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영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 밖으로 나가버렸다.
"언니!"
혜정이 영희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 하자 종업원이 손을 들며 외쳤다.
"잠깐만요! 학생!"
혜정은 이제서야 커피값을 내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지갑을 꺼내 계산했다.
"죄송해요......"
"뭘요. 다음에 또 오세요."
영희가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뛰어가는 것을 본 혜정은 뛰어서 버스 정류장에 갔지만, 영희는 없었다.
'벌써 버스가 와서 언니가 타고 간 것일까? 언니를 따라가야돼. 내가 괜히 지난 이야기를 꺼내서 언니가...... 언니는 지금 울고 있을지도 몰라.'
혜정은 영희가 어디선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혜정이 손으로 눈물을 닦는 사이에 버스가 막 도착했다.
"잠깐만요!"
버스가 떠나려 하자 혜정이 손을 들며 외쳤다.
버스에 탄 혜정은 자리에 앉은 후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바로 이때 혜정은 공원 벤치에서 울고 있는 영희를 보았다.
영희는 계속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커피숍을 뛰쳐나와 공원으로 간 것이다.
혜정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후 영희가 앉아있는 벤치로 달려갔다.
혜정은 벤치에 앉아 훌쩍거리며 우는 영희에게 말없이 다가갔다.
영희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은 후 고개를 들었다.
혜정은 영희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내가 여기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니?"
"버스타고 오다가 언니 봤어요."
"혜정아......"
영희는 할 말이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언니, 말씀해 보세요."
"바쁘지 않니? 난 괜찮은데....."
"저, 바쁘지 않아요. 방학인데요."
영희는 혜정이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벤치에서 일어났다.
"혜정아, 나 이만 가봐야 되겠어. 너도 집에 가는 길이면, 같이 갈래?"
"좋아요, 언니."
영희와 혜정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10여 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자 영희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우리, 걸어갈까?"
"네, 좋아요."
혜정은 '우리'라는 영희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진작부터 친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영희와 혜정은 오랫동안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지만, 예전에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영희는 자신보다 피아노를 훨씬 잘치는 혜정에게 질투심을 느꼈고, 혜정은 오빠와 친하게 지내는 영희에게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단짝처럼 붙어 집으로 걸어갔다.
혜정이 영희와 걸어가던 중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제 언니였으면 좋겠어요."
"정말? 나도 니가 내 동생이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걸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언니와 전 통하는 게 많은 거 같아요. 피아노 치는 것도 그렇고......"
"그래, 우린 정말 통하는 게 많은 거 같아."
"정말 그래요, 언니, 우린 정말 잘 통하는 거 같아요."
영희는 햇살처럼 밝게 미소짓는 혜정을 바라보았다.
혜정의 미소는 햇살처럼 밝았지만, 혜정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혜정은 한편으로는 영희와 친해져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빠가 좋아하는 영희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우울했다.
영희의 기분을 생각해서 애써 밝게 미소지으려고 했지만, 마음속은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차 마음속에 있는 우울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났다.
영희는 혜정의 우울한 얼굴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혜정아, 니 오빠는 워낙에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니까...... 대학교에 가면......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테니, 오빠 걱정은 그만해."
혜정이 영희를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전 언니가 더 걱정되요."
"내가? 내가 왜?"
"그걸 몰라서 물어요? 언니, 전 알아요. 언니가 오빠 아직도 못 잊고 있는 거."
영희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혜정아, 그만, 난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제발 그만해."
"죄송해요......"
영희는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혜정아, 난 철수와 헤어지는 거 생각해본 적 없어. 이제 더 이상 니 오빠 얘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희성이와 난 이제 친구일 뿐이야."
영희는 혜정에게 희성이를 잊은 것처럼 말했지만, 희성이의 본심도 모르는 상태에서 희성에 대한 미련을 버렸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했다.
'겨울방학 때 희성이한테 전화라도 걸어봤으면 되었을 텐데......'
혜정은 영희가 고개를 흔들자 아직도 오빠를 잊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본다고 해서 잘못될 건 없잖아요."
혜정에게 할 말이 생겨 걸음을 멈춘 영희는 한숨을 내쉰 후 도로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혜정이 영희의 옆에 앉은 후 다시 말했다.
"언니, 한번 만이라도 생각해 보세요."
영희는 혜정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생각해본다고 잘못될 건 없겠지. 하지만...... 철수에게 미안하잖아. 여자친구가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겠니? 난 철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혜정은 철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영희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영희 언니가 우리 오빠 만나고 내가 철수 오빠 만나면 딱 좋은데......'
혜정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말 할 수는 없었다.
영희가 혜정의 손을 잡았다.
"혜정아, 오빠를 생각하는 니 마음은 잘 알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오빠 얘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혜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알겠어요. 제가 주제 넘게 남의 일에 간섭해서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긴...... 우린 남이 아니잖아. 그치?"
"맞아요. 우린 남이 아니예요. 하지만......"
"하지만, 뭐야?"
"오빠가 아직 언니를 못 잊었으니, 당분간 언니와 만나거나 연락하는 건 조심해야 될 거 같아요."
"그래, 알겠어. 나 핸드폰 있는데...... 번호 가르쳐 줄까?"
"네, 가르쳐 주세요."
"011 - 125 - 0202."
"뒷번호가 영이영이요? 뒷번호가 언니 이름하고 비슷하네요."
"응, 앞번호는 내 생일이야. 정말 운이 좋게 이 번호가 남아있었어."
혜정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밝게 미소지었다.
"언니 남자친구가 아무리 바보라도 언니 생일은 잊어 먹지 않겠네요."
혜정은 철수가 바보라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철수 오빠는 바보예요. 제가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영희 언니한테 고백했으니 바보죠, 뭐.'
영희는 왠지 혜정이 철수를 바보라 하는 것 같아 미소지었다.
"말이 왜 그래? 꼭 철수가 바보라는 말 같아."
혜정은 영희한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해본 소리예요. 언니, 저 이만 집에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같이 가실래요?"
"그래, 같이 가자."
영희와 혜정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벤치에서 일어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혜정은 영희의 집까지 따라왔다.
영희는 혜정에게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혜정아, 잠시 들어와 차라도 한잔 하고 갈래?"
"언니,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전 이제 가봐야 될 거 같아요."
"그래, 내일 보자."
혜정은 갑자기 슬픈 얼굴로 영희를 바라보았다.
"언니... 저, 내일부터 학원에 안 가요. 오늘로 레슨 끝났어요."
"그러니? 그럼 할 수 없지.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네, 미국에 가시기 전에 언제 한번 뵈요."
영희는 '한번'이라는 혜정의 말에서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물었다.
"한번? 우리 자주 만나면 안되는 거니?"
혜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될건 없지만...... 그렇게 자주 만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자주 만나면 오빠가 언니 생각날까 걱정되서요."
영희는 그동안 혜정에게 정이 들었는데 앞으로 자주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혜정이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 저도 언니 자주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닌 것 같아요. 오빠, 지금도 언니 많이 생각해요. 오빠는... 언니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영희가 혜정의 손을 잡았다.
"혜정아,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예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오빠와 언니는 인연이 아닌가 봐요."
"혜정아,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마워."
"고맙긴요...... 언니, 우리...... 아마도 언젠가는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오빠가 언니를 잊고 새로운 인연을 찾으면요. 그때는 우리,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혜정아. 앞으로 우린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영희와 혜정은 마치 이산가족이 수십년 만에 만난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집에 돌아온 영희는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희일 거야!'
철수는 전화벨이 울리자 번개처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지금 뭐해? 공부하고 있었지?"
철수는 영희의 질문에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사실은 나, 니 생각하고 있었어."
"정말?"
"응, 정말 니 생각하고 있었어."
영희는 철수가 자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자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철수가 공부는 안 하고 자기 생각을 했다는 말에 걱정이 되었다.
"내 생각해줘서 고맙긴 한데, 고삼이 공부는 안 하고 딴 생각하면 어떻게?"
"사실은...... 니 생각하면서 공부했어. 널 실망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난 니 생각하면 공부가 더 잘 되더라. 그래서 난 공부할 때 니 생각하면서 해.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하면서 공부하면 잘 되니?"
"니 생각만 하면 힘이 나서 공부가 더 잘되는 걸."
"진짜?"
"당연히 진짜지. 왜, 못 믿겠어?"
"아니야, 그러면 다행이구. 근데, 철수야, 수능 준비는 잘 되가니? 이제 백여 일도 안 남았잖아."
"응, 니 덕분에 잘 되고 있어."
"왜 내 덕분이야?"
"널 만난 후부터 이상할 정도로 공부도 잘되고, 성적도 올라가고 그러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내가 자주 널 불러내서 공부하는데 방해되지 않나 걱정 좀 했었는데......"
"영희야, 걱정마. 나 너랑 사귄 후에 성적 많이 올라간 거 너도 잘 알잖아."
"아무튼 다행이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래. 내가 널 응원할게."
"정말 고마워, 영희야."
"고맙긴, 그 정도 가지고......"
이때 영희의 집 초인종이 '띵동'하고 울렸다.
영희의 아버지가 온 것이다.
"철수야, 미안하지만 이만 끊자. 아버지가 오셨어. 아버지는 아직 우리 만나는거 모르셔서 조심해야 돼."
"어, 알았어. 영희야, 잘 있어."
"응, 안녕. 잘 있어."
전화를 끊은 영희는 침대에 누운 채 오늘 혜정이 했던 말들을 되새겨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진작에 혜정이와 친하게 지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이런 어긋장도 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어. 전화 한 통만 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어긋장이 나서 철수와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고 운명이 아닐까? 내 마음속에서 철수와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들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걸.'
이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희성이."
"아, 웬일이니?"
"영희야, 혜정이 때문에 할 말이 있어 그러는데... 잠깐 만나 이야기 좀 할 수 있니?"
희성이 갑자기 전화한 것도, 만나자는 것도 왠지 이상했지만, 영희는 대뜸 대답했다.
"좋아, 어디서?"
"우리 아파트 상가 커피숍에서 만날래?"
"알았어. 언제?"
"난 언제든 상관없어. 넌 언제가 좋겠니?"
영희는 희성이 만나자는 이유가 궁금해 가급적 빨리 만나고 싶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희성이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희성아, 그럼 십분 후에 커피숍에서 만나자."
"좋아, 좀 이따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