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못 먹어? 초식 주의자야? 아니, 채식주의자.”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걸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눈을 마주하는 것뿐인데 살결이 닿은 것처럼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네?”
어벙하게 되묻는 내가 싫었다. 이게 아닌데.
“맛있는 거 많잖아.”
김유현은 앞에 놓인 접시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네.”
아, 왜 이런 단답형밖에 나오지 않는 걸까. 마음은 이게 아닌데.
김유현은 입술을 삐죽였다. 침묵은 짧았다.
“너 취했지?”
“아뇨.”
“취했네.”
발그레한 내 볼을 가만히 보더니 내 앞에 놓인 잔을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더는 마시지 말라는 무언의 따사로움이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에게 환상을 가득 품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비슷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저 술 쎄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연어 한 점을 내 앞에 놓았다. 우아한 젓가락질이었다. 고개만 끄덕거리는 내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먹어봐. 이거 맛있어.”
그가 준 연어를 꼭꼭 씹었다. 궁금한 눈을 하고 물었다.
“맛있지?”
두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볼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람에게 수려하다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 하지만 김유현은 보기만 해도 수려했다. 잘 다려진 셔츠와 보들보들해 보이는 니트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꼭 그렇게 생겼다. 늘 좋은 냄새가 날 것처럼.
“잠깐만, 있어 봐.”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계속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아니 아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 요거트와 작은 숟가락을 가져왔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요거트와 숟가락을 내 앞에 둔다. 살짝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거 너만 주는 거야.”
뻥치고 있네. 물론 이 말은 속으로 삼켰다. 김유현은 직접 숟가락에 요플레를 떠서 내 손에 쥐여줬다.
“상큼한 거 먹고 속 좀 달래라고.”
목소리가 낮아서 그런지 말투는 굉장히 투박하고 딱딱했다. 눈빛조차 무미건조했으며 감정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왜 그렇게 어른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신입생이라는 걸 망각한 채 대꾸도 없이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눈길을 피하곤 고개를 돌렸다. 아마 취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맨정신에 누군가를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위인이 못 된다. 내게 그건 용기였다.
내 시선이 머문 곳은 머쓱하다는 듯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우아한 손가락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입술을 비틀더니 자신의 뒷머리를 한번 쓰다듬는다. 그리고 코끝을 만지면서 눈이 마주쳤다. 그때 한번 심장이 쿵.
눈이 마주친 채로 내가 눈을 두어 번 정도 깜빡였을 즈음 그가 웃었다. 그리고 또 쿵.
평소라면 별것도 아니었을 그 작은 손짓들이 꽤 근사하고 야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심장이 바닥을 쳤다 올라오며 쿵쿵거렸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 미소가 잔상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렸다. 갑자기 우리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정신이 확 들면서 술이 깨는 것처럼 손끝이 또다시 저릿했다.
“왜 그래?”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왜.”
김유현은 말끝을 조금 늘렸다. 별것도 아닌 그 말투가 너무 다정하게 들렸다. 나는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예 자리를 일어섰다. 나에겐 너무 조심스러운 공간이라 한 발짝 나아가는 것마저 긴장하게 되는 일이었다. 낯선 곳이었다. 김유현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따라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굉장히 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똑바로 걸으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발길이 향한 곳이 부엌이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컵이 없었다. 개수대와 싱크대엔 컵이며 그릇들이 정신없이 뒤죽박죽 뒹굴고 있었다. 종이컵은 너무 멀리 있었다. 내가 온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왜? 물줄까?”
내 뒤에 바짝 붙어 묻는 김유현의 목소리엔 걱정이 배어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따뜻한 질문이었다. 어쩜 저런 말들만 해댈까.
“아니요, 저 설거지하려고요.”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마치 나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설거지요.”
그러니까 저리 가세요, 라는 의미였다.
“설거지하겠다고?”
우리 집인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네. 하고 싶어요.”
그의 눈이 커졌고 눈썹이 이마 위로 솟았다가 내려왔다. 그러나 나에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해. 하고 싶으면 해야지.”
웃었다. 그래서 안심이 되고 편했다. 용기가 샘솟는 느낌이었다. 이런 자질구레한 대화에 용기까지 부여해야 하나.
나는 못 본 척하고 팔을 걷었다.
"이거 껴."
서랍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고무장갑을 꺼냈다. 비닐을 바스락거리며 민트색 고무장갑을 쏙 빼내며 나에게 건넸다. 이 집은 고무장갑마저 근사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다 좋고 비싸 보였다.
쓰레기통 앞으로 가 페달을 밟고 뚜껑을 열어 비닐을 넣는 그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 집 주인이 김유현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당연하게 서랍을 열어 고무장갑을 꺼내고 비닐을 뜯었다. 쓰레기를 버리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줄곧 혼자 심심했는데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작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전기에 오른 것처럼 손가락 끄트머리가 찌릿찌릿했다.
“하고 싶다고 하니까 같이 하기는 하는데, 뭔가 미안한데.”
“왜요?”
“그러게, 왜 그런 마음이 들까.”
소매를 걷고 물을 틀어 온도를 맞추는 김유현을 관찰했다. 이런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고운 손이었다. 하긴 이런 집에 살면서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일이 지겨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나와는 다를 것이다.
팔꿈치 근처에서 부드럽게 주름진 니트 소매로 살며시 보이는 셔츠가 빳빳하다 못해 바삭해 보였다. 만지면 퍼석퍼석할 것 같다. 그는 철저히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 것 같은 괴리감 같은 것이 거기에서 전해졌다.
내가 대학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로 스치지도 않았을 관계였다. 아니 설령 같은 학교였더라도 동아리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살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세계에서 나는 나대로.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심지어 그가 생활하는 집에 와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당연한 일을 끄집어내며 생각하기 바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우리는 함께 시간을 공유하며 똑같은 일을 했다. 갑자기 동아리에 들어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까지 근사해지는 기분이었다. 대단하다 할 정도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더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곁에서 함께 무언가를 하게 되면 황홀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라니.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쭉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비장한 자세로 고무장갑을 끼며 수세미에 물비누를 묻혔다.
"집이 되게 세련되고 근사해요."
웃으며 내 말을 되물었다.
“근사해?”
나는 한 번 더 강조하며 눈을 맞추고 말했다.
“네, 근사해요. 무지.”
“그럼 뭐해. 이거 전세야. 심지어 계약자는 우리 아버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김유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까만 머리카락과 뽀얀 피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움직이는 속눈썹이 말갛고 싱그러워 보였다. 빨간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인다.
“이런 게 근사해서 무슨 소용이야. 사람이 근사해야지, 사람이."
"당연히 선배님이 더 근사하죠. 비교할 바가 아니잖아요."
앞을 보며 그릇을 씻던 김유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얼굴로 피가 몰렸다. 해맑게 웃던 김유현은 표정 없는 내 얼굴을 마주하고 똑같은 표정을 하더니 다시 피식 웃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내가 한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진심이 묻어난 말이기에 더 그랬다. 잠시 말이 없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너는 말을 참 예쁘게 해. 목소리가 예뻐서 그런가?"
"제가요?"
나는 지금 쓸데없이 목소리 톤이 높았다. 내가 무슨 말을 주절거리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꾸 이상한 말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아마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컵에 거품을 묻히다가 미끄러져 개수대에 통하고 떨어져 나는 얼른 다시 주워 닦아 그에게 건넸다.
"그런 단어 쓰는 애는 처음 보는 것 같아."
나는 다른 접시에 거품을 묻히며 옆에 있는 김유현의 얼굴을 쳐다봤다. 얼마나 설거지를 열심히 하는지 접시를 건네주면서도 빤히 보는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열심히 접시에 묻은 거품을 헹궈내기만 한다.
“좋다.”
쏴아아 떨어지는 물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내가 건넨 거품 묻은 컵을 흐르는 물소리에 맞춰 구석구석 야무지게 닦으며 김유현이 말했다.
"근사하다는 말. 듣기 좋은 말이야."
“야!”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어깨가 들썩일 정도였다.
우린 동시에 뒤를 돌아봤고 유쾌하게 웃으며 서 있는 2학년 오현석이 보였다.
"콩쥐 났네. 그것도 둘씩이나."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뒤돌아 그릇들을 마저 정리했다.
"지금이 설거지할 때냐? 빨리 가서 게임하자. 그런 건 게임해서 지는 놈들이 해야지. 야! 너 회색 후드!"
"네, 네?"
"너 빨리 와. 여자 모자라. 여자 없으면 게임을 할 맛이 안 나."
“네, 잠시만요.”
갑자기 김유현의 손이 멈췄다. 거품 묻은 접시를 건네는 내 손도 덩달아 허공에 멈춰있다. 아무래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여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냥 흐르는 물에 헹궜다. 손을 뻗어 접시를 두려는 모습이 불편해 보이긴 했는지 이내 다시 접시를 가져가 한번 헹구더니 아까처럼 다시 손을 바삐 움직인다. 아무리 봐도 야무진 손놀림이었다.
"우리 지금 편의점 갈 거야."
"편의점? 왜?"
"소영이 머리 아프대."
"소영이?"
김유현은 어깻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가슴 속에 솜사탕 같은 뭉치가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아픈 애한테 왜 일을 시켜. 팥쥐 새끼야.”
오현석이 한 발짝 걸음을 옮겨 내 앞으로 오는데 그 발걸음이 쿵쾅쿵쾅 공룡의 발걸음처럼 느껴졌다. 아까부터 대화는 김유현이랑 하면서 시선은 나에게 고정한 채 계속 물었다. 김유현도 나를 보며 대답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려있다는 사실이 괜히 민망했다. 행주로 싱크대를 벅벅 닦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려고.”
"집에 타이레놀도 없어? 근데 술 먹고 약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오현석은 내게 가까이 와서 이마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오현석을 봤고 오현석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손을 뗐다. 내게 좀 거리를 두고서 뒤로 멀어졌다.
“열이 좀 있는 것 같긴 하네.”
싱크대에 돌아다니는 투명한 비닐을 가져와 개수대에서 음식물 쓰레기 물기를 쪽 짜서 담아내 매듭을 짓고 묶었다. 그런 나를 보고 김유현은 약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건 안 해도 되는데.”
이런 내가 너무 억세 보였을까 싶어 아차 싶었다. 한순간 조용해졌다. 대화는 두 사람이 하면서 시선은 모두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몹시 어색해 왼쪽 어깨를 올렸다가 내리고 오른쪽 어깨도 올렸다가 내리는 이상한 짓을 했다. 나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뼈가 으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오현석이 다시 내 앞에 섰고 나는 멋쩍게 그를 올려 봤다. 눈이 마주쳤는데 미동도 없었다. 깜빡거리지도 않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편의점 간다는 말 뻥인 거 다 알고 있다고 진실을 말하라는 듯이.
나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긴장이 됐다. 갑자기 입이 바짝 말라 혀로 입술을 축였다. 아직도 오현석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또 어색하게 웃으며 눈알을 굴린다.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인지,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로 김유현을 봤다. 오현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가자. 나 담배 사야 돼.”
“꺼져.”
김유현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나긋나긋하던 김유현과 연결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신선했다. 남자들의 대화는 이런 건가.
“왜.”
“랜덤으로 사 온다? 아무거나 집어 올 거야.”
“오, 사다 주는 거?”
나는 편의점에 갈 생각도 없고 아프지도 않았다. 어영부영 어쩌다 보니 편의점에 오게 됐고 아픈 환자가 되었다. 왜 김유현이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김유현을 보며 내가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근데 편의점은 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냥.”
김유현은 짧고 굵게 답했다. 대답이 부족했는지 덧붙여 말했다.
“너 많이 취했으니까 바깥바람 쐬면 좋잖아.”
“저 안 취했는데요?”
“원래 취한 사람은 취했다고 안 해.”
배려처럼 들렸다. 원래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니 후배에게 그 정도 아량을 베푸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니었지만 잠시 바람을 쐬고 오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순순히 뒤를 따랐다.
딱히 살 게 없는 난 김유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불쑥 김유현의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나는 순간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렸다. 투박한 손길이 썩 싫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타이레놀이나 하나 사가자.”
“저 머리 안 아파요.”
“알아. 너 주려고 사는 거 아냐.”
결국, 타이레놀과 숙취 해소 음료수 두 개와 담배 한 갑을 샀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더 사야 하는 건 아닌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편의점은 뭐든지 다 비쌌다. 준다는 소리도 안 했는데 나는 당연히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몰래 먹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계산하는 동안 내게 물었다.
"어디 살아?"
"미나리 슈퍼 뒤요."
"슈퍼? 후문 뒤에 말하는 건가?"
“네, 거기 근처에요.”
아파트 앞 간이 의자에 잠시 앉았다. 나는 양손을 모아 무릎에 가져다 대고 발끝을 모아 앉았다. 뭔가 지루해 손가락으로 무릎에다가 소리 없는 피아노를 쳤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김유현이 음료수 뚜껑을 따서 내게 건네줬다. 쓰라린 소리가 났다. 나는 양손으로 받아 쥐었다.
“담배 펴?”
“아뇨.”
“그럼 담배 냄새 싫지?”
“괜찮아요.”
김유현은 옆에 있는 의자로 가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담배를 태웠다. 의자 위로 올라가 등받이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그 모습이 이 밤과 불어오는 바람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무슨 고민 있어?”
“저요?”
김유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담배 연기에 휩싸인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아뇨.”
“왜 없어?”
“있어야 해요?”
나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내 대답에 그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는다. 김유현과 눈을 맞추기 위해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올려다봐야 했다.
바닥을 보고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도리어 그쪽이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까처럼 밝고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상체를 조금 숙였다. 무릎에 오른손 팔꿈치를 갖다 댔다. 검지와 중지로 담배를 쥐어 엄지손가락으로 담배를 돌렸다. 그러니 담배 개비가 휙휙 돌아가고 연기도 그에 맞춰 빙빙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볼펜도 아니고 담배 개비를 휙휙 돌리는 그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하지 못 하는 일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그 손가락의 형태가 발레리나의 손 모양 같다고 생각했다. 내 손등에 있는 뼈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굵었다. 손바닥과 손가락을 이어주는 동그란 뼈는 분홍색이었고 손등은 하얗고 뽀얬다. 뼈 마디마디가 춤추고 있는 듯했다.
“친하게 지내자.”
“네?”
의외의 말이었다. 또한,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김유현한테!
내가 볼 수 있는 그의 얼굴은 옆모습이었다. 담배를 톡하고 튕겨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일어나 담배를 발로 비볐다. 건방진 자세였다. 멋있고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일을 말끔히 끝마쳤다는 듯이 양손을 바지에 툭툭 털어 내듯 닦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약간 고개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 행동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친하게 지내자고요.”
갑자기 들린 존댓말이 낯설고 이상했지만 싫지 않았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지만 가까워지는 말이기도 했다. 김유현이 내 옆으로 바짝 서자 알싸한 담배 냄새와 은은한 남자 향수 냄새가 뒤섞여 차가운 바람을 타고 왔다.
좋았다. 나는 그게 약간 나무가 타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공기와 잘 어울리는 따뜻한 향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티브이 속 드라마 엔딩 크레디트였다. 11시쯤 되었나 보다. 몇몇이 현관으로 걸어온다. 정리하고 가는 분위기였다. 아직 모여 싱글벙글 이야기 중인 사람들을 지나 나는 거실 한구석 바닥에 뭉개져 있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려 했다.
오현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웃는 얼굴로 오더니 외면하는 김유현을 보고 정색을 하며 묻는다.
“뭐야, 담배 사 온다며.”
“끊어, 새끼야.”
“야!”
"소영아, 아프다며, 괜찮아?"
동아리에서 제일 친한 세미 언니가 와서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빨간 볼과 귀여운 말투에 술기운이 묻어있었다.
“아니, 아프긴.”
“진짜야?”
“응.”
“그럼 우리 조금만 앉았다 가자.”
나는 언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 귀찮아. 집에 언제 가지?”
세미 언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썹이 휘어져라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집에 가기 싫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서 있던 김유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자꾸만 눈길이 간다. 시선의 끝을 의식하다 보면 항상 거기엔 김유현이 머무르고 있었다. 훔쳐보는 느낌이 짙다. 쳐다보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누군가를 빤히 주시한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데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양 힐끔힐끔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