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능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영희와 만나기로 약속한 철수에겐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만큼이나 기다려졌다.
철수는 학교가는 길목에서 영희를 기다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영희가 소영이와 함께 나타났다.
"영희야, 그동안 잘 지냈니?"
영희는 소영이와 떠들며 길을 지나가던 중 철수와 마주치자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 기다렸니?"
"아니, 지나가다 널 봐서......"
철수는 혹시라도 영희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우연히 마주 친 것처럼 말했다.
"철수야, 시험 잘 봐. 아니면......"
"걱정마."
"이따 보자."
영희는 철수에게 속삭이듯이 '이따 보자'고 한 후 소영이에게 무엇인가 속삭이면서 걸어갔다.
철수는 영희와 소영이가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영희의 입모양을 보니 '우리 이따 만나는데, 너도 올래?'하는 것 같았고, 소영이의 입모양을 보니 '내가 가면 철수가 좋아할까?'하는 것 같았다.
영희는 입모양만 뻥끗하면서 말할 때가 많았다.
입모양만 뻥끗하는 것도 말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철수는 영희의 입모양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철수가 입만 뻥긋하는 영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영희가 자주 그런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영희는 교실 청소 후에 피아노를 치곤 했는데, 철수가 기다리면 '잠깐만' '먼저 가' '기다려' 등의 짧은 말을 입만 뻥끗하면서 말했었다.
영희는 철수가 자신의 입만 뻥끗하는 말을 알아듣자 나중에는 '난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 같은 긴 말도 입만 뻥끗하면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래서 지금은 멀리서 영희의 입모먕만 봐도 영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영희와 소영이의 뒷모습이 지나가던 학생들과 섞여 보이지 않을 무렵이었다.
"철수 오빠!"
고개를 돌려보니 혜정이였다.
"혜정이 니가 우리 학교 앞에 웬일이니?"
"저, 이쪽에서 우리 학교가는 버스타요."
혜정은 철수의 물음에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되물었다.
"철수 오빠, 영희 언니랑 많이 친해요?"
영희와 사귀냐는 말을 돌린 것이다.
"나랑 영희랑 초등학교 때 짝이라 좀 친해."
"초등학교 때 짝이었다고 다 친한 건 아니잖아요?"
'혜정이가 나랑 영희가 만나는 걸 눈치챈 모양인데, 무슨 속셈으로 캐묻는 걸까?'
철수는 호기심이 발동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 말 돌리지 말고, 뭘 알고 싶은데?"
"철수 오빠랑 영희 언니랑 만나는 거 같아서요."
지난 번에 레스토랑에서 철수가 영희와 함께 있는 걸 본 모양이였다.
철수는 지나가던 학생들이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랑 영희랑 만나는 거 맞긴 하지만,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알았어요. 근데, 제 오빠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돼지. 비밀인데......"
철수는 이 정도로 말하면 혜정이 알아들었을 것 같아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했다.
"혜정아, 나 오늘 수능 모의고사라 이만 가볼게."
혜정은 모의고사 보러가는 철수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시험보시는데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시험 잘 치세요."
"소영아, 너 시험 잘 봤니?"
수능 모의고사가 끝나자 영희는 학교 벤치에 앉아 소영이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완전히 망쳤어!"
"그래도 나보단 훨씬 잘 봤겠지."
"넌, 수능 안 봐도 되잖아."
"그래도 중간 이상은 되야 어머니한테 안 혼나는데......"
"넌 좋겠다. 난 십등 안에 안 들면 어머니한테 죽는데......"
"지금 몇 시지? 어머! 벌써 네시 십분 전이네!"
영희는 소영이와 모의고사 이야기하는데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손목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 서둘러 약속장소로 뛰어갔다.
뛴 덕분에 정확하게 약속시간에 도착한 영희는 철수에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니?"
철수는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지만, 방금 도착한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나도 이제 막 도착했어. 수능 끝나고 애들이랑 답 맞춰 보느라고."
"음식은 시켰니?"
"아니, 너한테 물어 보려고....."
"물어보긴...... 난 아무거나 좋아. 니가 먹고 싶은 것 그냥 시켜."
철수는 종업원 아가씨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영희는 종업원 아가씨가 떠나자마자 철수에게 물었다.
"시험은?"
"괜찮게 본 것 같아."
"다행이구나. 난 망쳤어."
"넌 시험 안 봐도 되지 않니?"
유학을 떠나는 영희는 수능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다.
철수의 물음에 영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잘 보면 좋지, 뭐."
"근데, 너한테 물어볼 말이 있는데......"
"뭔데......"
"성적이 떨어지면...... 당분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 거...... 그 기준이 뭐야?"
철수는 문득 다음달에 이번달보다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희는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 얼버무렸다.
"작년 학기말을 기준으로...... 하지만 나도 그렇게 융통성 없는 건 아니니...... 최선을 다하면......"
비록 영희가 철수에게 성적이 떨어지면 당분간 만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이 그렇게 공부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수가 다시 물었다.
"그럼, 최선을 다하면, 시험 조금 잘 못봐도 괜찮은 거니?"
연이어 묻는 철수가 귀엽다는 생각에 영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영희와 철수가 시험에 관해 말하는 동안에 주문했던 음식이 왔다.
"많이 먹어. 난 조금 전에 소영이하고 커피를 마셨더니, 별로 배고프지 않네."
영희가 배고프지 않은 이유는 커피를 마셨기 때문이 아니라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영희는 철수와 헤어지기 싫어서 유학을 포기할 것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였다.
유학가기 전에 사랑을 느껴 보고 싶은 마음에 철수와의 만남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지금의 영희와 철수와의 관계는 주객전도가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객전도란 손님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손님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전에는 철수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 좋아할까봐 걱정했던 영희가 이제는 철수가 자신을 잊어버릴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영희는 이제 꿈을 망각한 채 철수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영희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고 잠시 유학을 미루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만, 여자가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꿈을 미루는 것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별로 먹지 않자 철수가 물었다.
"왜 음식은 별로 안 먹고 그러고 있니? 시험 못 봤다고 그러는 거야?"
영희는 철수의 물음에 푸념하듯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떠날 생각을 하니......"
"그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니?"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부모님께서......"
영희는 철수가 처음으로 유학을 떠나지 말라는 말을 하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철수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 내가 없어도 행복하게 지낼 자신있니?"
"글쎄, 언젠가는 네가 다시 돌아온다면, 행복할 자신있는데......"
"난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 미안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기다릴 거야."
"난......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기다릴 거야. 십년이 더 걸려도......"
10년이 더 걸려도 기다리겠다는 말에 영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마워......"
철수는 영희의 심경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영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십년이 아니라 이십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꼭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어."
영희는 철수가 덥석 자신의 손을 잡자 당황스러웠지만, 마치 아무렇치도 않은 듯 태연하게 말했다.
"돌아올게."
영희가 철수에게 손을 잡힌 것은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었다.
체육시간에 영희가 운동을 하다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아 철수가 영희의 손을 잡았었다.
잠시 중심을 잃었던 영희는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철수의 손을 뿌리쳤지만, 철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었다.
체육 시간이 끝나자 영희는 철수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철수는 영희가 자신의 손을 뿌리친 기억이 나서 그런지 그 이후로는 영희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철수가 영희와 사귄지 석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철수는 영희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영희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철수는 영희가 유학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도 그런 말이 영희를 부담스럽게 할까봐 하지 못하다가 오늘 조심스럽게 말한 것이다.
영희의 대답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10년이 더 걸려도 기다리겠다는 철수의 말에 고맙다고 했으니, 이제 철수는 영희가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지금 영희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철수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있었다.
철수가 계속 자신의 손을 잡고 있자 부끄러워진 영희는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은 철수의 손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
"식사 안 해? 음식이 식겠다."
"어, 그래......"
자연스럽게 철수는 영희의 손을 놓고 말았다.
영희는 딴청을 부리듯 미소를 지었다.
"음식이 남으면 아깝잖아. 식기 전에 빨리 먹자."
"걱정마. 니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고파졌거든."
"난, 다 못 먹을 것 같아."
"그럼, 내가 먹으면 되지, 뭐."
영희는 철수가 자신이 남긴 음식을 먹겠다고 하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영희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은 사람은 영희의 부모님 밖에 없었으니까.
영희는 철수가 음식을 다 먹자 부끄러운 얼굴로 남은 음식을 철수에게 살짝 내밀었다.
"난 다 먹었는데......"
영희의 의도를 눈치챈 철수는 영희의 음식을 자신의 테이블로 당긴 후 먹기 시작했다.
"나 혼자 다 먹어서 미안......"
영희는 철수가 자신이 남긴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다른 사람이 남긴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는데, 벌써부터 철수가 내 가족이 된 느낌이야.'
정작 철수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희가 남긴 음식을 먹으니 영희랑 키스하는 기분이야.'
영희는 이러한 철수의 속내도 모르고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철수와 결혼하면 나도 철수가 남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