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성은 영희가 자신의 우회적인 고백을 알아들은 것을 알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희야, 혹시 나한테 할 말이 있다면, 말해줄 수 있니?"
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겠어. 나도 내 마음을......"
"언제 알 수 있지?"
"알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거야."
영희는 입술을 깨문 채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철수는 그동안 내게 정말 잘 해주었는데, 이제와서 어떻게 철수에게 '나 사실은 희성이를 좋아했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해해 너의 고백을 받아준 거야. 니 마음을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이제 헤어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니? 난 그렇게 못해. 차라리 희성이 너를 잊겠어. 정말 미안해.'
희성은 영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니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어. 니가 나와 철수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철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지. 그래, 나도 네 마음을 알아. 너는 정이 많아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거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니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정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희성은 영희가 자신을 더 좋아하지만, 철수와의 의리로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철수가 영희한테 고백하기 전에 내가 먼저 고백했다면 영희는 철수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자 희성은 영희가 언제 철수의 고백을 받아주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철수하고 사귄지 얼마나 됐니?"
"작년 크리스마스에."
"작년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날 언제쯤인지 말해줄 수 있니?"
"그걸 왜 묻지? 나 지금 머리가 복잡해서 잘 생각나지 않아."
희성은 철수가 영희에게 고백한 것이 작년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듣자 마음이 아팠다.
'실은 나도 작년 크리스마스에 너한테 고백할까 하고 카드를 사긴 했는데, 수능 끝난 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더니......'
영희는 희성의 질문에 답변하고 싶지 않아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희성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저녁 일곱시 쯤이었어."
"알았어, 말해줘서 고마워. 영희야, 나 이제 그만 가봐야 되겠어. 내가 니 시간을 너무 뺏은 게 아닌지 모르겠어.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없어. 난 수능 보지 않으니 미안한 건 오히려 나야."
"수능 보지 않는다고 시간이 남아도는건 아니잖아."
"난 오늘 하루종일 놀고 쉬었어. 그러니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아마 놀고 있을 거야."
"노는 것도 쉬는 것도 다 공부의 연장선 아닐까?"
"글쎄, 난 너처럼 우등생이 아니라서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니?"
"미안...... 아니, 이제 그만 가볼게. 너도 가서 쉬어.”
희성은 영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데, 영희가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니?'라고 말하자 '미안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영희는 희성이 '너도 가서 쉬어'라고 말하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안녕, 영희야."
"희성아, 잘가."
자리에서 일어선 희성은 나가면서 다시 한번 손을 흔든 후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영희는 희성과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그러지 않았다.
희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영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희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을 나온 영희는 희성이 아직 떠나지 않았는지 궁금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희성과 눈이 마주쳤다.
영희는 속으론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희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희성은 영희가 일부러 뒤쳐져 오고 있다는 생각에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먼저 버스를 타고 가버렸다.
영희는 희성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버스 정류장에 와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금새 다시 왔지만, 앞선 버스와 간격이 크지 않아 다른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란 어째서 기다릴 때는 잘 오지 않는 것일까.
20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자 영희는 생각했다.
'사랑...... 버스...... 모두 기다릴 때는 잘 오지 않는구나. 기다리지 않을 때는 지나가고......'
영희는 학교와 집이 멀지 않아 버스가 빨리 오지 않으면 그냥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버스는 꼭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 참지 못하고 걸어갈 때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는 기왕에 기다린 김에 더 기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희는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희성이 연락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5년이 되도록 연락하지 않아 포기하고 철수를 만났는데, 이제서야 자신을 찾아온 희성을 보자 기다릴 때는 잘 오지 않는 버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희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눈파는 사이에 버스가 지나가버렸다.
영희는 20분 넘게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가버리자 화가 나서 버스를 탈 마음이 없어졌다.
'그냥 걸어가자. 진작에 걸어갔어야 하는데......'
영희는 집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철수와 희성 둘 중에 누가 나를 더 사랑할까? 철수겠지? 희성은 주위에 예쁜 여자들이 많아 나만 좋아해주기 힘들거야. 여동생 보살펴주고, 여동생 친구들 눈치까지 보니......’
집에 도착한 영희는 방으로 들어와 철수에게 전화할까 말까 망설였다.
'철수에게 전화할까? 어제 통화했지만 하루가 한달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영희가 마지막으로 철수와 통화한 것은 바로 어제였지만, 희성을 만나고 온 영희가 느끼기에는 철수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한달이나 된 것만 같았다.
'지금 철수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텐데. 자꾸 전화해도 될까? 하지만 잠깐 하면 되겠지.'
희성과 헤어진 후 마음이 울적해진 영희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철수는 전화벨이 울리자 영희의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공부하고 있었지?"
영희의 목소리였다.
철수는 공부하고 있었지만, 영희가 미안해할까봐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니, 쉬고 있었어. 너 정말 타이밍 잘 맞춰 전화했네. 난 쉴 때 니 전화받으면 힘이 나거든."
"타이밍 잘 맞췄다니 다행이야."
철수는 영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것 같아 물었다.
"오늘 뭐하고 지냈어?"
영희는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아는 듯한 철수의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호호... 난 오늘 수다떨고 놀았어. 노는 것도 정말 피곤하네."
"누구하고?"
"소영이."
영희는 전화한 것이 후회되었다.
철수를 만난 이후로 철수에게 거짓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영희는 철수에게 희성을 만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영희가 희성을 만난 것을 철수가 알게 되면 정신이 산만해질까봐 걱정되서였다.
철수가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빠진 영희에게 물었다.
"재미있게 놀았어?"
"피곤했어."
"피로가 쌓였나봐. 잠이라도 푹자면 좋아질 거야."
"그럴 거야, 신경써줘 고마워."
영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빠져 있어 철수가 영희의 기분을 복돋아 주기 위해 말했다.
"영희야, 나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해도 되니?"
"뭔데?"
"나... 오늘... 하루종일 니 생각했어......"
"공부 안 하고?"
"공부하면서 니 생각했어."
"공부하면서? 왜?"
"세상에서 제일 예쁜 니가 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영희는 철수가 자신을 하루종일 생각했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보고 싶은 건 좋은데, 공부는 제대로 한 거야?"
"난 니 생각하면 공부가 더 잘되. 힘이 나서."
"정말?"
"정말이지, 난 항상 사실만 말한다구."
"글쎄, 뭐... 구월에 성적보면 정말인지 알겠지. 나 그때 니 말이 정말인지 확인할 거야."
"정말이라니까."
"정말이라도 성적 떨어지면 국물도 없어."
"정말? 그래도 국물은 있겠지?"
"없어!"
"내 천사가 왜 그래?"
"난 니 성적을 좋게하는 공부 도우미 천사거든. 그러니까 성적이 나쁘면 국물도 없어. 알았니?"
"공주마마, 통촉하여 주옵소서. 소인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나이다."
영희는 철수의 장난스러운 말에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맞짱구쳤다.
"호호호... 알겠노라. 하지만 지금 말해봤자 소용없으니 공부나 열심히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소신 철수, 공주님의 말씀 명심하겠나이다."
"호호호... 그럼 됐다. 이만 끊을까?"
"글쎄, 난 상관없는데......"
"아니야, 그만하자. 나도 조금 피곤하고, 너도 공부해야 되고."
철수는 영희의 목소리가 밝아진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알았어. 그럼, 편히 쉬어."
"너도 편히 쉬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알았어요, 공주님."
"잘 있어."
"너도."
"끊는다."
"어."
영희는 전화를 끊은 후 생각했다.
'철수하고 통화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지네. 전화하기를 잘했어. 내가 철수의 시간을 조금 뺐었지만,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했으니 더 열심히 할 거야.'
영희는 철수와의 통화 후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피곤해 침대에 누운 채 철수와의 기분 좋은 통화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영희는 문득 철수와 희성 중 누가 자신을 더 사랑할까 생각해보았다.
'철수와 희성이, 둘 중 누가 나를 더 사랑할까? 철수겠지? 그럴 거야.'
영희는 비록 희성이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해도 얼마가지 않아 희성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성이에겐 두살 어린 여동생 혜정이 있는데, 항상 영희가 희성과 만날 때 어긋장을 놓았었다.
희성은 영희와 놀러갈 때 혜정을 자주 데려갔는데, 혜정은 영희와 희성이 한창 재미있게 놀면 집에 가겠다고 해서 분위기를 깨곤 했었다.
희성은 여동생 혼자 집에 가도록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동생이 집에 가겠다고 하면 영희에게 그만 돌아가자 했었다.
영희는 한창 재미있게 놀 때마다 훼방꾼 역활을 했던 혜정이 얄미웠다.
'혜정아, 왜 그랬니? 내가 니 오빠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싫었니?'
영희는 혜정이 질투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혜정이라고 해도 그렇게 멋진 오빠가 다른 여자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싫었을지 모르지. 여자 마음은 나 자신도 모르겠어.'
영희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이 되서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