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음식이 오자 영희는 입맛이 없는 듯 말했다.
"난 별로 배 안고프니까, 많이 먹어."
"잘 먹을게."
"나, 사실 요리 잘 하는데. 우리가 예비 고삼이 아니라면 지금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고 있을 텐데."
영희는 철수와 생일 파티를 하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괜찮아. 대한민국 예비 고삼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순간 영희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더 잘 된 거 잖아! 생일에 누구 한 사람과 함께 있었던 적은 오늘이 처음인데, 그것도 철수랑 단 둘이 함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철수는 어머니가 준 점심값으로 영희의 선물을 사느라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몹시 고파 맛있게 먹었다.
영희는 철수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철수는 먹다가 영희가 별로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안 먹니?"
"난 점심을 뷔페를 먹어서. 별로 배가 안 고파."
영희가 점심에 부모님과 뷔페를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배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음식이 모자랄 것 같아 조금 먹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음식은 영희의 주머니를 순식간에 거덜낼 정도로 비쌌다.
지금 영희의 지갑엔 돈이 얼마 남지 않아 음식을 더 주문하기는 커녕 케이크 살 돈도 모자랐다.
영희는 철수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음식을 조금만 먹었다.
철수는 정말 영희가 배고프지 않은 줄 알고 실컷 먹었지만, 사실 영희는 배가 고팠다.
'그나저나 케이크 살 돈이 모자라 어쩌지? 조각 케이크를 살 수 밖에 없지, 뭐.'
이때였다.
"영희야!"
소영이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영희는 소영이의 손에 들린 케이크를 보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소영이가 케이크 사왔다! 만세!'
소영이는 이미 도착해 있었지만, 이제서야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영희와 철수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영희야, 케이크 내 생일 선물이야."
영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소영이를 덥석 껴안았다.
"소영아, 정말 고마워."
"뭘, 우리 사이에......"
소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영희 얘가 케이크 살 돈이 없었나 보구나!'
소영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철수가 생일 축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소영이가 끼어들었다.
"영희는 유학가니까 영어로 불러야지.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사랑하는 영희의,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생일 축가가 끝나자 소영이가 말했다.
"자, 소원 빌어."
영희는 행복한 얼굴로 초를 집어 들었다.
"내 소원은, 첫째, 우리 셋 모두 원하는 곳에 입학하는 것. 둘째, 내가 떠나있는 동안에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
영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철수를 바라보며 세번째 소원을 빌었다.
"셋째, 내가 한국을 떠나도 철수가 울지 않고 멋진 남자가 되는 것."
영희는 마지막 소원을 빈 후 소영이와 함께 웃었다.
"호호호......"
철수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니가 떠나면 슬프긴 하겠지만, 울지는 않을 테니 걱정마."
영희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소영이를 쳐다보았다.
철수와 눈이 마주 치기가 부끄러웠다.
영희는 케이크를 자른 후 소영에게 눈짓했다.
영희가 소영이를 보니 저녁을 먹지 않은 것 같아 케이크라도 많이 먹으라는 뜻이었다.
'소영이 니가 가져온 케이크니까 다 먹어도 돼.'
실제로 저녁을 먹지 않아 배고픈 소영은 눈치없이 케이크를 혼자 거의 다 먹고 말았다.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생일이야!'
영희는 배는 고팠지만, 철수와 함께 보낸 오늘의 생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영희와 철수에게 특별했던 겨울방학이 끝나고 발렌타인데이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영희는 철수를 언제 만날지 고민했다.
'언제 만나는 게 좋을까? 발렌타인데이 당일에 만났다가 소문나면 큰일인데...... 그래, 내일 만나자!'
영희가 작정하는 순간,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철수겠지!'
재빨리 전화를 받은 영희는 '철수야?'하려다 혹시 하는 생각에 참았다.
"여보세요?"
"너 영희지?"
'철수야?'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넌 누군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학생의 전화였다.
"영희야, 난 권상태라고 너하고 같은 고등학교 다니는데, 등하교 시간에 자주 마주쳐 얼굴을 보면 알거야. 예전부터 내가 널 좋아했거든. 발렌타인데이에 고백하고 싶어 그러는데, 내일 학교 끝나고 만날래?"
'나더러 만나자고? 별 인간이 다 있네.'
영희는 기가 막혔지만, 예의상 쌀쌀맞게 한마디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나, 지금 바쁘거든. 끊을게."
영희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만나자고?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아나......"
마음을 가라앉힌 영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했다.
'내가 걸까? 그래, 그냥 걸자.'
전화벨이 울리자 철수는 재빨리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잘 지냈니?"
역시 영희의 목소리였다.
"응, 너도 잘 지냈지?"
"응, 덕분에 잘 지냈어. 지금 뭐해?"
"공부하고 있었어."
영희는 철수의 공부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공부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긴, 실은 쉬고 있었어.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럼, 다행이고. 근데, 내일 만날 수 있니? 저녁 일곱시에 그때 그 레스토랑에서......"
"일곱시, 좋아."
"그럼, 내일 보자. 잘 있어. 공부 열심히 하구!"
다음날 저녁 6시 30분.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영희가 현대백화점 정문으로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희야!"
영희는 철수를 보자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왜, 벌써 왔니? 난, 백화점에 볼 일이 있는데......"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니?"
"안 될 건 없지만...... 좋아. 근데,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게."
"천천히 와도 상관없어."
초콜릿을 사서 돌아온 영희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레스토랑으로 가자."
철수와 영희는 지난 번에 영희의 생일에 갔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종업원이 영희와 철수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영희는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뭐 먹을까?"
"글쎄, 난 이런데 잘 안 와봐서 모르겠어. 니가 알아서 시켜."
"알았어."
영희는 음식을 주문한 후 말했다.
"나, 잠시 손 좀 씻고 올게."
"그래."
화장실에 들어간 영희는 손가방에서 루즈를 꺼내 입술에 발랐다.
영희는 철수에게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오늘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어.'
이런 마음에 영희는 거울을 보며 간단히 화장한 후 돌아왔다.
철수는 영희가 입술에 루즈를 바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오! 루즈를 바르니까 완전 예쁘다!'
루즈를 바른 영희의 붉은 입술을 보자 철수는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언젠가는 영희의 예쁜 입술에 키스할 날이 오겠지?'
철수가 엉뚱한 생각을 해서인지 둘 사이에 미묘하게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영희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덕분에 잘 지냈어. 너도 잘 지냈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영희와 철수가 어영부영 한마디씩 주고 받았다.
"응, 나도 덕분에 잘 지냈어."
입술에 루즈를 바른 영희는 오늘따라 성숙해 보여 철수가 한마디 했다.
"오늘 따라, 니가 누나같은 느낌이 들어. 한살 더 먹어서 그런가?"
영희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래 봤자, 니가 나보다 여섯 달이나 오빠인걸."
"그런가? 암튼, 오늘 따라 엄청 예뻐보이네. 전에도 엄청 예뻤지만......"
오늘 따라 엄청 예뻐보인다는 말에 영희는 하늘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정말?"
"응, 무지무지 예뻐."
영희는 수줍은 듯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철수는 불쑥 영희에게 물었다.
"근데, 너, 화장했니?"
할 말이 없어 물은 것이다.
"조금, 했어."
영희는 철수에게 화장한 것이 들키자 부끄러워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침묵했다.
이때 여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다.
영희는 음식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기 전에 먹자."
철수는 오늘은 일부러 천천히 먹었다.
영희가 지난 생일에 소영이가 조금 남긴 케이크를 먹는 걸 보고 일부러 덜 먹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이다.
영희가 철수에게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니?"
"아니, 실은 아까 빵을 먹어서...... 많이 못 먹을 거 같아. 너라도 많이 먹어."
"난, 다이어트 중이라...... 니가 많이 먹어. 남자들은 원래 식성이 좋잖아."
"다이어트? 그건 뭣하러해? 지금도 완벽한데, 넌 완벽한 절세미녀잖아."
영희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완벽한 절세미녀라는 말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진 영희가 잠시 머뭇거린 후 말을 이었다.
"근데,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우리 만나는 거......."
철수는 몹시 긴장한 채 영희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개학했으니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기를!'
영희가 말을 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좋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는 시험 날에는 내가 늦게 들어가도 뭐라 말씀하시지 않거든. 어때?"
철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생각이야. 그래, 자주 만나는 건 수능 끝나고 하고...... 지금은 그게 좋겠다."
영희와 철수는 식사를 하며 방학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영희는 철수가 많이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금만 먹은 후 수저를 내려놓았다.
철수가 물었다.
"왜 그거 밖에 안 먹어?"
"말했잖아. 다이어트 중이라고."
"뭣하러? 완벽한데. 니가 내 미의 화신이잖아. 완벽한 미의 화신."
영희는 부끄러워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완벽하긴, 난 완벽하곤 거리가 있는데, 아무튼 좋게 봐줘서 정말 고마워."
"고맙긴, 내가 고마워해야지. 미의 화신인 니가 내 여자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영희의 두뺨이 붉게 물들었다.
영희는 철수에게 '너야말로 완벽한 내 남자친구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영희는 갑자기 철수의 꿈이 무언지 궁금해졌다.
"넌 꿈이 뭐니?"
"변호사."
"어째서?"
철수는 말하기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변호사는 되야...... 너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느닷없는 결혼이라는 말에 영희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빨게졌다.
"철수야, 난...... 미국에 유학가면, 언제 돌아올지 몰라."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올 거 아니야. 내가 기다리면 안 되겠니?"
영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영희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철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아무튼 변호사가 되고 싶은 건 사실이야."
영희는 문득 철수가 일등 신랑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유학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너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볼게.'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 분위기가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꿀 방법이 없을까? 아, 있다!'
영희는 손가방에서 초콜렛과 카드를 꺼내 철수에게 주었다.
철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곧바로 카드를 펼쳤다.
'철수야, 무슨 일을 하던 뜻대로 되길 바래. 너를 사랑하는 영희가.'
'사랑'이란 단어를 본 철수는 입이 찢어질듯 미소를 지으며 영희를 바라보았다.
"정말 고마워, 카드"
"고맙긴......"
영희가 카드에 '너를 사랑하는 영희가'라고 쓴 것은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다.
영희는 혹시라도 철수에게 상처를 줄까봐 '사랑'이란 단어를 쓰기가 망설여졌지만, 어쩌면 철수와 함께 하는 마지막 발렌타인데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쓴 것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철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