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가 잠에서 깨어 보니 아침 10시가 넘었다.
'철수는 지금쯤 보충수업을 하고 있겠지. 근데, 나는 아직 자고 있었구나. 철수야, 어제 사실대로 말해주지 못해 미안해.'
영희는 철수에게 희성을 만난 사실을 말하지 않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찾아간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말하면 희성이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철수에게도 좋지 않고.'
아침식사 후 피아노 학원에 간 영희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차례대로 연주했다.
영희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쳤지만, 지금은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에서 희성이와 함께 피아노를 쳤던 추억이 떠올라 오히려 마음이 더 산란해졌다.
영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희성이와 친하게 지낸 것도 지금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함께 다녔기 때문이었다.
희성은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
음악 시간이 되면 때로는 희성이, 때로는 영희가 음악 선생님을 대신해 피아노를 쳤는데, 영희의 반 친구들은 희성이가 더 잘친다고 말할 정도로 희성이의 피아노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영희는 갑자기 6년 전, 피아노 학원에서 희성이와 함께 가요를 번갈아 치며 듀엣으로 불렀던 일이 기억났다.
어느 여름방학 날이었다.
영희는 아침 일찍 피아노 학원에 갔는데, 희성이만 있었다.
그때 희성이는 가요의 악보를 보면서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연주했다.
연인들의 슬픈 이별을 노래한 가요였다.
가사의 슬픈 내용이 마음에 와닿아 영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연주를 마친 희성은 영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 물었다.
"영희야, 너 울었니?"
"아니, 운게 아니라......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어서......"
"아이참, 여자들은 도대체, 노래듣고 왜 우는지 모르겠어."
영희는 희성이 '여자들'이라 말하자 자신 이외 누가 울었는지 궁금해졌다.
"나 말고 누가 울었는데? 니 여동생 혜정이?"
"어. 어제 집에서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랬구나. 근데, 난 운게 아니야. 그냥......"
영희는 애써 울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럼,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거니?"
희성은 영희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고 농담한 것이다.
영희는 고마운 생각이 들어 미소를 지어보였다.
희성은 자신이 영희를 울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가요를 치기 시작했다.
"영희야, 이거 같이 불러보자. 내 여동생하고 자주 부르는 건데......"
영희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희성은 피아노를 치면서도 노래를 잘 불렀다.
영희도 악보를 보면서 희성이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영희는 희성과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노래가 끝나자 희성이 물었다.
"어때? 기분이 조금 낫니?"
"어. 좋아졌어."
영희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른 적이 거의 없었는데, 희성이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까지 잘 부르자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너, 참 잘 치는구나. 난 노래하면서 피아노 못 치겠던데......"
"잘하긴...... 이 노래하고 그 노래만 잘 쳐. 내가 좋아해서 자주 쳐서...... 너도 여러 번 치면 눈감고도 칠 수 있을 거야."
영희는 희성이 자신을 웃기려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웃었다.
"호호호... 눈감고 어떻게 치니?"
"왜 못쳐? 난 눈감고 칠 수 있는데?"
"진짜?"
"진짜. 내기 할래?"
영희는 희성이 자신있게 말하자 호기심이 생겼다.
"내기? 좋아. 뭘로 할까?"
"날씨도 더운데, 아이스크림 사주기 어때?"
"좋아."
희성은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눈을 감고 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영희는 희성이 자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기 위해 내기를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성이 장난스런 톤으로 말했다.
"이상하다. 오늘따라 왜 안 돼지? 어제 꿈에서는 잘 쳤는데......"
"꿈에서는 잘 쳤다고? 너 꿈꾸다 왔니? 호호호......"
영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희성이 기다리라 손짓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아이스크림 사올게."
"아냐, 희성아. 난 괜찮아."
"괜찮아도 먹어. 안 먹으면, 알지?"
희성이는 영희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
영희는 희성이 나간 사이 희성이와 듀엣으로 부른 가요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서 영희도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영희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르고 있을 때 희성이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와 영희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해서 영희와 희성은 다시 듀엣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번에는 영희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영희는 사랑을 노래한 가요를 희성과 함께 부르자 왠지 모르게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불렀을 때도 미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지금의 감정은 그때보다 더 이상야릇하고 미묘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손이 덜덜 떨려 영희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었다.
영희가 연주를 중단하자 희성이 말했다.
"그만하고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녹겠다."
영희는 희성의 '우리'라는 말에 어쩐지 가슴이 설레었다.
희성이는 사온 아이스크림 하나를 영희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희성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영희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 다시 피아노에 앉아 조금 전에 희성이와 함께 부른 듀엣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희성이는 영희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자 옆에서 따라 불렀다.
희성이와 영희는 마치 예전에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조화롭게 잘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희성이의 여동생 혜정이였다.
혜정이는 초등학교 4학년으로 희성이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피아노 실력은 영희나 희성이보다 훨씬 앞섰다.
혜정이는 손짓으로 영희에게 비켜 달라는 싸인을 보냈다.
영희는 자신보다 어린 혜정이 손짓으로 비켜 달라는 싸인을 보내자 기분이 나빴지만, 혜정이 가요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호기심에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혜정이는 영희가 방금 전 연주한 듀엣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혜정이의 연주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희성이 혜정이의 연주에 맞춰 노래 부르자 혜정이는 영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영희는 그제서야 혜정이 노래부르라는 싸인을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짝짝짝......
듀엣곡이 끝나자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이었다.
"누가 이렇게 피아노를 잘 치나 했더니 혜정이로군. 희성아, 니 동생이 너보다 열 배는 잘 치는구나. 니 동생 피아노 칠 때 넌 뭐했니?"
"전 노래 불렀어요. 그래서 노래는 제가 더 잘 불러요."
"그래? 호호호......"
영희는 선생님의 말을 통해 혜정이 자신보다 피아노를 훨씬 더 잘 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혜정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집에서 개인 레슨을 받고 있어 영희가 혜정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본 것은 1년만이었다.
"혜정아, 이제 가요는 그만 치고, 그동안 배운 클래식 하나 쳐봐라. 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
"네."
혜정이는 피아노 악보를 넘긴 후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영희가 혜정이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보니 확실히 자신보다 더 잘 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희는 4학년 밖에 되지 않은 혜정이 자신보다 피아노를 더 잘 치자 은근히 질투심이 생겼다.
'얘는 피아노만 치고 사나? 이제 겨우 사학년인데 나보다 훨씬 잘 치네.'
혜정이 연주를 마치자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옆에 있는 미술학원의 선생님이었다.
"혜정이왔구나. 오랜만이네. 혜정이가 피아노 치는 소리는 확실히 달라서 들으면 알 수 있지. 호호호......"
영희는 두 선생님이 혜정이만 칭찬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음악 선생님은 이러한 영희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우리 영희도 참 잘쳐요."
영희는 음악 선생님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음악 선생님은 지갑에서 돈을 꺼낸 후 희성이에게 말했다.
"희성아, 니가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라."
"제가 사올 게요."
영희는 기분이 좋지 않아 바람이나 쐬고 오고 싶은 마음에 자청한 것이다.
음악 선생님은 영희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아 희성에게 영희를 따라 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영희야!"
영희는 희성이 자신을 따라오자 미소를 띠며 물었다.
"너도 가니?"
"어."
"왜?"
"왜긴? 니가 울까봐 따라왔는데......"
"내가? 왜?"
"넌 원래 울보잖아."
"울보? 나 울보 아니거든."
"아니긴, 아까는 왜 울었는데?"
"아까는...... 운게 아니라니까......"
"운게 아니면, 웃은 거야?"
희성이는 영희는 웃기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를 했다.
"너를 보면, 울보인 평강공주가 왜 바보 온달한테 시집갔는지 알겠다."
"왜 갔는데?"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은 상극이거든. 바보 온달은 우습게 생겨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을 보면 우스워서 울 수 없을 테니...... 바보 온달한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던 거겠지."
"듣고 보니 그렇네. 호호호......"
영희는 조금전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희성의 유머를 듣자 기분이 좋아졌다.
영희는 아이스크림을 산 후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얻어먹네. 하나는 네가 사준 거고, 이건 혜정이 덕분이니...... 오늘 내가 너희 남매 덕을 많이 보네. 다음에는 내가 살게."
"글쎄...... 내 여동생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사주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희성이의 말에 영희는 조금 토라졌다.
"그래? 싫으면, 할 수 없구."
"싫다기 보다는...... 부담스럽게 생각해서 그런 거지. 혜정이는 착해. 내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
영희는 문득 자신의 여동생을 착하다고 말하는 오빠를 가진 혜정이 부러웠다.
영희가 미소를 지었다.
"혜정이는 좋겠다. 오빠가 있어서...... 나도 오빠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니 오빠 되줄까? 내 생일이 니 생일보다 반 년이나 빠르잖아."
영희는 '좋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희성이의 말이 농담일거라는 생각에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여동생이 둘이나 되면 힘들지 않을까?"
"맞아. 사실 난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누나 되줄까?"
방금전에 희성이 오빠가 되어주겠다는 말을 따라한 것이지만, 영희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누나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성이의 말에 영희는 정말 누나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희성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좋아."
영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날 누나라 불러봐."
희성이 장난삼아 영희를 누나라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오빠!"
혜정이 바로 영희의 뒤에서 희성이를 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