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능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영희!"
방과 후 담임 선생님이 영희의 이름을 호명한 후 성적표를 건네주었다.
20등이라 찍혀 있는 성적표를 받은 영희는 망연자실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성적으로는 부모님을 설득시킬 수 없을 텐데.'
영희의 성적표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모의고사 성적이 좋으면 유학가지 않겠다고 말해볼까 고민했었지만, 이 성적으로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영희는 어머니께 성적표를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성적표를 보자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그래도 중간은 넘었으니 다행이구나. 난 니가 중간도 안 될까봐 걱정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라."
"저도 그럴 생각이예요. 앞으론 더 열심히 할게요."
방으로 들어온 영희는 성적표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은 후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유학가지 않아도 되면 좋겠어. 그럼, 철수와 헤어질 필요가 없으니까.'
문제는 수능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성적이 좋다면 몰라도 성적이 좋지 않다면 유학을 포기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철수는 꿈이 변호사라 했지. 나도 꿈을 이루어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녁 시간이 되자 영희는 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철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시험 어떻게 됐니?"
영희는 철수의 성적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철수가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반에서 이등했어."
철수의 말에 영희는 마치 자신이 2등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와, 부럽다. 난...... 이십등했는데......"
"영희는 피아노가 일등이잖아."
"피아노는 일등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거든."
낙심하는 듯한 영희의 목소리를 듣자 철수는 영희를 위로하려고 명랑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튼 난 정말 피아노 잘 치는 애들이 부럽더라."
"나, 지금 부모님 식사하시는 동안 살짝 전화한 거라서......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그래, 언제 만날 수 있니?"
성적표 때문에 마음이 심난한 영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요즘 바빠서......"
영희는 이번 달에는 철수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철수는 맥이 빠졌지만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할 수 없네. 나중에 보자."
"잘 있어."
영희는 철수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등 안에도 안 들었던 철수가 자신을 만난 후 2등을 했다는 생각을 하니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희는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계속 보살펴주면 사시 합격도 문제 없겠어.'
피아노 학원에 간 영희는 자랑하듯 소영이에게 말했다.
"철수가 반에서 이등했어!"
소영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대단하네! 철수가 성적 떨어지면 안 만나겠다는 네 말에 눈에 불켜고 공부했나봐."
"그러게. 앞으로 내가 잘 돌봐주면, 일등도 할 거야."
영희가 농담조로 한 말에 소영이도 농담조로 맞장구쳤다.
"그래, 니가 잘 돌봐주면 철수 완전 용되겠다."
영희는 소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내가 유학떠나지 않으면 계속 돌봐줄 수 있을 텐데.'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온 영희는 깊은 고민 끝에 유학을 꼭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는 앞으로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없어도 사시에 합격할 수 있을 테니, 나도 유학을 떠나자. 그래서 더 멋진 모습으로 철수를 만나는 거야.'
영희에겐 철수를 만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랑보다 더 중요한 꿈이 있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영희는 꿈이 많은 소녀였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꿈도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언젠가 피아노 독주회에서 본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세계적인 여자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떠오르자 영희는 마치 자신이 그 여자 피아니스트가 된 것처럼 흥분되었다.
'유학가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온다면 더욱 당당하게 철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영희와 철수가 만난지도 어느새 200일째가 되었다.
둘이 만난지 100일째인 날에 영희에게 카드를 주었던 철수는 200일째인 오늘도 영희에게 카드를 주었다.
영희는 만난지 200일째를 기념하는 철수의 카드에 너무나 행복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나, 사실 오늘이 이백일째라는 거 생각 못했어. 하지만 정말 고마워. 고맙다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네. 내 마음 알지?"
영희는 오늘이 철수를 만난지 200일째라는 것을 알았지만, 철수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모르는 척 한 것이다.
"알아. 영희 마음. 처음엔 잘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아. 영희는 때로는 누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천사처럼...... 날 생각해준다는 것 잘 알고 있어."
영희는 정말 때로는 누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천사처럼 느껴졌다.
"천사? 듣기는 좋은데, 천사라는 말이 부담되네. 천사는 착하고 아름답잖아. 나도 천사처럼 착하고 아름답고 싶어. 하지만 천사처럼 착할 자신이 없어. 왠지 천사같다는 말이 부담스럽네."
"부담스러워 할 필요없어. 영희 자체가 나의 천사니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천사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지. 너는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로 나의 천사야."
철수의 말은 진심이자 사실이었다.
철수의 눈에 영희는 천사처럼 착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영희는 철수의 말에 수줍어 얼굴을 붉혔다.
"너무 칭찬하니까 점점 부담스러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마운 걸....."
그러고는 별안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우리 오늘 저녁이라도 먹어야 되겠다. 우리 집에 와. 실은 내가 수학 문제를 모르는 것이 있어서. 몇 문제만 과외해주고 가면 어머니께서 맛있는 거 주실 거야."
"정말?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내가 어머니께 수학 문제 모르는 것 좀 물어보게 너를 집에 데려오겠다고 말씀드렸는 걸.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가 사귀는 거 눈치채지 못하셨으니 조심해야 돼."
"나도 알아. 걱정마."
"가자."
철수는 영희의 어머니께 인사드린 후 영희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철수가 영희의 방에 들어온지는 정말 오랜만으로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처음이었다.
영희는 침대에 앉아 철수에게 의자에 앉으라는 뜻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단둘이 방에 있으니 철수는 어색하여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물었다.
"모르는 문제가 뭐니?"
"아이참, 좀 쉬어야지. 쉬었다 하자."
"쉬어도 괜찮을까? 너희 어머님께서......"
영희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온종일 수업하다 왔는데, 넌 힘들지 않니? 난 피곤한데. 걱정마시고, 어서 의자에 앉아."
'어라! 영희가 교복 입은 채 침대에 누워있으니 분위기가 묘한데......'
영희가 교복을 입은 채 침대에 누운 모습이 이상야릇하게 느껴졌다.
'어머! 철수 데려와놓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철수의 이상야릇한 시선을 느낀 영희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영희는 방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쟁반에 시원한 쥬스 두 잔이 있었다.
"자."
"고마워."
"오늘 저녁에 어머니께서 맛있는 거 해주신데. 뭐 먹고 싶니?"
철수는 모든 것이 어색해서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나...... 그냥...... 아무거나 잘 먹거든."
"알았어."
영희는 다시 방에서 나갔다가 이번에는 의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이제 공부해야 되겠어. 어머니께서 좀 쉬었다 공부하라 하셨지만, 난 지금 기분이 좋아서 힘이나."
영희는 철수와 함께 있으니 기분이 좋아져 금새 피로가 풀렸다.
"좋아, 시작하자."
책상에 노트를 펼친 영희는 노트에 뭔가 쓰기 시작했다.
'하나 물어볼게 있어.'
철수도 노트에다 적었다.
'뭔데?'
'너 대학가면 사시본다 했지?'
"근데?'
'사시보면 군대는 언제 갈 거 같아?'
'사시 붙고 연수원 졸업하면.'
'사시는 보통 어느 정도 걸리니?'
'대학합격하고 빨라야 4~5년.'
영희는 생각했다.
'사시 합격하고 군대까지 갔다오면 넉넉히 잡아 십년이 걸릴지 모르겠구나.'
영희는 다른 노트를 꺼내 펼친 후 말했다.
"이제 시작하자."
"좋아."
영희는 수학 교과서에 있는 문제 몇 개를 연필로 동그라미 친 후 말했다.
"이거 좀 풀어봐. 이해가 안 돼서......"
철수는 영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노트에 써가면서 설명했다.
철수가 영희에게 수학 문제를 설명하는 동안에 영희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저녁 먹고 하거라."
영희는 수학 교과서와 노트를 덮고 철수에게 말했다.
"가자.”
식탁에 앉은 영희와 철수는 영희의 어머니께 '감사히 먹겠습니다' 말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많이 먹어라.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음식도 정말 맛있어요."
"우리 영희가 수학이 부족한데 도움을 줘 고맙네. 나중에 시험 끝나면 영희한테 한턱 내라고 할게."
"아니예요. 저희는 친구 사이인걸요. 우리...... 친구 맞지?"
'친구'란 말에 영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 맞아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어요."
영희는 웃으면서 말하면서도 철수에게 말조심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영희의 어머니는 뭔가를 회상하며 말했다.
"친구라......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남녀 사이에 친구란 말은 쓰지 않았는데...... 요즘은 바뀐 모양이구나."
철수는 실언이라도 했나 싶어 더듬거렸다.
"제, 제가, 초등학교 때, 영희의 짝이라서 친구가 됐나봐요."
철수가 어색하게 말하자 영희가 나섰다.
"요즘은 남녀 사이에도 친구하는 애들 많아요."
"그래, 친구도 좋구 다 좋은데...... 수능 끝나고 친구했으면 좋겠구나."
수능 끝나고 만나면 좋겠다는 말을 돌린 것이다.
'영희 어머님이 우리 사이 눈치채신 것 같네.'
철수는 아무래도 영희의 어머니가 자신과 영희 사이를 눈치챈 것 같아 부담스러워졌다.
식사를 먼저 마친 철수가 영희의 어머니께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우리 영희 가르치느라 수고 많았어. 잘 가라."
철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희도 따라 일어섰다.
"어머니, 철수를 문밖까지 배웅해주고 올께요."
철수와 영희는 함께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철수가 걱정스런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님이 우리 만나는 거 눈치채신 거 아닐까?"
"아니야, 어머님께서 그냥 하시는 말이니 신경쓰지마. 아직 눈치 못채신 것 같아."
영희 역시 어머니가 눈채챈 걸 알았지만, 철수가 걱정하지 않도록 말한 것이다.
"다행이구나."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내가 정말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얼마 가르쳐 주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오늘 정말 도움 많이 됐어."
"나중에 또 필요하면......"
"아니, 됐어. 나 앞으로 과외 할 거야."
"그럼, 잘 있어."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