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낭만 그 자체였다. 학교의 명물이라는 벚꽃은 온 힘을 다해 예쁨을 뽐냈다. 길가에 떨어진 꽃잎들을 보니 진짜 봄 같은데 그걸 보는 손끝은 아직도 차가웠다. 양손을 비비다가 니트 소매 끝을 끌어내려 손끝까지 감쌌다. 펜만 쥐고 있는 엄지와 검지를 빼고는 모두 니트 속으로 감춰버렸다.
수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 창가 쪽 구석에 앉은 나는, 사람들로 꽉 찬 강의실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공책 구석에 투박하고 예쁘지 않은 꽃 그림을 그렸다.
올해 3월은 유독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스무 살이 주는 묘한 설렘과 새로운 학교에서 맞이하는 생활환경 그리고 주변 사람들, 그 근처에 마련한 나의 보금자리까지도 모두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그것들이 주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그 속에서 나는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과 잘해야만 한다는 벅찬 책임감 같은 것들이 생겼으니까.
휴, 한숨이 포옥 새어 나왔다. 그런 거창한 포부를 담은 결심들은 벌써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난 꽃을 보니 괜히 얄밉다. 괜한 심술을 부려 본다.
가여운 것들. 며칠 후면 저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질 텐데 저것들은 그걸 알기나 할까. 그래, 너희는 예쁘기라도 하지.
모두 너를 예쁘다고 찬양하고 있으니 퍽 좋기도 하겠다.
나는 타인의 기분에 굉장히 영향받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종종 누군가의 웃음소리나 콧노래에 안심이 되곤 했다. 고등학교 때 잘 모르는 여자애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 되게 의식하네.’
몰랐다.
얼굴만 겨우 아는 사이고 대화 몇 마디 나눠본 적 없는 그 애는 단 한 문장으로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좋은 뉘앙스로 들리지 않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실이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초조했다. 그 말을 들은 후 달라진 일은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나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평소에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게 됐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 확실히 불편했다. 좋게 말하면 배려고 꼬아서 보면 눈치다. 그건 말 그대로 시간의 소비, 아니 낭비다. 불편한 시간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쓸데없이 무리 지어 어울려 다니거나 무언가를 함께 해야 하는 일은 되도록 피했다.
갑자기 그 여자애의 얼굴과 말투가 다시 머릿속에 떠다닌다. 그 날의 상황이 다시 느껴진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부끄럽고 창피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의실 중앙에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자세 그대로 소리가 나는 쪽을 힐끔 봤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다들 신났다. 언제나 그렇듯 내겐 익숙한 풍경이다.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제법 친근한 무리였다. 쓸데없이 저 사람들이 친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생각났다. 김유현이 웃고 있다. 저 안엔 김유현이 있다.
김 유현. 줄기차게 생각나는 그의 이름.
나보다 한 살 많은 동아리 선배다. 다가가기 힘든 타입이다. 일단 외모에서 풍겨 오는 아우라가 그랬다. 잡티 없이 맑은 피부와 언제나 깔끔한 차림새를 보면 왠지 깐깐하고 어딘가 예민해 보여서 친해지기 어려워 보였다.
그는 모두를 만만히 여긴다. 그렇다고 나쁜 의미는 아니다. 아무튼, 세상 근심이라곤 전혀 모르고 자란 도련님 같다.
배려와 여유의 아이콘이랄까. 태생부터 나긋나긋하고 다정하기 그지없게 태어난 사람. 하지만 그 상냥함으로 선을 긋고 나와는 우주만큼 먼,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나는 요즘 그런 김유현을 마음에 담아두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꾸만 눈에 보였다. 알면 알수록 다시 보였다. 안 보이던 것들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며 상냥했지만 막역하게 대할 수 없는 선이 맘에 들었다. 또한, 종종 시답잖은 농담을 해댔으며 은근히 웃겼다.
고학번의 선배들에게도 장난을 치는 2학년 오현석 말고는 김유현을 편히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볼 때마다 늘 주위에 사람이 많은 편이었지만 딱히 외향적이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남자들이랑 있을 땐 유독 말투가 까칠하고 무뚝뚝했다. 그런데도 남자애들은 그를 참 좋아했다. 그러면 다행이게. 여자애들은 더 좋아했다. 괜히 나까지 휩쓸려 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이마를 쓰다듬어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던 그때 김유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웃고 있는 얼굴 덕분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표정한 나와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2초쯤 마주쳤을까? 시들어 가는 꽃잎처럼 그의 얼굴도, 나와 비슷해졌다.
김유현의 시선은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내 시선은 그를 따라갔다.
그와 친한 사람들. 저 사람들은 김유현의 주위를 맴도는 반딧불처럼 반짝반짝 웃었다. 볼 때마다 그랬다. 김유현이 다시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며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봤는데 인사도 안 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으려 노력했다.
옆에 앉은 사람도 그렇고 저쪽의 무리마저 모두 이쪽으로 시선을 쏟아낸다. 온몸에 꽂히는 시선이 불편하면서도 괜히 우쭐해졌다.
반딧불들이 반짝반짝 눈빛을 빛내며 쳐다보네. 잘 듣고 있니. 우리의 서먹한 대화를.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김유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 아파?"
"아니요. 뭐 좀 생각하느라고."
"강의 끝나고 같이 밥 먹을까?"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말이 없자 밥, 이라고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손으로 밥 먹는 모습을 흉내 냈다. 이상하게 그 모양새가 굉장히 품위 있어 보였다. 참 별게 다.
김유현은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시간 안 맞으면 할 수 없고.”
걸어가는 와중에 내게 하는 말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의 등을 보며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상상했다. 장난꾸러기 꼬마 같은 얼굴을 한 그가 잔상처럼 머릿속에 빙글빙글 맴돌고 덩달아 목소리도 자꾸 메아리쳤다.
그만 생각하라는 것처럼 책상을 타고 전화기의 진동이 드르륵 울렸다. 시끄럽게 불쑥 도착한 건방진 메시지였다.
-뭐 먹을래?
전화기 속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더 깜짝 놀랐다.
김유현에게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 그의 프로필사진이나 상태 메시지를 감상하던 게 다였다. 혹시라도 잘못 누를까 노심초사하며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사진을 클릭하고 확대를 해보곤 했다. 그것도 꼭 아무도 없을 때 몰래몰래.
익숙한 그의 프로필 사진과 이름 사이로 글자가 뜨니 꽤 당황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턱을 괴고 책을 읽는 옆모습이 보인다. 분명히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아무런 반응 없이 턱을 괸 손가락만 까딱거릴 뿐이다.
뭐라고 답을 할까 망설이다가 아무런 답장 없이 전화기를 손에서 놨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됐다. 온 신경이 다 저기에 쏠렸다.
-학교 앞에 파스타 집 새로 생겼는데 되게 맛있대.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전화기의 까만 화면을 톡톡 건드렸다. 김유현에게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며 화면이 반짝 켜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1시 수업이라서 간단히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김유현은 턱을 괸 손을 풀고 전화기를 확인했다. 씩 웃었다. 나는 볼펜 끝으로 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강의시간 내내 김유현을 의식했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수업이 끝났다.
나는 일부러 느긋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행동은 굼떴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바빴다. 김유현은 나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직 부딪히지 않은 시간이 머릿속에서 자꾸 반복된다. 밥을 먹는 모습, 어색하게 나누는 대화, 그리고 헤어짐까지.
천천히 가방을 챙기려고 해도 그러기엔 짐이 너무 간소했다. 주위를 보니 김유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까진 같이 밥 먹을 생각에 신경 쓰이고 불편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김유현은 강의실 복도 창가에 햇살을 등지고 걸터앉아 있었다. 마치 햇빛의 온기를 온통 머금은 것처럼, 그의 온몸에서 햇빛이 반사되어 쏟아져 내렸다. 쭈뼛거리며 걷는 나를 보고 웃었다. 얼굴을 보니 주위 공기까지 청아해졌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가만히 멈춰 섰다. 김유현은 뚜벅뚜벅 걸어와 앞으로 섰다. 나는 그런 김유현을 멀뚱히 올려다봤다.
정말 같이 먹는 건가?
“가자.”
“네?”
“거기 갈래? 내가 말한 파스타 먹으러.”
뭔가 믿기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가.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저 이따가 1시에 수업 있어요.”
김유현은 눈썹을 구부리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래?”
하, 귀여워.
우리는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단둘이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김유현의 애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대단한 데이트라도 하듯 떨렸다.
당연히 단둘이 먹는 밥인 줄 알았다. 학생회관 앞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동아리 친구들을 보니 누가 심장에 얼음을 퍼부은 것처럼 단단해졌다. 게다가 모두 나와 같은 1학년 여자애들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소영이도 있네.”
내 이름을 부르면서도 모두의 시선은 김유현에게 향해있었다.
“어, 너희도 점심 먹으러 온 거야?”
“네. 저희도 같이 껴도 돼요?”
“어?”
김유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봤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포함해 여학생만 넷. 그리고 남자는 김 유현 하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 여자애들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대화를 주도했다.
그 안에서 불편한 것은 오직 내 감정뿐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일찍 올걸, 아니면 조금만 더 천천히 걸어왔다면 좋았을 걸 후회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모르겠지만, 신나서 웃고 있는 여자애들을 보고 있자니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김유현은 모두에게 식권을 나눠줬다. 여자애들은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대화의 처음과 끝엔 언제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저 마음을 이해한다. 나에게도 용기가 있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 텐데.
“우와 선배님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럼 그렇지. 데이트일 리가 없다. 당연한 일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부풀었던 기대는 팡- 터졌다.
현. 실. 자. 각. 타. 임.
내가 지금 여기서 제일 신경 쓰이는 건 이소진이다. 하필이면 제일 예쁜 그 애가 김유현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김유현이 내 옆에 앉았다는 거, 그거 하나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발 서로 쳐다보며 웃지 말고 밥만 열심히 먹길 바란다.
이소진은 사랑스러운 짓을 많이 한다. 딱히 어떤 행동이라고 설명하기는 힘들고 그냥 그런 게 몸에 뱄다. 철없게 구는 행동마저 아무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 애가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싫다. 모두가 그 애를 좋아하고 챙긴다. 여자애들끼리 모여 있을 때도 그랬다. 얄밉다.
나는 그 애의 장점을 잘 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안다.
그 애를 종종 감탄하고 부러워할 때가 있다. 감탄으로 끝내면 그만인 일을 그냥 두지 않고 꼭 나와 비교하고 분석까지 하게 했다. 그래서 싫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선배들 앞에서 1학년들이 자기소개를 했던 적이 있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 발언권을 줬을 때 도대체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너무 별 것 아니어서 허망했다. 다음으로 이소진이 소개를 했는데 선배들이 기다렸단 듯이 마구 질문을 퍼부었다.
그 날 이야기의 중심은 이소진이었다. 여기저기서 그 애의 이름이 들렸다. 그러다가 어느 한 선배가 내게 작은 심부름을 시키며 ‘아, 근데 너 이름이 뭐랬지?’라고 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서글픔과 부러움이었다.
그 애의 잘못은 아니다. 순전히 내 문제였다.
나는 혹시나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까 봐 말도 삼가고 눈빛도 삼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로 괜한 오해를 산다. 그러나 하염없이 장난과 농담 사이를 오가는 이소진은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평범하게 포장된다. 자칫하면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나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말들을 그 애는 참 쉽게 했다.
이소진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견엔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여자인 내가 봐도 이런데 남자애들이 그 애의 웃는 얼굴을 보면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김유현도 그중 하나겠지. 그래서 더 싫은 거다.
특히 그 애가 웃으며 한쪽 어깨를 올리고 고개를 옆으로 꺾는 자세를 할 땐 정말 귀엽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덩달아 같이 웃었다. 그러니 제발 그 애가 김유현 앞에서 그리 웃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명백한 질투였다. 이소진 때문인지, 이소진을 보고 있을 김유현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됐든 짜증 나고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