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혜정이 피아노 레슨을 마친 영희에게 말했다.
"언니, 오늘 책방에 같이 가요. 저 책 살게 있어요. 논술에 도움되는 책을 오빠한테 선물하려고요."
"좋아, 나도 갈게."
영희도 철수에게 논술에 도움되는 책을 하나 선물하고 싶었지만, 어떤 책을 사주는 것이 좋을지 몰라 선물하지 못했었다.
혜정은 책방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를 골랐다.
영희는 혜정이 들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좋니? 나도 사야 되겠다."
"언니는 수능 안 보면서 왜요?"
"나도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남자친구요?"
혜정의 질문에 당황한 영희는 대답하기 곤란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니가 알아서 뭐하게?"
"말하지 못하시는 걸 보니...... 남자친구 맞는 거 같네요."
'얘가 뭔가 아는 거 같은데, 희성이가 혜정이한테 얘기했나?'
당황해하는 영희를 보자 혜정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호호... 언니가 철수 오빠 만나는 거 저도 오빠도 다 아는데 왜 그렇게 당황하시는지...'
영희는 혜정이 조금 예의없다는 생각이 들어 혜정을 장난스럽게 살짝 때리며 말했다.
"너 까불지마. 언니한테 혼난다."
"언니두...... 남자친구있는 게 뭐 그리 비밀이라고 그러세요."
"몰라."
영희가 혜정이 고른 책을 사려 하자 혜정이 말했다.
"이거 지금 하나씩 밖에 없어요. 하나씩 살래요?"
"니가 괜찮다면......"
"어차피 두 권 다 볼 시간 없을 거예요. 오빠가 보면 제가 언니에게 빌려드릴게요."
"글쎄......"
"언니는 동물농장 가져가세요. 저는 일구팔사 살게요. 어차피 지금 당장 볼 일은 없을 테니, 일단 오늘은 하나씩 사요."
"그래, 그러자."
영희와 혜정은 책을 한권씩 산 후 책방을 나갔다.
책방을 나서자 혜정이 영희에게 말했다.
"언니, 전 오늘이 마지막 레슨 날이예요. 그동안 언니하고 함께 레슨 받아서 정말 좋았어요."
"나도 그래."
혜정이 잠시 주저하다가 영희에게 말했다.
"언니, 지금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나요?"
"좋아. 커피숍으로 가자."
영희는 혜정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혜정은 자리에 앉자 영희에게 말했다.
"언니는 유학가면 언제 오세요?"
"글쎄... 나도 지금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사오년은 걸리겠지."
"오년이라...... 오년은 십년의 절반이네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때면 언니도 저도 많이 변해있겠지요?"
"뭐 그렇겠지......"
"언니가 가면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그래."
혜정은 잠시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말했다.
"오빠도 언니를 많이 보고 싶어할 거예요."
영희는 혜정이 희성이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하며 쏘아붙이듯 물었다.
"너, 니 오빠 얘기하려고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한 거니?"
"꼭 그런 건 아닌데요......"
영희는 희성의 고백을 거절한 후 혜정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수상쩍었는데, 혜정이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혜정이 오빠와 자신의 일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혜정의 말을 듣자 혜정이 자신이 희성이의 고백을 거절했던 일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혜정이 의기소침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영희는 혜정이 오빠의 일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 혜정에게 솔직히 말했다.
"니 오빠와 난 아마도 인연이 아닌 것 같아."
혜정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되물었다.
"인연이란 본인이 하기 나름 아닐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이미 난 남자친구가 있어."
"철수 오빠요?"
영희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지?"
"언니가 철수 오빠와 식당에서 같이 있는 걸 제 친구가 봐서요."
"누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중요한 거지?"
"중요한 건...... 언니, 정말 철수 오빠 좋아하세요?"
영희는 혜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영희는 마치 혜정이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커피만 계속 마셔댔다.
혜정은 자신의 질문이 영희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 죄송해요. 전......"
한동안 침묵하던 영희가 커피잔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야. 말해줄게. 그래, 난 철수 정말 좋아해. 이제 됐니?"
"오빠는요......"
"우린...... 그냥 친구일뿐이야."
"하지만...... 언니도 오빠를...... 많이 좋아했잖아요......"
심기가 불편해진 영희는 그만 이야기하자는 듯 손을 들어 혜정의 말을 잘랐다.
"혜정아, 그만하자. 나 좀 피곤한데....... 다른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자."
영희는 혜정이 또 심난한 이야기를 꺼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난 이만 가볼게."
영희가 자리를 뜨려하자 혜정이 손을 들며 영희를 불러 세웠다.
"언니, 잠깐만요."
영희가 왜 그러냐 물어보려는 순간, 혜정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언니, 전 언니가 오빠 좋아했던 거 알아요. 오빠도 언니 많이 좋아했어요. 근데...... 오빠는 대학 들어간 후에...... 언니에게 연락하려고...... 오빠는 언니가 유학가는 줄도 모르고 대학 가면 연락하려 했어요......"
혜정이 눈물을 흘리자 영희는 다시 자리에 앉아 손수건을 꺼내 혜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혜정아, 울지마. 니 말이 끌나기 전에는 가지 않을게.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
혜정은 영희에게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후 말했다.
"언니, 제가 참견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알지만...... 오빠는 언니가 유학가는 걸 몰라서......"
영희는 혜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혜정은 희성이 영희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영희도 희성에게 자신이 유학가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은...... 희성이에게 알려주려 했는데...... 내가 희성이에게 전화할 때마다 집에 없어서...... 자꾸 전화하기도 그렇고 해서...... 철수한테 희성이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했었는데......"
"그때 오빠는 학원에 다니느라 매일 밤늦게 들어와서 전화를 못했어요. 그때 우리 어머니가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인 줄 모르셔서...... 오빠한테 언니가 전화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영희는 이제서야 희성이 연락하지 않은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희는 유학을 결심한 후 희성에게 알려주려고 여러 차례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은 희성의 어머니가 연락해달라는 영희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결국 영희는 철수에게 희성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지만, 그때도 희성의 어머니가 영희에게 연락하려면 대학에 들어가서 연락하라 해서 연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희가 침묵하는 가운데, 혜정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오빠가 학원다니느라 바쁜데 언니를 만나면 공부에 방해될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오빠가 언니한테 전화하려 할 때 어머니가 '너 영희한테 전화하니?'하시며 전화를 못하게 하셨어요. 연락하려면 대학에 들어가 연락하라 하셨어요. 그래서 일이 이렇게 꼬인 것 같아요."
혜정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영희는 머리가 멍해졌다.
영희는 이러한 희성의 사연은 생각지도 못하고 희성이 연락하지 않자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연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상처 받았다.
결국에는 크리스마스에 감동적인 편지를 주었던 철수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이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영희는 희성이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난 몰랐어......"
혜정이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언니가 유학가는 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영희도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진작부터 친했다면 좋았을 텐데...... 네 어머니께서 내가 전화하는 걸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더 연락 못했어."
"언니, 죄송해요. 저도 예전부터 언니하고 친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영희는 예전부터 친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혜정의 말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게 말이야...... 니 오빠와 난 인연이 아닌가봐......"
영희는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인연이 아니라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혜정이 반박하듯 말했다.
"인연이란...... 자기 의지에 달린 게 아닐까요......"
혜정의 말에 영희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어."
"언니...... 철수 오빠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영희는 혜정의 말에 침묵했다.
혜정은 영희에게 오빠의 자세한 사정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희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 영희의 마음이 이미 철수에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희는 이제까지 희성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에게 연락해 달라는 철수의 전화를 받고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희성이 어머니 때문에 연락하지 못했다는 혜정의 설명을 듣자 희성에게 연민을 느꼈다.
아니,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영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희성이를 정말 좋아했었다.
알고 보면 영희와 희성이는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서로 표현하지 않아 둘 다 모르고 6년이란 오랜 세월을 흘려 보냈다.
영희는 희성이를 정말 좋아했지만 희성이는 몰랐고, 희성이도 영희를 정말 좋아했지만 영희도 몰랐다.
영희와 희성이는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몰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들어 했다.
영희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희성아, 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랐니? 왜 그렇게 눈치가 없었니? 지난 육년 동안 난 정말 외로웠는데...... 니가 그리웠는데...... 왜 내 마음도 모르고 연락 안 했니? 바보......'
영희는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영희는 혜정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희는 혜정에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혜정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영희가 아직도 자신의 오빠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영희는 눈물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려 했지만, 영희의 손수건은 방금 전 혜정에게 주었기 때문에 손수건을 넣어 두었던 영희의 주머니엔 손수건이 없었다.
혜정은 영희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영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후 말했다.
"혜정아, 나 이만 가볼게. 나중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