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가 영희를 뒤따라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희성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이, 철수! 오랜만이야!"
희성은 초등학교 졸업 후 5년 만에 철수를 만난 것이 반가운 듯 큰소리로 인사하며 반겼다.
철수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인사하며 반겼다.
"희성, 그래, 오랜만이야."
희성은 혜정과 함께 철수의 테이블로 와서 하이파이브를 건네며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지?"
"당연히 잘 지내지. 반갑다. 근데, 가봐야 할 때가 있어서.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수능 끝나고 한번 보자. "
"어, 수능 끝나고 보자."
철수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희성이 혜정을 가리켰다.
"내 여동생 혜정이 알지?"
5년 만에 보는 혜정은 철수가 속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예쁘고 성숙해져 있었다.
'와, 혜정이가 못 보던 사이에 엄청 성숙하고 예뻐졌네.'
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혜정에게 인사했다.
"알지. 혜정아, 오랜만이다. "
"철수 오빠, 오랜만이예요. 혹시 여기 여자친구와 왔어요?"
혜정이 마치 영희를 본 것처럼 묻자 철수는 속으론 뜨끔했지만, 아닌 척 말했다.
"아니, 나 혼자 왔어. "
철수는 혜정이 더 묻기 전에 재빨리 희성에게 말했다.
"희성아, 수능 끝나고 연락할게."
"그때 혜정이 데려가도 되지?"
"마음대로. 희성아, 혜정아, 안녕."
철수가 서둘러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희가 대뜸 물었다.
"희성이랑 무슨 말 했어? 희성이가 나 못 본 거 같니?"
희성이 철수와 이야기하는 걸 본 모양이었다.
철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희성이 넌 못 본 거 같으니, 걱정하지마."
영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철수는 영희한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근데, 혜정이는 널 본 것 같은데, 희성이한테 말하지 않을까 모르겠네. 말해도 소문만 안 나면 그만 이지 뭐.'
혜정이 영희를 본 것 같았지만, 영희가 걱정할 것 같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철수가 멀리 떨어져 있는 커피숍을 가리켰다.
"우리 저쪽으로 가서 커피 마실래?"
"그래."
영희와 철수는 레스토랑에서 멀리 떨어진 커피숍으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근데, 희성이 오늘 같은 날 레스토랑엔 왜 왔을까? 그것도 여동생하고."
철수가 묻자 영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화이트데이에 사탕 하나 못 받은 여동생을 위로해 주기 위해 데려왔겠지."
영희의 말을 듣고서야 철수는 사탕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참! 사탕을 깜빡했구나!'
철수가 자신도 모르게 뭔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짓자 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야 나한테 사탕 안 준 거 기억난 모양인데, 오년 동안이나 받았으니 안 받아도 돼.'
영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왕이면 사탕을 받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일 철수가 나한테 사탕주려고 우리 반으로 찾아올까? 찾아오면 소문나서 안 되는데...... 그건 나중 문제고, 희성이를 보니 마음이 심란한데, 그만 가봐야겠어.'
영희는 갈 시간이 된 것처럼 손목시계를 쳐다보더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철수야, 난 이만 가봐야 할 시간이 됐어. 잘 있어."
영희가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커피숍 밖으로 나가버리자 철수는 생각했다.
'희성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영희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내일 영희한테 사탕주면서 저녁 때 잠깐만 보자 말해볼까?'
철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커피숍을 나섰다.
오늘이 바로 3월 14일 화이트데이.
매점에서 사탕을 산 철수는 화이트데이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철수는 지난 5년 동안 매년 화이트데이마다 영희에게 사탕과 카드를 주었다.
철수가 처음으로 화이트데이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철수의 반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에게 내일이 화이트데이라고 알려주면서 은근히 사탕을 기대했었다.
"너희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니?"
"무슨 날인데?"
"화이트데이야."
"화이트데이가 뭔데?"
"그것도 몰라? 발렌타인데이는 아니?"
"발렌타인데이는 알지. 이월 십사일이던가?"
"맞아. 발렌타인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고,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날이야. 여자는 이런 날에 고백받으면 엄청 감동먹게 되지."
철수는 화이트데이가 어떤 날인지 알게 되자 영희가 생각났다.
'나도 영희한테 사탕사줘야지. 사탕줄 때 카드에 멋진 글을 써 함께 주면 영희가 감동먹을지도 모르지.'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 철수는 영희에게 줄 카드에 정성스러운 글씨로 쓰기 시작했다.
-나의 천사 영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천사처럼 착한 영희야.
너를 매일 학교에서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앞으로 3년동안 너와 예전보다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
네가 외롭거나 친구가 필요하면 항상 친구가 되어줄게.
난 너의 영원한 친구가 되고 싶어.
너의 영원한 친구 철수가-
다음날 화이트데이에 철수는 영희의 반을 찾아가 영희에게 사탕을 주었다.
영희는 사탕을 받자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날 영희가 받은 사탕은 철수가 준 것이 유일했다.
그날 뿐 아니라 영희가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희는 그때 함박 미소를 지었다.
"철수야, 고마워. 잘 먹을게."
알게 된지 보름도 안되는 영희의 반 여학생들은 영희에게 사탕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영희는 기쁜 마음으로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그날 철수는 수업이 끝난 후 영희에게 카드를 주기 위해 기다렸다.
영희는 철수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철수야, 오늘 정말 고마웠어. 그동안 같은 반 애들이랑 친할 기회가 없었는데, 니 사탕 나눠 먹으면서 많이 친해졌어."
"뭘, 그런 걸 가지고......"
영희는 어쩐지 쑥스러워 자리를 피하고 싶어져 손인사를 했다.
"나 피아노 학원에 가봐야 하거든. 나중에 보자."
"잠깐만...... 이거......"
철수는 수줍은 얼굴로 영희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고마워. 잘있어."
영희는 더욱 쑥스러워져 철수가 주는 카드를 얼른 받아 가방에 넣은 후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나서 가버렸다.
철수는 영희가 자신의 카드를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영희가 카드를 받자마자 떠나 알 길이 없었다.
그후에도 영희는 철수를 봐도 카드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철수는 영희에게 영원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로 우회적으로 고백했지만, 영희는 침묵으로 철수의 고백을 거절했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영희는 철수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영희는 내년에 유학을 떠나면 5년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다.
영희가 돌아올 때 쯤이면 자신은 군대에 갈 시간이 되니, 철수는 무엇인가 자신과 영희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영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매점에서 사탕 한 봉지를 산 철수는 곧바로 영희의 교실에 갔다.
"영희야!"
철수는 영희의 교실로 가다가 복도에서 운동장을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희를 보았다.
'어머, 내가 어제 철수한테 사탕주러 오지 말라 전화한다는 걸 깜빡 했구나!'
영희는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해 철수와 거리를 둔 채 물었다.
"여긴 웬일이야?"
"너에게 주려고......"
철수는 사탕 한 봉지를 들어 영희에게 보여 주었다.
영희는 살짝 미소를 띠운 후에 철수가 주는 사탕을 받았다.
"고마워, 철수야. 잘 먹을게."
철수의 사탕을 받자 영희도 문득 5년 전의 화이트데이의 추억이 떠올랐지만, 친구들의 시선이 의식된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철수는 영희가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해 그러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교실로 돌아온 철수는 복도에서 운동장을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영희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마 일년 후에 한국을 떠날 것을 떠올려 그런 것일 거야. 영희야, 앞으로 내가 너한테 더 잘해줄게......'
철수는 수업이 끝나자 교문 앞에서 영희를 기다렸다.
영희는 철수를 보고도 못본 척하고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영희의 태도에 당황한 철수가 영희에게 말을 걸었다.
"영희야, 화났니?"
그제서야 영희는 철수를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따 전화할게."
그리고 나서 영희는 교문을 나섰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철수는 공부를 하면서 영희의 전화를 기다렸다.
저녁 9시가 될 때까지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지만,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철수는 영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영희는 다소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오늘 왜 그랬니? 친구들이 내가 너랑 친하냐 물어서, 내가 좀 당황했어."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화났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지금 볼 수 있니?"
"어디서?"
"우리 집 근처 편의점에서......"
철수는 화이트데이에 영희를 만난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어 쏜살같이 달려갔다.
영희는 이미 편의점에 기다리고 있었다.
"철수야, 내가 마실 거 사줄게. 뭐 마실래?"
"네 것하고 같은 걸로."
영희는 냉장고에서 쥬스 두 병을 꺼내 계산한 후에 철수에게 주면서 속삭였다.
"나, 어머니께 영자 신문 사오겠다고 하고 잠시 나왔어. 금방 들어가야돼."
"아......"
영희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나, 아까...... 사실은 좀 당황했어. 앞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최소한 수능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가 사귀는 걸 비밀로 해야되. 그때까지는 우리 만나는 거 비밀이야. 알겠지?"
철수는 영희가 화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 알았어. 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걱정마."
영희도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 영화에 나오는 말 같네."
'철수야, 우리가 만나는 거 언젠가는 당당하게 밝힐 거야. 하지만, 소문 나서 니 부모님이 아시면 날 못 만나게 할 수도 있으니, 니가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만 참아줘.'
영희는 철수에게 만나는 걸 비밀로 해달라 말한 것이 미안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 이제 그만 가볼게. 시험 끝나고 보자."
"영자 신문은?"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
영희는 영자신문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철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영희는 철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편의점을 나갔다.
영희와 좀 더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던 철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