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시작한지 1주일째인 오늘은 영희와 철수가 만난지 7개월째가 되는 날이다.
영희는 달력을 보며 생각했다.
'철수와 만난지도 벌써 칠개월이 지났구나. 이제 칠개월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은 칠개월도 지난 칠개월처럼 빨리 지나갈까? 아니야, 논술까지 끝나고 나면 매일 만날 수 있을 테고, 그럼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겠지, 뭐.'
영희는 책상 서랍에서 예전에 산 카드를 꺼내 뭔가 쓰기 시작했다.
글을 다 쓴 영희는 카드를 봉투에 넣은 후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언제 들어도 반가운 철수의 목소리였다.
"나야, 잘 지내니?"
"덕분에 잘 지냈어."
"나, 오늘 저녁에 시간있는데...... 넌 어때?"
영희는 철수의 공부를 방해할까봐 조심스러웠다.
"나도 시간있어. 방학이라서 칠월말까지는 언제든 시간있어."
"고삼이 방학이 어디있니?"
"고삼도 쉬어야 공부할 거 아니야!"
철수가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하자 영희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좋아. 오늘 저녁 일곱시에 거기서 보자."
"좋아."
"이따 보자. 그만 끊을게."
전화를 끊은 영희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이제 겨우 5시를 가리켰다.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네. 그때까지 나도 공부해야지."
영희가 공부하려고 교과서를 펼쳤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영희야, 어서 문열어 드려라. 아버지께서 오셨어. 귀한 손님하고 오신다는데, 귀한 손님이 누굴까?"
'귀한 손님? 아버지께서 누굴 데려오셨지?'
영희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재빨리 현관문을 열었는데, 아버지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어머!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잖아! 이 남자 연예인인가봐!'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잘생긴 남자를 보자 영희는 연예인인 줄 알았다.
이때 아버지가 남자를 가리키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 분 연예인 뺨칠 정도로 잘생겼지? 인사드려라. 우리 회사 회장님 아드님이시다."
'회장님 아드님이 우리 집엔 왜 왔지?'
의아한 영희에게 아버지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얘가 내 딸일세.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영희야, 인사드려라."
영희는 수줍은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아들이라는 남자는 영희가 인사하자마자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김현철이라고 해. 현철 오빠라 불러줘."
영희는 '오빠'라 불러 달라는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호호... 저는 영희예요. 이영희......"
순간 현철과 눈이 마주치자 영희는 수줍어 고개를 돌렸다.
현철이 영희의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따님이 대단한 미인이네요. 미스 코리아 대회에 나가도 되겠어요."
영희는 기분이 좋았지만, 잘 모르는 남자의 칭찬이 어색하여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스 코리아가...... 아무나 되나요."
이때 어머니가 현철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인사하는 것이 수줍은 모양이었다.
현철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사모님도 정말 미인이시네요. 지금도 미인이시지만, 젊으셨을 때는 꾀나 인기가 많으셨을 것 같네요."
현철의 말에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내 집 사람은 지금도 미인이지. 세월도 비껴가는 미녀야. 하하하......"
어머니는 현철이 자신의 외모를 치켜세우는 말에 기분이 좋아 보이였지만, 역시 영희처럼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식사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같이 나가지. 식당에 예약이 되있어."
영희는 자신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아버지께 여쭈었다.
"저도요?"
"할 일 있니?"
"네. 약속이 있어서......"
"무슨 약속?"
영희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게 있어서요. 친구한테 뭐 좀 물어보려고요."
"식사하고 나서 나중에 물어보면 되잖아. 몇 시에 약속했는데?"
"일곱시요."
"여덟시로 미루면 안 되니? 우리 가족이 함께 외식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지 않니?"
"저녁 약속이라서요."
현철이 부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같이 가서 식사하면, 내가 일곱시까지 약속장소에 바래다 줄게. 어디야?"
영희는 철수와의 약속 장소가 탄로날까봐 어물쩡거리다가 동문서답하듯 물었다.
"거기가...... 근데, 음식점은 어디 있어요?"
"삼성역 코엑스몰 근처."
"제 약속장소도 그 근처예요. 그럼, 빨리 가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당장 못나가는데...... 화장 좀 하고요. 영희야, 잠깐만 기다려라."
어머니는 영희에게 경고하듯 눈짓하고서 안방에 들어갔다.
철수와의 약속인 줄 아니 빠질 생각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영희는 약속시간을 미루고 싶었지만, 전화하면 철수와 만나기로 약속한 사실이 들킬 것 같아 전화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철수한테 전화해줘야 하는데, 어쩌지?'
이러한 영희의 모습을 본 현철은 영희가 약속한 사람이 남자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여보, 화장 멀었어?"
아버지가 잠시 안방에 들어간 사이에 현철이 영희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 이걸 써."
영희가 주저하자 현철이 계속 핸드폰을 내밀었다.
"친구한테 걸어."
"아, 네, 감사합니다."
영희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머! 철수 어머님이잖아!'
철수는 벌써 나갔는지 철수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깜짝 놀란 영희는 전화를 끊었버렸다.
'어떻하지? 벌써 나갔나 보네!'
영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현철이 말했다.
"전화 안 받니?"
"네."
"나중에 다시 해보지 그러니."
"그래도 되요?"
"난 지금 쓸 일이 없으니까, 식사 끝날 때까지 니가 써라."
"정말 고마워요."
영희는 소영이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소영아, 나 영희야. 일곱시에 철수하고 약속이 있는데, 부모님과 외식하러 나갈 일이 있어서 시간을 지킬 수 없어. 철수한테서 연락오면 일곱시 반까지 기다리고...... 그때까지 내가 안 오면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줄래?"
"알았어."
"고마워. 끊을게. 나중에 보자."
영희는 전화를 끊은 후 현철에게 핸드폰을 돌려 주었다.
"여기, 잘 썼어요."
"이제 더 필요없니?"
"네, 정말 잘 썼어요."
"뭘, 그 정도 가지고....."
현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희의 부모님이 안방에서 함께 나왔다.
영희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차에 탔고, 현철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신의 차에 탔다.
'철수가 많이 기다리지 말아야 할텐데...... 아참! 카드를 두고 왔네!'
영희가 카드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차가 출발한 후였다.
영희는 당황했지만 이제와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 카드를 가져 오기에는 너무 늦었어. 철수와 시간약속을 지키려면 서둘러야되니 카드는 나중에 줄 수 밖에 없겠어.'
카드에 미련을 버리자 영희는 회장님 아들이라는 현철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버지, 우리가 왜 회장님 아드님과 식사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회장님께서 너와 회장님 아들이 같은 지역으로 유학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회장님 아들이 너를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아드님을 데려 왔지."
"근데, 회장님이 아버지하고 어떻게 아세요?"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아버지가 원래 발이 넓지 않니? 나와 회장님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란다."
"근데, 제가 회장님 아드님을 뭐라 불러야 되요?"
"그냥, 현철 오빠라 불러라. 나도 현철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현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오늘부터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현철을 아들이라 했다 아드님이라 했다 오락가락했다.
영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친구와 연락이 안되는데, 저 먼저 가면 안 되요?"
아버지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친구와 연락이 안 됬어? 친구에게는 나중에 양해를 구해라."
이때 어머니가 영희에게 말했다.
"약속은 신경쓰지 마라. 친구라면 이해할 거다. 친구야 나중에 만나도 되지 않겠니?"
어머니는 철수는 나중에 만나라는 말을 돌린 것이다.
영희는 철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일곱시까지 끝나야 철수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식당에 도착한 영희의 일행은 네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미안할 정도의 큰방으로 안내받았다.
영희는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큰방에 네 사람만 있으니 어색하네.'
이때 현철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실은 식당에서 오늘 저녁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마음껏 드세요."
"고맙네."
아버지가 고마움을 표시하자 현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요, 저는 한게 없는데요."
그러고는 영희에게 말했다.
"영희야,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없니? 뭐든 말만 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은 다 공짜야."
"감사하지만, 저는 아무거나 잘먹어요."
영희는 뭐든 나오면 빨리 먹고 철수에게 달려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현철은 이어 영희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님은 드시고 싶으신 것이 없으신가요?"
"자네가 알아서 시키게."
"네, 아버님."
현철이 영희의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부르는 것이 영희에겐 여간 어색하지 않았다.
'현철 오빠가 우리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부르니 어색한 걸.'
현철은 웨이터를 불러 말했다.
"메뉴판 주세요."
얼마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아버지가 현철에게 말했다.
"잘 먹겠네."
"뭘요. 영희야, 이 식당의 음식은 고칼로리 저지방 음식이니 먹어도 살이 찌지 않으니 많이 먹어라."
"감사합니다."
영희는 부모님이 식사를 시작하자 자신도 식사를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먹지 않고 있던 현철도 영희가 먹는 것을 보자 식사를 시작했다.
현철은 영희의 식구들을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희의 부모님과 현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했지만 영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만 했다.
영희는 금새 식사를 마쳤지만 자리를 뜰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머니가 영희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