다.

 

 "너울보다는 이게 눈에 덜 띌 게다. 축제니까 가면을 쓴 이도 많지. 밤축제 구경이라도 하고 오너라."

 

 미로는 여전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여차하면 네가 그 아이를 지켜주면 될 것 아니냐,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말투였지만 들으라는 듯 충분히 큰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일부러..'

 

 입술을 비쭉 내밀고는 그린의 뒷모습을 흘겨보던 미로는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쓸데없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괜한 옛일까지 떠올려가며.

 위험해진다면 지키면 될 일이고, 자신이 함께 있어 괜한 피해가 간다면 놓아주면 될 일이다.

 

 이내 동그랗게 휘어진 미로의 입매를 넋을 놓고 바라보던 아인은 그녀가 그린이 건네 준 가면을 내밀었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턱 아래 매여 있는 천을 잡아당겨 머리에 고정시켰던 너울을 풀어냈다. 그러자 더욱 선명히 보이는 미로의 얼굴과 어깨위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흑발.

 

 

 "나, 게이트 지나게 해줄 수 있어?"

 

 조금전까지 불안감에 잠겨 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웃음기를 머금은 미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볼을 붉게 물들인 아인이 황급히 그린이 내어준 가면을 얼굴에 썼다.

 

 

 "전혀 다른 얼굴로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래?"

 

 가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보다도 키가 작은 아직 어린 아이. 자신이 몰래 두고 도망쳤던 그보다도 훨씬 작고, 훨씬 약하고, 못미더운데도.. 그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당히 얼굴을 들고 게이트를 지날 수 있게 하는 일.

 그런 점이 어쩐지 우스워 픽 웃어버린 미로도 아인을 따라 가면을 썼다.

 

 "녹스에 와본 적 있어?"

 

 아인은 극단 식구들과 함께 연극을 하러 녹스에 와본 적은 있었지만 연극은 늘 밤축제와 시간이 겹쳐 밤축제를 본 적은 없었다.

 

 "응. 하지만 밤축제를 본 적은 없어."

 "그럼 가자. 녹스의 밤축제는 볼거리가 많으니까."

 

 

 

 

 ***

 

 

 어스름한 저녁.

 미로가 바로바로 쓸 수 있게끔 약초를 다듬고 조합하던 그린이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아직 어린 나이이거늘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

 

 조금 안타까운 마음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던 그린은 옆에 한보따리 놓여있는 약초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늙은이를 너무 부려먹는군.'

 

 

 

 ***

 

 

 낮은 짧고 밤은 긴 도시, 녹스.

 금세 찾아온 어둠은 하늘을 뒤덮었지만 거리는 낮보다 더욱 환하게 빛났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사이로 행여나 길을 잃을까 미로의 옷깃을 꼬옥 붙든 아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쉬지않고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옷깃을 움켜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미로는 곡선을 그리며 미소 짓더니 아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억 속 저편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이를 떠올리며. 그가 웃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는 건 아직 어색하지만. 그가 해주었던 것처럼 이 도시를 좋은 기억으로 남기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 녹스에 도착하던 날을 떠올린 미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 어느 한부분에도.. 그가 없었던 적이 없다.

 

 

 

 살포시 손을 잡은 두 사람은 마음 편히 녹스의 밤축제를 즐겼다.

 

 

 축제를 즐기는 아이들이 저마나 손에 들고 있는 녹스의 명물 아이스크림을 아인이 쳐다보기에 미로는 그것을 구입해 아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작은 그릇에 폭신폭신한 하얀 솜사탕과 그 위에 얹어진 동그란 아이스크림.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구름을 떠다가 그릇 위에 올려놓은 듯이 예뻤다.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아인을 보며 미로는 이 아이가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구나.. 싶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녹스의 거리. 그 거리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지나치는 사람을 부르며 익살스럽게 물건을 권하는 장사치들도, 그 속내를 다 알면서도 이 밤을 기분 좋게 보내려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들도. 모두 고민거리 따위 요만큼도 없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그 광경이 아인은 신기했다.

 

 토토마을도 녹스 만큼은 아니겠지만 밤이 길고 밤엔 늘 떠들썩 했지만 이 거리와는 비교도 알될 작은 규모였던 데다가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들뜨지는 않았던 것 같다.

 

 

 "거기 아가씨-"

 

 주변의 웃는 사람들만 봐도 좋아지는 듯 미소를 머금고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경련이 일어날 만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중년의 남자가 앞을 가로막아 멈춰 섰다.

 초승달 모양의 신기하게 생긴 술잔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미로에게 익살스럽게 웃으며 남자가 잔을 내밀었다.

 

 "신월주도 맛 보시고 가세요!"

 

 웃지도,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미로의 시선에 잠시 움찔한 남자가 술잔을 들지 않은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저 하늘의 달빛을 담아 오늘은 더욱 그 맛이 신비합니다!"

 "....."

 "...그, 잔은 초승달 모양이지만 맛은 꽉 찬 보름달! 한 번 맛보면 멈출 수 없습니다!"

 "....."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음에 남자가 진땀을 빼고 있을 무렵, 한잔 팔아먹으려 무던히도 애쓰는 구나 싶은 미로가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술잔을 받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금세 인파속으로 사라지는 남자.

 미로는 가만히 술잔을 바라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것저것 먹거리를 사 먹기도 하며 거리를 한참 거닌 두 사람은 잠시 숨도 돌릴 겸 호숫가를 향했다.

 

 탁 트인 호숫가는 푸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춤 추고 그를 따라 물결도 춤 추는 조용하고 차분한 곳이었다. 아름다운 달이 떠 있는 밤하늘이 부럽기라도 한 건지, 호수에도 그 모습이 비쳐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예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아인을 보며 미로는 입술이 곱게 휘어지며 웃었다.

 호수를 바라보며 주변을 거니는 두 사람. 그러다 문득 손에 든 잔으로 시선이 가자, 참 예쁘게 생긴 술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과 퍽 잘 어우러지는 술잔이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미로가 잔에 든 술에 살짝 입술을 댔다. 그리고는 한걸음 더 내디디다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휘청.

 

 크게 휘청이는 미로를 놀라 붙든 아인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괜찮아?"

 

 

 그리고 그녀가 휘청거린 것이 마치 일종의 사인이라도 되는 듯 낯선 사내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장정 셋은 낄낄 웃으며 가볍게 아인을 미로에게서 떼어내고는 둘은 아인에게, 그리고 하나는 술을 마셔 힘이 빠진 미로를 붙들었다. 그리고는 끈적한 시선으로 미로를 아래부터 쭉 훑었다.

 

 "그러게, 이 녹스에서. 낮이면 몰라도 밤거리를 남자를 대동하지 않고 여자 혼자 이런 어린아이와 다니다니."

 "이건 뭐, 날 잡수시오- 하고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닌가?"

 

 남자들의 기분 나쁜 눈초리에 아인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거 놔! 그 손도 놔! 이 버러지 같은 것들아!!"

 

 발버둥치는 아인을 인상을 구긴 채 노려본 남자들이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서 가면을 벗겨 봐. 그 얼굴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니까 말이야."

 "맞아, 그렇지."

 

 낄낄거리며 미로를 붙든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가린 가면으로 다가갔다.

 

 "안돼!"

 

 아인은 자신에게 맨 얼굴을 보이기까지 깊이 고민했던 미로를 떠올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안되긴 뭐가 안되냐는 빈정거림과 함께 남자의 손끝이 미로의 가면에 닿았을 무렵.

 

 

 "뭐라는 거야. 이 덜떨어진 것들이."

 

 인상을 찌푸린 미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퍽.

 미로는 붙잡힌 상태에서 발뒤꿈치로 남자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적인 고통에 다리를 감싸려 몸을 숙인 남자를 향해 몸을 든 미로가 망설임 없이 남자의 이마를 향해 무릎을 들어올렸다.

 

 빡.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남자는 기절한 듯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뭐야! 왜 아직도 의식이 있어!!"

 "너 제대로 한 거 맞아?"

 

 아인을 붙든 남자 둘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중 하나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미로에게 술잔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

 장정 하나를 순식간에 기절 시킨 미로와 눈이 마주친 아인은 자신을 붙든 남자의 팔을 덥썩 물어뜯었다.

 

 "으악!! 이 꼬맹이가!!"

 

 그러자 다른 남자가 아인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을 즈음.

 순식간에 남자의 뒤로 다가선 미로가 정말 일말의 자비도 없이 있는 힘껏 남자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컥!!"

 

 숨을 훅 들이마시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자 아인마저 인상을 찡그리고 남자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미로는 틈을 주지 않고 쓰러진 남자를 밟고 뛰어올라 팔을 물린 남자의 머리를 곧게 뻗은 다리로 걷어찼다.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장정 셋을 순식간에 때려눕힌 미로를 보면서 아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가자."

 

 어쩐지 서두르는 기색의 미로가 아인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로 몸을 숨겼다.

 눈앞에 보이는 가게로 무작정 들어선 미로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벽을 짚었다.

 술잔을 다 비우지도 않았고 살짝 목을 축인 정도였다. 그런데도 몸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았다.

 

 "괜찮아?"

 

 걱정스레 묻는 아인을 보며 미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퍼엉.

 

 때마침 밖에선 첫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끝자락에 자리한 책방. 이렇게 시끌벅적한 시간에도 문을 연 것이 어쩐지 의문이었지만 일단은 사람이 많지 않은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기로 한 미로는 터벅터벅 걸어가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 중 하나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책방 주인으로 보이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가 다가오자, 미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축제를 너무 즐겼나 봅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 이곳에서 숨을 돌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책을 정리하러 사라졌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인은 다시 미로를 살폈다.

 

 "아까 그 술에 약이라도 들었던 거야?"

 

 고개를 끄덕인 미로가 주머니에서 해독초를 꺼내 아주 조금 씹어 삼켰다.

 길게 한숨을 내쉰 미로는 조금 더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약효가 돌기를 기다렸다.

 

 펑. 퍼엉.

 

 문밖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상태가 나아짐을 느낀 미로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아인을 바라봤다.

 

 "미안. 폭죽.. 보고싶었을 텐데."

 

 그러자 아인은 양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폭죽 같은 건 지겹도록 봤는데 뭘. 토토마을도 하루가 멀다 하고 폭죽이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미로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던 미로는 테이블에 돈을 올려 두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 거야?"

 

 아인이 걱정스레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미로. 소량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가만 내버려 두었어도 차차 나아졌을 것을 해독초까지 생으로 씹어 넘겼으니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가자. 곧 마지막 폭죽이 터질 거야. 폭죽이 끝나면 갈 곳이 있어."

 

 어리둥절한 아인을 이끌고 따스한 책방을 나선 미로.

 문을 나서자 거리를 들뜬 얼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곧 시작이래!"

 

 문을 나서 하늘 위를 예쁘게 장식한 폭죽을 넋 놓고 바라보는 아인을 잠시 보던 미로가 이내 그를 이끌고 걸음을 서둘렀다. 두 사람이 다시 향한 곳은 조금 전 습격을 받았던 그 호숫가. 하지만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미로가 때려눕힌 남자들 쪽엔 가디언이 몇인가 보였다.

 

 마지막 폭죽이 하늘을 빛으로 수놓았다가 이내 사그라들자, 호숫가에서 들뜬 사람들이 하늘로 풍등을 날렸다.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는 아인을 보며 미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이 광경을 보았을 때의 자신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그도 그때 자신을 보고 지금의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꼈을지.. 미로는 문득 궁금해졌다.

 

 호숫가에 모여 사람들이 날리는 것과 같은 종류의 풍등을 두개 구입해온 미로가 하나를 아인에게 내밀었다.

 

 "자."

 "이게 뭐야?"

 

 어리둥절해 하는 아인에게 미로가 풍등을 쥐어 주고는 붓도 함께 건넸다.

 

 "자, 여기에 소원을 적어서 하늘에 띄우는 거야."

 "소원을?"

 

 되묻는 아인에게 미로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혹시 모르잖아. 하늘이 이뤄줄지도."

 

 붓을 받아 든 아인은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가만히 풍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소원.. 아버지도, 극단 식구들도 모두 잃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풍등을 내려다보는 아인을 보며 미로가 쓰게 웃었다. 입안의 쓴맛을 애써 삼키며 미로는 보란 듯이 자신의 소원을 풍등에 적었다.

 

 [나는 괜찮으니 부디 무탈하기를]

 

 꼭 한 사람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머리속에 떠올린 사람들 모두를 뜻하는 소원.

 무언가를 적어낸 미로를 아인이 빤히 바라보았다.

 

 "소원 적은 거야?"

 

 정말 이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냐는 듯한 말투. 미로는 자신이 적은 소원을 품에 감추며 말했다.

 

 "소원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이루어져."

 "정말 소원이 이뤄져?"

 "글쎄?"

 

 어깨를 으쓱이는 미로를 아인이 풍등과 번갈아 바라봤다.

 소원이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도 모르는데 왜 소원을 적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미로가 아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혹시 모르잖아. 하늘엔 달도 있고, 해도 있고, 구름도 있고. 또 별들도 저렇게나 많으니까. 그중 하나 정도는.. 네 소원을 위해서 애써 줄지도."

 

 가만히 풍등을 바라보던 아인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하나둘씩 풍등들이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까만 밤하늘에 마치 별처럼 풍등들이 떠올랐다.

 저렇게나 많은 소원들이 있는데 과연 자신의 소원도 들어줄까?

 하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이 하늘로 날아올라간 풍등의 수보다 훨씬 많아 보였기에 아인은 붓을 들었다.

 무슨 소원을 써야할 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조금 전, 이 호숫가에서 자신들을 덮쳤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미로의 말대로. 저렇게나 별님이 많으니 하나 정도는 자신의 소원을 위해 애써줄지도 모르기에.

 

 [강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소원을 적은 아인은 미로가 그랬던 것처럼 풍등을 제 품속에 숨겼다. 소원이 보이지 않도록.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려 불을 붙인 후, 하늘을 향해 풍등을 놓아주었다.

 

 풍등을 띄우는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미로의 입술도 둥글게 휘었다.

 

 오랜만에 띄워보는 풍등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풍등을 띄우면 그가 생각났다.

 

 

 까만 밤하늘을 뒤덮은, 사람들이 올려보낸 불빛들.

 

 제 손을 떠난 소원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소원이 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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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 11/24 325 5
13 /12 11/21 296 4
12 /11 11/19 290 4
11 /10 11/16 269 4
10 /9 11/14 314 5
9 /8 11/13 313 5
8 /7 11/11 310 5
7 /6 11/9 302 5
6 /5 11/7 292 5
5 /4 11/5 27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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