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성이는 혜정이를 보자 의아해 물었다.
"여긴 왜 왔니? 기다리지."
"기다리기 지루해서......"
늘 이런 식이었다.
혜정이는 영희가 희성이와 함께 있으면 꼭 어긋장을 놓곤 했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어긋장을 놓은 것이다.
영희는 혜정이 얄미웠지만, 애써 미소를 띤 채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혜정이는 싫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희성이 다른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럼, 이거 먹을래?"
혜정이는 희성이 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며 그제서야 영희에게 말했다.
"전 이거 먹을 게요."
그러고는 희성이를 재촉했다.
"오빠, 어서 가자."
혜정이 재촉하자 희성이는 영희에게 빨리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희성이는 영희에게 혜정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고 했지만, 영희가 보기엔 희성이 혜정이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았다.
'웃기는 남매야. 누가 오빠고 누가 여동생인지 모르겠네.'
영희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희성이는 어느새 혜정이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좀 기다려주지.'
영희는 희성이 기다려 주지 않고 먼저 가버리자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혜정이는 오빠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하기야 나도 저렇게 멋진 오빠가 있으면 많이 사랑하겠지.'
영희는 혜정이 항상 자신과 희성과의 사이에서 어긋장을 놓는 것도 결국은 오빠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이때 영희는 희성이의 여자친구가 되기를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영희는 이런 다짐을 했었다.
'희성이처럼 여동생이 있는 사람은 사귀지 말아야겠어.'
갑자기 6년 전에 희성이와 함께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추억이 떠오른 영희는 희성이 그 시절 쳤던 가요를 치기 시작했다.
가요의 가사는 영원한 사랑을 노래했지만, 피아노 소리는 어느때보다 슬프게 들렸다.
짝짝짝......
누군가의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희성이의 여동생 혜정이였다.
"영희 언니, 정말 훌륭해요."
혜정이는 이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않은지 오래였기 때문에 영희는 갑작스러운 혜정이의 출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혜정아, 니가 여긴 웬일이니?"
"저, 오늘부터 여기 다녀요. 선생님 안 계세요?"
"잠깐 나가셨는데."
"언제 오세요?"
"좀 있으면 오실거야."
'혜정이 내가 희성이를 만난 일을 알고 온 것일까?'
영희는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정이 이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면 앞으로 희성이와 계속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성이는 여전히 자신의 좋은 친구라는 생각에 그렇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영희는 혜정의 피아노 실력이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해 혜정에게 피아노 자리를 양보했다.
"혜정아, 선생님 오시기 전에 하나 쳐봐.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들어보자."
"네."
혜정은 피아노 자리에 앉아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했다.
영희가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좋아하는 것처럼 혜정은 베토벤의 '월광'을 좋아했다.
영희가 마지막으로 혜정이 '월광'을 치는 것을 들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였는데, 혜정의 피아노 연주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 있었다.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피아노를 치는 혜정이를 보자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소리에 심취하게 되었다.
짝짝짝......
혜정이 피아노 연주를 마치자 어느새 와 있던 피아노 선생님과 미술 선생님이 동시에 박수를 친 것이다.
미술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정이가 왔구나. 오랜만이네. 넌 어쩜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니?"
영희 역시 혜정이의 피아노 연주에 감탄하고 있던 터라 미술 선생님의 말에 호응하듯 박수를 쳤다.
짝짝짝......
피아노 선생님은 박수를 치는 영희의 기분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 것 같아 미술 선생님에게 말했다.
"우리 영희도 잘쳐요. 혜정이는 모짜르트처럼 천재 스타일이고, 영희는 베토벤처럼 대기만성 스타일이예요. 지금은 혜정이가 더 잘치지만, 앞으로는 누가 더 잘 칠지 모른다니까......"
미술 선생님은 혜정이만 칭찬한 자신의 말이 영희에게 상처를 주었나 싶어 영희를 보면서 말했다.
"영희야, 나중에 유명해지면 사인 부탁한다. 알았지?"
영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인은 혜정이한테 받으세요. 혜정이는 정말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될 거예요."
"아니예요. 영희 언니가 더 유명해지실 거예요. 지금도 유명하시고요."
혜정의 말에 영희는 깜짝 놀랐다.
'얘가 내가 파티에서 피아노 친 걸 아나 보네!'
"벌써 유명해졌니?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 선생님, 전 이만 가볼게요."
미술 선생님은 바쁜 일이 있는지 피아노 선생님에게 인사한 후 가버렸다.
피아노 선생님은 영희가 지금도 유명하다는 혜정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영희가 벌써 유명해졌어? 방송국에 나왔니?"
"그게 아니라......"
영희는 혜정에게 말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다.
"영희 언니는 원래 유명하세요."
혜정이 얼버무리자 피아노 선생님이 물었다.
"혜정아, 여긴 웬일이니?"
"저, 여기서 다시 레슨 받으려고요."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라. 영희 먼저 해주고......"
"네, 전 옆에서 듣고 있을 게요."
영희는 혜정이 자신이 치는 것을 구경하는 것보다 자신이 혜정이 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피아노 선생님에게 말했다.
"혜정이 먼저 해주세요. 전 혜정이가 치는 걸 좀 볼게요."
"아니예요, 영희 언니가 먼저 하세요. 순서대로 해야지요."
영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레슨을 받았다.
영희의 레슨이 끝나자 혜정이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영희는 혜정이 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혜정이는 슬픈 곡을 칠 때는 표정이 어두웠다가 경쾌한 곡을 칠 때는 표정이 밝아졌다가 곡에 따라 표정이 변했는데, 마치 자신의 감정을 피아노에 이입시키는 것 같았다.
'나도 혜정이처럼 피아노에 감정을 이입시켜야 하는데......'
혜정이의 레슨이 끝나자 영희는 가방을 들고 먼저 학원을 나왔는데, 혜정이 뒤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영희 언니, 같이 가요. 우리 같은 방향이잖아요."
영희는 희성이와 마주 칠까봐 혜정이를 따돌릴 생각이었다.
"혜정아, 난 볼일이 있어. 그러니 너 먼저 가."
"기다리면 안 되요? 무슨 볼일이 있는데요?"
"알아서 뭐하려고......"
"언니하고 같이 가려고요."
영희는 계속 같이 가겠다는 혜정이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얘는 나하고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왜 이러지? 어제 오빠가 나한테 온 걸 알고 이러나? 뭔가 수상쩍어......'
영희는 혜정이를 따돌리기 위해 말했다.
"난 책 살게 있는데, 뭘 살지 모르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러니 너 먼저 가."
"저도 책 살게 있는데, 같이 가도 되요?"
영희는 혜정이 끈덕지게 같이 가겠다고 하자 어쩔 수 없었다.
"좋아."
영희는 혜정이와 책방에 들어갔지만, 책방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혜정이에게 말했다.
"논술에 도움되는 책 하나 사려 했는데,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좀 알아보고 다시 와야겠어. 가자."
애초부터 영희는 혜정이를 따돌리기 위해 책사러 가겠다 한 것이라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혜정은 의아한 얼굴로 영희에게 물었다.
"언니는 수능 안 보면 논술도 안 봐도 되는 거 아니예요?"
영희는 할말이 없어 둘러댔다.
"친구 사주려고......"
"친구요? 남자요?"
영희는 혜정이의 계속 되는 질문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니? 남자던 여자던...... 니가 사줄 것도 아니면서......"
영희의 직설적인 말에 민망해진 혜정은 딴 청을 부렸다.
"저도 오빠 하나 사주려고요."
"나도 뭘 살지 모르겠어."
"나중에 사면 가르쳐 주세요."
영희는 혜정이를 따돌리기 위해서 책방에 온 것인데 따돌릴 방법이 없자 할 수 없이 혜정이와 함께 집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만 가자. 책은 나중에 사야겠다."
"좋아요, 언니."
영희는 혜정이와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자 혜정이 영희에게 말했다.
"언니, 요즘 공부하느라 바쁘시지요?"
"아니, 난 유학 준비하고 있어서 수능을 안 보니까 그렇게 바쁘지 않아. 중간, 기말 시험 때가 아니면, 난 고삼이 아닌 기분이 들어."
"바쁘지 않은 게 좋지요. 저도 지금은 고일이라 시간이 조금 있는데, 앞으로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영희는 갑자기 혜정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겨 물었다.
"넌 유학 안 가니?"
"글쎄요. 전 대학에 먼저 간 다음에 유학갈 생각이예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별로 유학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요."
"다들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유학가야한다 하던데......"
영희의 말에 반박하듯 혜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전 피아니스트보다는 교수가 되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많이 쳤더니 이젠 질리려고 해서요."
영희는 혜정이의 솔직한 말에 자신도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니? 나도 포기 할까보다...... 여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 잘가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혜정은 포기하지 말라는 듯 영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그냥 계속 하세요. 저도 사실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예요. 요즘 지쳐서 포기할까 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여 영희와 혜정은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혜정이 영희에게 인사했다.
"언니, 내일 또 뵈요."
"그래, 내일 보자."
혜정은 영희에게 인사한 후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갔다.
영희는 혜정이와 헤어지자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혜정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딴판으로 달라졌어. 예전 같으면 같이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왜 저러지? 어제 내가 희성이를 만난 걸 아는 걸까?'
영희는 혜정이의 변한 태도가 의심스러웠지만, 희성이와는 앞으로도 친구로 지내기로 결심했기에 혜정이와 친하게 지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혜정이와 친하게 지내도 안 될 건 없지만 나중에 또 엮이거나 꼬이지 않을까? 아니야, 혜정이가 예전과 달라졌어. 게다가 방학이 지나면 혜정이도 만나기 힘들 테니까......'
이날 이후부터 영희는 피아노 학원에서 혜정이와 자주 마주쳤다.
영희는 자신보다 피아노를 훨씬 잘치는 혜정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혜정이도 영희가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 옆에서 지켜보면서 둘은 학원에서 항상 같이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연히 마주쳤지만, 이제는 서로 언제 오는지 물어볼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