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앉자."
전동차에 둘이 앉을 자리가 있어 영희가 손짓했다.
'설마 지하철에서 아는 애들과 마주치진 않겠지, 뭐.'
잠시 주저하던 철수는 영희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는 순간, 철수는 문득 깨달았다.
'영희 손잡을 절호의 기회구나!'
철수는 영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갑작스럽게 철수에게 손잡힌 영희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지하철 광고를 응시했다.
'영희가 손잡힌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네.'
철수는 용기를 내어 영희의 손을 꼭 잡았다.
깜짝 놀란 영희는 갑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척하며 철수의 손에서 손을 빼버렸다.
"여섯시까지 도착할 수 있겠지?"
갑작스러운 영희의 행동에 철수는 어색했지만, 애써 자연스럽게 말했다.
"지금 다섯시 사십분이니,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머쓱해진 영희는 철수를 잠시 쳐다본 후 다시 고개를 돌리며 지하철 광고를 응시했다.
영희는 후회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옆에 앉으라 하지 않았을 텐데. 사람들 보는데 쪽 실리게.'
철수는 영희가 지하철 광고를 응시하자 생각했다.
'영희가 지하철 광고를 보는 걸 보니, 또 손잡아도 괜찮겠는데.'
철수는 영희의 손을 또 다시 살며시 잡았다.
'얘 오늘 따라 왜 이래? 정신차리라고 말해줄까?'
영희는 철수에게 정신차리라 말하려다 참았다.
'관두자. 나중에 조용히 타일러야지.'
영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 지하철 광고를 쳐다보았다.
영희가 계속 지하철 광고를 쳐다보자 철수는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영희의 손을 꼭 잡았다.
철수가 영희의 손을 꼭 잡으니 영희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게 내 심장 소리야? 영희 심장 소리야?'
철수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영희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머나! 민망하게 왜 이래?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자!'
민망해진 영희는 졸리는 척 두 눈을 감아버렀다.
철수는 두 눈을 감은 영희를 응시하며 속으로 희희낙락했다.
'영희가 가는 곳이 잠실역이 아니라 시청역이라면 좋을 텐데. 이제 곧 잠실역에 도착하겠지. 영희 손 꼭 잡으니 천국에 온 것 같네. 헤헤......'
영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철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어느새 전동차는 잠실역에 도착했다.
전동차가 멈추자 영희는 재빨리 철수의 손에서 손을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동차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철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나 가봐야되. 잘있어."
"잠깐, 호텔까지만 따라가면 안 돼니?"
"글쎄......"
영희는 벼루고 있었다.
'너 호텔까지 따라와 또 내 손 잡으면 확 따귀때려줄 테야!'
철수는 영희가 대답하지 않자 호텔 직원 흉내를 내며 말했다.
"제가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호호호......"
철수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린 영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철수는 영희의 손을 다시 살며시 잡으려 했지만, 영희는 이번에는 재빨리 철수가 잡기 전에 손을 빼버렸다.
"이제 그만...... "
손잡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 가야 돼."
영희는 또 다시 손잡힐까봐 철수에게 조금 떨어져 따라오라 손짓했다.
영희는 일부러 철수와 간격을 둔 채 함께 호텔에 들어갔다.
영희는 호텔의 안내데스크에 파티 장소를 물어본 후 철수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철수야, 이제 당분간 만나지 말자. 요즘 우리 너무 자주 만났잖아. 게다가 오늘로써 나의 휴가도 끝나고 너의 휴가도 끝나니 열심히 공부하고 개학 후에 다시 만나."
철수는 개학 후 다시 만나자는 말에 실망했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개학 후에 만나면 되지, 뭐.'
철수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 꼭 누나처럼 말하는구나."
"그래, 착한 동생, 이 누나의 말을 들어야지. 방학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만나자."
"그래, 열심히 할게. 너도 열심히 해."
영희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철수야, 잘가."
"나중에 보자."
이때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고 영희는 재빨리 엘레베이테에 탔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찰나, 영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철수도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영희를 태운 엘레베이터가 올라가자 철수는 허전한 느낌이 들었지만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파티장에 들어선 영희는 파티의 규모와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드마라에 나오는 파티에 온 느낌이야!'
컨벤션 센터를 통채로 빌려 하는 파티는 생전 처음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의 모습은 마치 패션쇼에 나오는 모델같았다.
파티장의 인원은 어림잡아도 200명은 넘어 보였는데,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연예인처럼 화려한 의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현철 오빠가 아는 사람들일까?'
영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파티장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현철이 미모의 여성과 함께 나타났다.
"영희야, 와줘서 고마워. 내 여동생 연주야."
모델처럼 늘씬한 연주는 그야말로 미스 코리아 뺨치는 미모라 영희가 주눅 들 정도였다.
"만나 뵙게 되서 정말 반가워요."
"만나서 반가워, 영희야. 날 그냥 연주 언니라고 부르렴."
"네, 연주 언니"
현철이 연주를 가리켰다.
"영희야, 연주는 줄리아드 음대를 나왔어. 너도 피아노 전공할 예정이라 했지? 연주와 통하는 점이 많을 거야."
그러고는 연주에게 말했다.
"연주야, 네가 영희 좀 보살펴 줘라. 영희는 아는 사람도 없으니...... 소개도 좀 시켜주고, 난 잠시......"
"어, 오빠, 내가 잘 돌봐줄게."
영희는 현철이 자리를 뜨자 연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연주가 미소를 띤 채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공부는 잘 되니?"
어색한 적막을 깨기 위해 물은 연주의 말에 영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그럭저럭...... 하고 있어요."
"유학갈 거라 들었는데...... 어느 대학 생각 중이니?"
영희는 아직 미국 대학의 구체적인 정보도 모르고 있었다.
"글쎄요...... 아직은......"
"줄리아드라면 내가 그쪽 교수님들을 잘 알고 있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정말 감사해요. 도와주신다면 정말......"
영희는 그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감사하긴...... 그 정도야."
연주도 별 생각없이 꺼낸 말이라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렸다.
영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영희가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하자 연주는 화제를 돌렸다.
"여기 있는 애들이 모두 유학생이거나 유학 준비하고 있는 애들이 아니야. 그냥 오빠가 아는 사람들도 많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현철 오빠가 초대한 사람들이예요?"
"모두 그런 건 아니고...... 난 알지만, 오빠가 모르는 사람도 꾀 있어."
"그렇군요."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은 현철이 초대한 사람이 아니면 연주가 초대한 사람이었다.
영희는 연예인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수백의 남녀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현철 오빠랑 연주 언니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구나!'
연주가 영희의 손을 음식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끌며 말했다.
"영희야, 이제 식사하자. 식사하고 내 친구들과 내 후배들을 소개시켜 줄게."
"네."
연주가 자리에 앉자 영희도 따라 앉았다.
"영희야, 음식은 셀프야. 같이 가자."
"네."
연주는 영희의 표정이 경직된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 너, 수줍음 많이 타는구나."
"조금......"
"이런데 오면 처음엔 다 그래. 나도 처음엔 낯을 많이 가렸는데...... 적응하기 시작하면 금방 적응되더라. 너도 조금 지나면 적응될 거야."
뷔페식으로 차려놓은 저녁 메뉴에는 세상에 맛있는 음식은 모두 있는 것 같았다.
연주와 영희는 쟁반에 음식을 담은 후 테이블로 돌아와 식사를 시작했다.
연주가 먼저 먹기 시작하며 영희에게 말했다.
"많이 먹어."
영희는 연주가 학교 선배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영희가 줄리아드에 입학한다면 정말 후배가 되는 것이다.
영희는 연주에게 친근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지만, 나이 차이가 많다 보니 조심이 되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둘 사이의 침묵을 깨기 위해 연주가 불쑥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니?"
영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어요."
수줍어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한 영희에게 연주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없으면...... 여기 괜찮은 사람있으면 말해봐. 내가 소개시켜 줄게."
연주의 말에 속으로 움찔한 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고삼이라......"
연주는 영희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처음부터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락처만 받아 놓고 나중에 시험 끝나면 연락하면 되잖아."
"전 아직......"
"하기야, 지금 그런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겠지. 실은 영희, 네가 하도 점잔 빼고 있길래 그냥 해본 소리니 신경쓰지마."
"죄송해요......"
연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 넌 어째 감사하다, 죄송하다는 말 뿐이니?"
"죄송......"
영희는 또 다시 '죄송해요'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연주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언니는 정말 예쁘세요. 미스 코리아 나가셔도 될 거 같은데요."
"고마워. 근데,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실 거야."
영희는 연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우리 아버지도 내가 미스 코리아 대회 나간다면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영희는 화제를 돌렸다.
"언니는 남자친구 없으세요?"
"아직...... 부모님께서 워낙 까다로우셔서...... 맞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
"그렇겠네요. 언니 마음에 들면 언니 부모님 마음에 들지 않고, 언니 부모님 마음에 들면 언니 마음에 들지 않고......"
"영희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연주가 영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난데없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너 참 예쁘다. 하긴, 한창 예쁠 때지. 나도 너만한 나이 때는 너처럼 예뻤어."
화장을 하지 않은 영희가 화려하게 화장한 파티장의 그 어떤 여성보다 예뻐보였다.
"언니가 저보다 더 예쁘시면서......"
"아니야. 영희는 정말 예뻐. 모델이라고 해도 믿겠는 걸. 오빠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모델인 줄 알았을거야. 지금 여기 모델들 많이 있거든."
"어쩐지...... 모델 같은 여자가 많더니...... 모델 같은 게 아니라 모델이었군요."
순간 영희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미모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영희는 미스 코리아 뺨칠 정도인 미모의 여성을 어디서 본 것 같아 연주에게 물었다.
"연주 언니, 저기 앉아 있는 언니는 누구예요? 어디서 본 거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