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혜정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영희가 손수건을 꺼내 혜정의 눈물을 닦아준 후 말했다.
"혜정아,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난 이제 아무래도 괜찮아......남자친구도 있구...... 혜정이 너만 괜찮다면....."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영희는 목이 메여 오고 있었다.
혜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너무 불쌍해요. 아무 것도 몰랐는데......"
영희는 혜정의 말에 의문이 생겼다.
'희성이가 아무 것도 몰랐다고? 그럼, 희성인 언제 안 것일까?'
영희는 이번 만큼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 희성이 언제 안 거야? 철수가 전화한 거......"
혜정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실은... 얼마전이예요... 오빠가 언니 찾아가기 전에....."
영희는 이제서야 모든 정황을 알 수 있었다.
'희성이 나를 찾아오기 전에 혜정이 말해줬구나!'
혜정이 그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실은 제가 이전부터 언니가 철수 오빠 만나는 거 알았어요. 현대 백화점 근처 레스토랑에서 언니가 철수 오빠와 식사하는 걸 봤거든요. 오빠한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여름방학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오빠한테 철수 오빠 전화온 걸 말했어요......"
영희는 미국에 유학가는 것이 결정되자 철수에게 희성한테 전화해서 자신에게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철수는 영희의 부탁대로 전화했지만, 철수의 전화를 받은 혜정이 희성한테 전해주지 않았다.
혜정이 눈물을 글썽였다.
"철수 오빠가 저한테 언니가 오빠하고 연락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는데, 제가 오빠한테 전해준다고 말만 하고 전해주지 않았어요......"
영희는 희성이 철수의 전화를 받고도 연락하지 않은 줄 알고 몹시 서운하게 생각했고, 결국 철수를 만났는데 그것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아팠다.
영희는 마음속으로 혜정에게 묻고 있었다.
'혜정아, 왜 그랬니? 그리고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떻하니?'
영희는 혜정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좋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 모르는 게 약인데...'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영희도 울고 싶었지만, 혜정이 우는데 자신마저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혜정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영희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혜정아, 다 지난 일인데, 이제와서 탓하면 뭐하겠어. 따지고 보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직접 희성이한테 전화했어야 하는데......"
영희는 문득 혜정이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철수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도 그렇지... 희성이가 아니라 혜정이가 전화받았으면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왜 그 말은 하지 않았을까?"
영희가 중얼거리는 말에 혜정이 대답했다.
"철수 오빤 제가 당연히 오빠한테 전해줬을거라 생각했겠죠......"
영희는 생각에 잠겨 아무 말이 없었다.
영희가 화난 줄 알고 혜정이 눈물을 글썽인 채 용서를 구하듯 고개를 숙였다.
"언니, 정말 죄송해요......"
영희는 눈물을 글썽이는 혜정이 안쓰러워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정아, 다 지난 일이니, 우리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생각해 보니까 나도 잘못한 것이 있고... 너도 잘못한 것이 있고... 철수도 잘못한게 있고... 하지만, 가장 큰 잘못은 나에게 있어. 내가 직접해야 될 걸 철수한테 시킨 것부터가 잘못이지, 뭐. 내 잘못이 크니까 자책하지마."
"하지만... 오빠가 너무 불쌍해요. 저 때문에......"
영희는 희성이 몰라서 자신에게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몹시 아파 울고 싶었지만 울음을 참았다.
"희성인 괜찮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희성인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잖아. 틀림없이 희성인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야. 그러니까 걱정마."
이때 혜정이 작심을 한듯 말했다.
"언니,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건가요? 언니도 오빠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잖아요."
혜정은 자신도 철수한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언니가 오빠 만나면 저도 철수 오빠 만날 수 있을 텐데......'
영희가 괴로운 듯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제발 그만...... 난 이제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
영희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혜정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혜정은 자신이 영희를 울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손수건으로 영희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언니, 울지 마세요. 언니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이젠 다시는 오빠 일로 언니를 힘들게 하지 않을 게요......"
영희는 눈물을 그쳤다.
혜정은 속으로 다짐하는 중이었다.
'언니, 이제 저도 철수 오빠에 대한 마음 접을게요.'
영희와 혜정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침묵이 흘렀다.
혜정이 갑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본 후 침묵을 깼다.
"언니, 우리가 오빠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거 같아요. 이제 우리 그만 돌아갈까요?"
"잠깐만, 나, 화장실 좀 갈게."
영희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영희와 혜정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갔다.
희성은 영희와 혜정이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자 손목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얘네들이 무슨 얘길 하는걸까?'
이때 혜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희성이 혜정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혜정과 영희가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오래 걸려서......"
"미안하긴, 내가 미안하지. 팥빙수를 내가 혼자서 다 먹었는데, 어쩌지? 우리 팥빙수 더 먹을래?"
희성은 영희와 혜정을 기다리다 초초해져 정신없이 다 먹고 만 것이다.
어차피 팥빙수의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될 터라 다 먹은 것이기도 했다.
혜정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거든! 원래 우린 팥빙수 별 생각없었어. 언니, 그치요?"
혜정은 영희를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희도 미소를 지었다.
"난, 팥빙수 실컷 먹었어. 찬거 많이 먹으면 안 좋으니까, 팥빙수는 그만 먹자."
희성이 자신이 주문한 빵을 가리켰다.
"좋아. 근데, 너희들 뭐 마시고 싶은 것 없니? 난 배고파서 빵 좀 먹으려하는데...... 마실거 시켜 빵이랑 같이 먹자."
혜정은 조금 전에 울어 몹시 목이 말라 딸기 쥬스를 마시고 싶어 영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언니, 우리 딸기 쥬스 마셔요. 저, 목말라요."
영희도 울었더니 갈증이 나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딸기 쥬스 좋지. 하나 시켜 나눠 마시자."
희성의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나눠 마시자는 영희의 말에 혜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빠, 우리 딸기 쥬스 하나 시켜줘."
"오케이, 기다려."
희성이 카운터로 가자 혜정이 영희에게 속삭였다.
"언니, 저 방금전에 울어서 그런지 목 말라요. 언니는 안 그래요?"
"나도 그래."
혜정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이었다.
"우리 오빠, 진짜 센스있죠? 오빠는 내가 목마르면, 말하지 않아도 항상 과일 쥬스를 사줘요."
"나도 알아. 예전에 내가 희성이랑 야구장에 갔을 때 응원하느라 목 말랐는데, 내가 목 마르면 알아서 마실 걸 사다줬었지. 니 오빠는 정말 센스쟁이인거 같아."
이때 희성이 딸기 쥬스 3잔을 담은 쟁반을 들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혜정이 오빠를 나무라듯 말했다.
"오빠, 우리 꺼는 하나만 시키라고 했잖아. 우리는 나눠 마셔도 되는데......"
"남으면 오빠가 다 마실 테니까 걱정 말고 마셔."
"알았어. 고마워 오빠."
영희와 혜정은 몹시 갈증이 났기 때문에 딸기 쥬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잠깐만, 기다려봐."
희성이 카운터에서 케이크 하나를 받아 가져왔다.
"짜잔!"
영희와 혜정은 케이크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케이크야?"
"나, 생일 땡겨서 오늘 하려고."
희성의 생일은 1주일 남았지만, 영희와 함께 생일 케이크를 먹고 싶었다.
영희는 희성이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희성이 케이크를 꺼내 상자 위에 올려 놓았고, 혜정은 상자에서 초를 꺼내 케이크에 꽂았다.
영희는 왠지 모르게 희성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희성아, 생일 축하해. 근데, 난 생일선물도 준비 못했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미안하긴, 오늘이 내 생일도 아닌데, 뭐......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마."
혜정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언니, 나도 오빠 생일선물 준비 못했으니까 우리 나중에 같이해요."
"그래, 혜정아, 우리 내일이나 언제 한번 만나자."
"좋아요. 언니, 내일 피아노 학원에서 뵈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좋아."
영희와 혜정은 친자매처럼 다정해 보였다.
희성은 영희와 혜정이 다정한 사이가 된 것을 보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희와 혜정은 희성의 19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생일 축하송을 불렀다.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혜정이 먼저 희성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오빠, 생일 축하해. 오빠 열세번 째 생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아홉번 째네. 아무튼 원하는 소원 다 이루길 바래."
이어 영희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희성아, 생일 축하해. 대학 꼭 붙고 항상 행복하길 바래."
"혜정아, 영희야, 모두 고마워."
희성이 케이크에 꽂힌 촛불 하나를 들고 소원을 빌었다.
"내 첫번째 소원은, 올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거야."
희성이 손에 든 촛불을 끈 후 다른 촛불을 들고 두번째 소원을 빌었다.
"내 두번째 소원은, 혜정이가 앞으로 뭘하든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래. 그리고, 내 마지막 소원은......"
희성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영희가 누굴 만나든 행복하길 바래."
영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희성아, 날 생각해 줘서."
영희, 희성, 혜정, 셋은 케이크를 먹은 후 커피숍에서 나왔다.
"언니, 내일 뵐게요."
"그래, 혜정아, 내일 보자."
희성은 영희가 자신의 생일선물을 준비하느라 신경쓸까봐 걱정되어 말했다.
"영희야, 생일선물, 안 해도 되는데......"
혜정이 밝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마."
영희도 밝게 미소지으며 혜정의 말에 맞짱구쳤다.
"맞아, 우리가 알아서 할꺼니까 넌 신경쓰지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응, 알았어. 공부 열심히 할게. 영희야, 오늘 나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잘 가."
"고맙긴, 내가 고맙지. 팥빙수에, 딸기쥬스에, 케이크에, 정말 잘 먹었어. 고마워."
"언니, 내일 뵈요. 제가 가기 전에 전화할게요."
"그래, 혜정아, 내일보자. 희성아, 잘 가. 공부 열심히 하고, 나중에 또 보자."
영희는 속이 후련해졌다.
희성의 생일을 함께 보냈다는 생각에, 혜정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알아냈다는 생각에, 이래저래 후련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