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화장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손질했다.
'희성이를 만나면 왜 이렇게 신경쓰이지?'
영희는 평소보다 신경써 차려입고 희성이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으로 냅다 달려갔다.
영희가 커피숍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희성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희성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영희가 코앞에 온 것도 모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영희는 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희성아, 그동안 잘 지냈니?"
희성은 그제서야 영희를 쳐다보며 인사했다.
"영희야, 왔구나. 너도 그동안 잘 지냈니?"
영희는 왠지 우울해 보이는 희성에게 밝은 목소리로 우스개 소리를 했다.
"나야 뭐, 무늬만 고삼이라 빈둥거리며 지내 날라리가 된 기분이야."
그러고는 곧바로 물었다.
"근데, 갑자기 웬일이니? 혜정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니?"
"실은 요즘 혜정이가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지 잘 모르겠어. 혹시, 넌 아니?"
"그건......"
영희는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거 같은데, 뭐라고 말하지? 그냥 나도 잘 모른다고 말할까? 아냐, 혜정이가 유학가는 것 때문에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니까 그거라도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희성이는 영희가 말하기를 주저하자 다시 물었다.
"영희야, 넌 아는 거 없니? 혜정이가 요새 무슨 일로 힘들어 하는지......"
"글쎄, 나도 잘 모르지만, 내 생각엔 혜정이가 벌써부터 유학을 두고 힘들어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유학가면 사오년을 친구들하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데, 혜정이 그것 때문에 고민해서 그런 게 아닐까?"
영희가 둘러댄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 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혜정이가 힘들어 하는데 난 도움이 안 되니 좋은 오빠가 아닌 것 같아."
영희는 자신이 둘러댄 말이 통했다는 생각에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실은 나도 그것 때문에 정말 고민 많이 했어. 어린 나이에 사오년이나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된다는 게 쉽지 않잖아. 니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기를 바래. 지금 혜정이에게 필요한 건 너의 따뜻한 격려야. 혜정이가 유학갈 용기를 낼 수 있게 니가 옆에서 격려해줘."
영희는 실로 엉뚱한 말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희성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 혜정이에겐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것 같아. 충고해 줘서 정말 고마워."
영희는 고3인 희성이 혜정이 때문에 걱정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실없는 말을 떠들어 댔다.
영희는 이제는 되었다는 생각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뭘, 그 정도 가지고. 희성아, 너 혹시 아니? 나, 요즘 혜정이랑 많이 친해졌어."
"나도 알아. 혜정이가 요즘 니가 친언니같다던데, 정말 고마워. 혜정이에게 잘해줘서."
"고맙긴, 내가 고맙지. 혜정이처럼 착한 동생이 생겼는데......"
희성이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영희는 희성이가 한숨을 내쉬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무슨 걱정있니?"
희성이 한 차례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실은...... 혜정이가 너와 나 사이에서 힘들어 하는 것 같아......"
희성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영희를 만나자고 한 것이다.
혜정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희성이 혜정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영희는 자신이 둘러댄 말이 들통났음에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혜정이한테는 너처럼 든든한 오빠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거야."
희성이 영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혜정이가 힘들어할 때 힘이 되어주고 싶어. 영희야, 혜정이를 잘 부탁해. 니가 옆에서 격려해 준다면 큰 힘이 될 거야."
영희는 여동생을 부탁한다는 희성이의 말에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나도 혜정이의 힘이 되어주고 싶지만...... 당분간은 혜정이를 만나지 못할 거아. 너도 알다시피 혜정이가 나와 너 사이에서 좀 힘들어 하잖아."
자신이 혜정에게 별 도움이 못된다는 생각에 영희는 이제서야 솔직히 말했다.
희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혜정이가 왜...... 난 이제 괜찮은데, 혜정이가 지나치게 나와 너 사이를 의식하는 것 같아. 그럴 필요없는데......"
"그러게 말이야. 혜정이가 너와 나 사이를 지나치게 의식하는거 같아."
희성이 영희를 의미심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영희야, 실은 혜정이가...... 자책하고 있어. 자기가 우리 둘 사이를 방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를 대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아. 사실은 그게 아닌데...... 난 니가 유학가는 줄 모르고, 대학가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희성아, 저번에도 내가 말했지만, 잘못이 있다면 모두 내 탓이야. 내가 먼저 너한테 유학간다고 연락했어야 하는데...... 그리고 니 어머님께 널 바꿔 달라하지 말고, 혜정이를 바꿔 달라고 했으면 됐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좀 고지식했던 것 같아."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영희와 희성은 둘 다 약속이나 한듯 초등학교 6학년 때 함께 했던 시간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희성이 침묵을 깨었다.
"영희야, 육학년 여름방학 때 피아노 학원에서 혜정이가 피아노치고, 우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지. 기억나니? 벌써 육년이 흘렀구나.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래, 그때가 참 좋았었지. 아무 걱정도 없었고."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영희와 희성이 모두 약속이나 한듯 철수를 생각했다.
영희는 '철수가 날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할까?'하는 의문 속에 침묵을 지켰고, 희성이는 '철수가 나보다 영희를 더 사랑할까?'하는 의문 속에 침묵을 지켰다.
희성이 또 다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영희야, 앞으로 철수와 잘 지내기 바래. 철수는 참 좋은 녀석이야. 널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니가 아직도 나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연락해 보라고 여러 차례 말했었어. 난 그때마다 대학가면 연락하겠다고 말했었지. 그 애가 널 좋아하면서도 나한테 여러 번 너한테 연락하라고 말한 걸 보면, 정말 널 좋아하는거 같아. 나라면 그러지 못할 텐데. 니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좀 위안이 되는 것 같아......"
영희는 희성의 진심어린 말에 목이 메여 입이 열리지 않았다.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영희가 침묵을 깨었다.
"희성아, 날 항상 진심으로 대해 줘서 정말 고마웠어. 널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영희는 희성에게 자신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기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희성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울먹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희야, 나도 널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울먹이듯한 희성이의 목소리에 영희는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넌 정말 좋은 애야. 하지만 우린 인연이 아닌 것 같아. 우리가 서로 엇박자가 나서 이렇게 된 게...... 운명이 아닌가 싶어......"
희성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만난 것도,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도, 모두 운명인거 같아. 하지만, 너...... 그거 아니?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우리가 헤어지게 된게 운명인 거 같지만, 나 스스로 그런 운명을 만든 것 같아. 내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나도 크리스마스 때 너에게 주려고 카드를 샀는데, 카드를 써놓고도 학원 다녀와 막상 밤에 너희 집에 가기가 좀 망설여져서......"
말을 마친 희성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희성이의 말투는 후회가 가득차 있었고, 영희도 느낄 수 있었다.
영희도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그랬니? 뜻밖이야. 난 니가 소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넌 항상 자신감이 넘쳐보였고, 널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많은데, 왜 그렇게......"
영희는 희성에게 '왜 그렇게 소심했니?'라고 말하려다 희성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희성이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 가면 소심해지는 거 같아. 나도 내가 소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왠지 모르게 너한테는 소심하게 되었어."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소심해 진 적이 있어. 나도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영희는 희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희성에게 '나도 너 앞에만 가면 소심해졌어'라고 말하듯이.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희성이도 영희도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하던 중 문득 희성이는 영희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여자 연예인이나 그가 본 어떤 여자보다 영희가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이런 걸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걸까?'
희성은 자신도 모르게 영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영희는 희성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희성은 빤히 쳐다보던 시선이 영희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영희는 희성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희성이가 아직도 마음 정리를 못한 걸까? 하기야, 나도 마음 정리가 잘 안되는 걸...... 하지만, 지금 정리하지 못하면 서로가 힘들어질거야.'
영희는 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깨었다.
"희성아, 이제 우리...... 더 이상 과거에 묻혀 추억에 연연하지 말자. 그러는게 좋겠지?"
희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희는 희성을 바라보았다.
"희성아, 넌 정말 좋은 애니까 앞으로 나보다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때 희성이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영희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지 않을거야. 나에겐 영희 니가 최고인데, 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데, 어떻게 너보다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겠니? 내가 앞으로 감내해야 되는 일이지만, 난 내 인생에 한번 뿐인 인연을 놓친 것 같아."
마침내 희성이 영희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것이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영희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영희는 머리를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한 느낌이 들었다.
'바보, 그걸 왜 이제 말해? 왜?'
'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데'라는 희성의 한마디에 영희의 마음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희성에게 물었다.
"너 진심이야?"
희성은 영희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것이 쑥스러워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진심이야."
영희는 갑작스러운 희성의 고백에 할 말을 잃었다.
'근데, 그걸 왜 이제와서 말하는거야? 소심해서? 방금전에 희성이가 자신이 소심하다고 말했지. 그런 거야? 소심해서?'
희성은 초등학교 때 단 한번도 영희에게 예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반 친구들이 희성에게 영희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으면,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지만 착해서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희성이의 그 말은 영희의 귀에도 들렸다.
영희는 자신이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라는 희성의 말에 삐져서 여러 차례 톡쏘는 말을 했고, 그것이 서로의 마음을 멀어지게 만들어 이렇게 어긋장 난 것이다.
영희는 초등학교 때보다 고등학생이 된 후 훨씬 더 예뻐졌기 때문에 희성이 영희가 예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이후의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영희와 희성이를 어긋장나게 만든 것이다.
희성의 진심을 들은 영희는 지금 몹시 혼란스러웠다.
희성의 진심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철수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철수와 희성이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철수와 희성이 중에 누가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