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니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걸 보고 고백할 줄 알았어.'
영희는 잠시 생각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유학 떠나면......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텐데...... 그래도 괜찮겠니?"
철수가 듣기에 영희의 말은 고백을 받아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철수는 말 할 수 없이 기뻤지만, 애써 기쁨을 자재하며 말했다.
"상관없어. 난, 잠시라도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거야. 상관없어. 정말......"
영희는 말하기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럼, 생각해 볼게."
철수는 영희가 고백을 받아주었다는 확신이 들자 기분이 좋아 하늘을 날아갈듯 했다.
"우리 영화 볼래?"
"좋아."
영희와 철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철수가 오늘따라 더 이상 잘생겨 보일 수가 없네.'
'영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여신님이야.'
그들은 서로를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철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영희와 함께 보낸 오늘의 크리스마스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했던 영희와 저녁을 함께 보냈고, 영희가 아끼는 초미니 피아노를 선물로 받았다.
영희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영희가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걸 보면 사귈 마음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철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아. 영희와 함께 크리스마스 저녁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그리고, 영희가 이제 내 여자친구가 되겠네! 아싸!'
"왜 이제 왔니?"
"친구랑 저녁 먹었어요."
"너 집에서 저녁 먹었잖아!"
"크리스마스라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먹었어요."
철수는 어머니가 더 묻기 전에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하늘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진 철수는 초미니 피아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스위치를 켜니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영희가 준 선물이라서 그런지 말할 수 없이 감미롭게 들려왔다.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침대에 누운 철수는 피아노 소나타를 듣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철수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기지개를 켜던 철수는 초미니 피아노가 시야에 들어오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미니 피아노에서 음악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런! 고장난 걸까?'
철수는 영희가 준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루만에 고장냈다는 자책감에 울적해졌다.
'영희가 알면 어쩌지? 영희한테는 비밀로 해야 되겠구나.'
울적해진 철수는 영희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바보! 지금은 선물이 문제가 아니잖아. 내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영희가 아직 확실히 말하진 않았지만 조만간 말해줄 거야.'
이날따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영희는 책상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영희가 철수에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것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고백을 받아주고 싶지만, 철수에게 상처될 일을 할 수 없었다.
'정말 괜찮을까? 내가 유학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사귀다가 헤어지면 철수가 상처받지 않을까?'
한참 고민하던 영희는 문득 결심이 들었다.
'일단 지르고 골치 아픈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이제 겨우 열여덟인 자신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철수와 사귈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그냥 그때 좋다고 할 걸그랬어. 이제 어쩌지? 생각해 보고 말해주겠다 했으니까 나중에 말해주면 되겠지. 영화에도 생각해본다고 뜸들인 후 받아주는 경우가 많던데, 뭐.'
영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화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철수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철수는 애타는 마음으로 영희의 전화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지만, 며칠이 지나도 영희로부터의 전화는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해야 되나? 영희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전화해주겠지, 뭐.'
이런저런 생각에 철수는 며칠동안 공부가 안 되었다.
며칠이 더 지나 일년의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영희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철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전화하자. 올해가 가기 전에 끝을 봐야지.'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희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영희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잘 지냈니?"
"응, 덕분에 잘 지냈어."
"그동안 공부 열심히 했니?"
"응. 예비 고삼이 공부 밖에 할게 없잖아."
철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영희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잘했어. 우리 열시에 그 커피숍에서 만나. 혹시 사정이 생기면 못나갈 수도 있으니 십분만 기다려줘. 그때까지 못가면 못가는 걸로 알고. 그때까지 공부 열심히 해야돼. 알았지?"
영희는 마치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철수는 기분이 좋았다.
"알았어. 삼십분까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나와."
"안 돼, 니가 많이 기다리면 부담스럽잖아. 좋아. 그럼, 십오분만 기다려."
"알았어."
"잘 있어."
"이따 보자."
철수는 그동안 전화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진작 전화할 걸 그랬네.'
영희를 만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붕떠 잡다한 잡념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확실히 말해주겠지. 그래, 우리 만나자. 이렇게 말해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공부 열심히 해야된다는 영희의 말이 떠올라 철수는 교과서를 펴고 읽기 시작했다.
철수는 영희와의 약속을 지켜야된다는 생각에 집중하자 오히려 평소보다 공부가 잘 되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성적이 나빠지면 영희가 부담스러워할지 몰라.'
저녁 9시 반이 되자 공부를 끝낸 철수는 교과서를 덮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 영희가 아무 말도 안 해주면 어쩌지?'
10시 15분 전이 되자 철수는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9시 50분.
커피숍에 도착한 철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다렸다.
정확히 10시가 되자 영희가 다른 여학생과 함께 들어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영희의 단짝 친구라고 알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영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철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영희는 그 여학생과 함께 철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철수야, 얘는 내 단짝 소영이야. 소영이 아니?"
철수는 소영이의 이름을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
"당연하지. 소영아.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음료수 주문해 가져올게."
소영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난 가야돼. 만약 영희에게 연락되지 않으면 나한테 해. 그럼, 난 간다."
소영이는 영희에게 잘 해보라는 듯 눈짓하고서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나갔다.
소영이가 커피숍에서 나가자 철수가 물었다.
"소영이는...... 왜 간거야?"
철수가 묻고 싶은 말은 소영이가 왜 온 것이냐였다.
영희는 철수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미소지었다.
"혹시, 나한테 연락이 안 되면...... 소영이한테 연락하라고. 소영이는 삐삐가 있어. 여기 소영이 삐삐 번호."
영희는 소영이 삐삐 번호가 적힌 종이 쪽지를 건네주었다.
철수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영희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줄 생각이라는 것을.
영희가 말했다.
"나, 곧 들어가야되. 십분 밖에 못 있어. 공부는 열심히 했니?"
"당연하지. 여기 올때까지 열심히 했어."
영희는 새끼손까락을 내밀었다.
"좋아, 약속해. 앞으로 성적 떨어지면, 오를 때까지 우리 만나지 않는 거야."
철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영희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철수는 찡하는 전율을 느꼈다.
'새끼손가락만 맞닿아도 전율이 느껴지네.'
철수는 영희의 예쁜 손을 잡아보고 싶었지만, 애써 자제했다.
영희는 왠지 쑥스러워 새끼손가락을 빼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 되겠다. 할 말 더 없지?"
"근데...... 있잖아......"
"응?"
철수는 영희가 확실한 답을 주기를 바랐다.
'우리 만나는 거 맞지?'
물어보려다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간신히 참았다.
"언제 다시 볼 수 있니?"
"글쎄......"
"설 연휴에 어디 가니?"
"아니."
"그럼, 그때 보자."
"좋아."
"아직 언제 시간이 날지 몰라. 시간나면 연락할게. 잘 있어."
영희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유유히 걸어나갔다.
영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허전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영희가 이제 자신의 여자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철수는 기뻐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철수는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마음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제 영희가 내 여자친구다! 만세!'
새해는 철수에게 그 어떤 해보다 특별하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 영희와 함께 시작한 새해가 아닌가!
일년의 마지막 날인 어제, 영희는 철수의 고백을 받아준 셈이었다.
철수는 태어나서 이토록 행복한 새해를 맞은 적이 없었다.
너무 행복해 마음이 들떠 자다가도 일어나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새해 첫날 아침, 철수는 일찍 일어나 교과서를 펼쳤다.
철수의 어머니는 이러한 철수가 기특해 토마토 쥬스를 갈아주었다.
철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벌컥 마셨다.
철수가 연신 싱글벙글하자 어머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아뇨. 고삼이 뭔 좋은 일이 있겠어요."
철수는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예비 고3이 여자친구를 사귄다고 말하면 혼날 것이 틀림없으니까.
어머니는 마치 철수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명심해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아무리 예쁜 여자친구 생겨도 대학 떨어지면 아무 소용 없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책상 위에 있는 초미니 피아노가 어머니의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의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이거 뭐니?"
"선물 받은거예요."
"누구한테?"
"영희요. 아시지요?"
"아, 영희? 초등학교 때 니 짝이었던 예쁘장한 애 말이냐?"
"네."
어머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철수를 바라보았다.
"니들 사귀니?"
철수는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아뇨. 그냥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머니는 이미 모든 정황을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이 사귀니까 이런 걸 선물받았겠지. 두고 보자. 성적만 떨어져봐라.'
철수가 며칠 전부터 열심히 공부하니, 일단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여자친구 생겨도 대학 떨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철수는 어머니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아 다음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하면서도 영희의 연락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철수는 벨소리만 울리면 재빨리 전화를 받았지만, 설연휴가 끝날 때까지 영희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다.
설연휴 마지막 날, 철수는 전화할까 말까 망설였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전화할까?'
그러고 보니 영희가 철수한테 전화한 것은 지난 크리스마스가 처음이었다.
영희는 예전에도 '나중에 연락할게'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연락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철수는 마침내 전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