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아침 일찍부터 피아노 학원에 나가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쳤다.
영희는 마음이 울적할 때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치며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지금도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희성아, 부디 행복하길 바래. 넌 정말 좋은 애니까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도 널 정말 좋아했었는데...... 정말인지 우린 인연이 아닌가봐.'
이때 핸드폰이 울리자 영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었다.
"혜정이니?"
"나야, 연주."
"아, 연주 언니,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잘 지냈어. 근데, 혜정이 누구야? 친구?"
"친한 동생인데요.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영희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오늘은 안 되겠구나."
실망한 듯한 연주의 목소리는 다분히 애교가 섞여 있었다.
영희는 이런 연주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좋아져 목소리가 밝아졌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친구한테 줄 생일선물을 같이 사려 했거든요."
"그럼, 이 언니도 끼여줄래? 나도 생일선물 살거 있는데......"
"언니는 언제쯤 시간 있으세요?"
"하루종일. 언니는 백조잖아."
여자 백수를 뜻하는 백조라는 말에 영희가 킥킥 웃었다.
"킥킥... 언니, 그럼 제가 이따 연락드릴게요."
"응, 이따 보자."
"네, 이따 뵐게요."
영희는 전화를 끊은 후 치고 있던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마져 마쳤다.
이때 혜정이 피아노 학원에 들어왔다.
혜정은 영희가 피아노 치는데 방해될까봐 기다리다 들어온 것이다.
"언니, 누구랑 통화하셨어요? 언니가 통화 중이라 전화 못하고 그냥 왔어요."
"아,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연주 언니라고 나랑 친한 언니가 있는데, 언니도 생일선물 살게 있다며 끼여달라 하셔서 내가 좋다 했는데, 괜찮겠지?"
"네, 전 괜찮아요. 근데, 어디로 갈까요?"
"글쎄,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에 가는 게 어때?"
"좋아요, 셋이 같이 가요."
"잠깐, 언니한테 전화하고......"
영희는 연주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아파트 단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영희와 혜정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약속한 장소로 걸어갔다.
"근데, 연주 언니는 대학생이세요?"
"아니, 연주 언니는 나이가 스물 세살이셔."
혜정이 조금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스물 세살이세요? 그럼 저랑 일곱 살이나 차이나시네요."
"응, 근데, 연주 언니는 참 좋으셔.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소개시켜 주려고 했어."
"언니가 좋다니 저도 꼭 뵙고 싶네요. 근데,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연주 언니는 우리 아버지 회사 회장님 따님이셔."
"회장님 따님이요? 와! 영희 언니, 정말 대단한 분과 친하셔서 좋으시겠어요."
이때 연주가 고급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화사하게 화장한 연주는 미스 코리아 뺨칠 정도의 미모였다.
연주는 영희와 혜정이를 차에 태운 후 인사했다.
"안녕."
영희가 연주에게 혜정을 가리켰다.
"언니, 얘가 혜정이예요."
"안녕하세요......"
낯을 많이 가리는 혜정은 처음 보는 연주에게 인사하는 것이 어색한 듯 말끝을 흐렸다.
"니가 혜정이니? 반가워. 난 연주라고 해."
연주는 미소를 지으며 영희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근데, 영희야, 너랑 친한 애들은 모두 혜정이처럼 예쁘니? 혜정이 참 예쁘네."
영희도 농담조로 맞장구쳤다.
"네, 저랑 친한 애들은 모두 저보단 예쁘고, 혜정이보단 덜 예뻐요."
"그러니까 니 말은, 우리 셋 중 이 언니가 제일 못생겼단 말이네. 킥킥..."
연주가 킥킥 웃자 영희도 킥킥 웃으며 말했다.
"킥킥... 아뇨, 제가 제일 못생겼단 말이였어요."
혜정이도 킥킥 웃으며 말했다.
"킥킥... 에이, 아니죠, 제가 제일 못생겼는데, 언니들 농담이 심하시네요. 킥킥..."
"혜정이, 너 뻥칠래? 혜정인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동네 최고 미녀로 소문나서 이 근방에서 모르는 애들이 없을 정도예요."
"아니예요, 언니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동네 최고 미녀였어요."
셋이 킥킥 웃으며 떠들다 어느새 백화점에 당도했다.
백화점에서 영희와 혜정이 희성의 생일선물을 살 때 연주는 혜정에게 선물로 핸드폰을 사주었다.
쇼핑이 끝나자 연주는 영희와 혜정을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혜정이 연주가 선물로 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연주 언니, 이런 거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부담갖지마. 이 언니가 주는건데......"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혜정아, 나중에 또 보자."
"네, 언니. 나중에 또 뵈요."
"영희야, 나, 그만 가볼게. 잘 있어."
연주가 승용차를 몰고 떠나자 혜정이 영희에게 미소를 지었다.
"언니, 연주 언니 참 좋은 분이세요. 얼굴도 예쁘시고, 마음도 착하시고요."
"그치?"
"네, 언니. 연주 언니를 저한테 소개시켜줘서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나도 즐거웠어. 이제 너도 핸드폰 생겼으니까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네, 그래요. 자주 연락드릴게요."
영희는 혜정에게 확답이라도 받고 싶은 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언니, 저, 이만 가볼게요. 오빠가 기다릴거 같아서요."
혜정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영희가 혜정을 불러세웠다.
"혜정아! 희성이 생일선물! 내 선물도 희성이한테 전해줘."
영희는 희성을 다시 만날 자신이 없어 희성에게 줄 생일선물을 혜정에게 건네주었다.
"네, 오빠한테 전해 줄게요. 그럼, 언니, 나중에 또 뵐께요. 안녕히 계세요."
"응, 잘가."
영희와 혜정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헤어졌다.
영희가 집에 들어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야, 철수."
"잘 지냈어?"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난, 너만 생각하면 힘이 나거든."
"그래? 내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 공부는 잘 되고?"
"그럭저럭 잘 되고 있어. 근데, 영희야, 오랫동안 널 못보니까 보고 싶다. 개학이 기다려져."
"개학하면 우리 자주 보게 될테니까 그동안 공부나 열심히 하셔. 딴 생각 말고."
"응, 그렇지 않아도 나 요즘 딴 생각 안하고 열공 중이니까 걱정마세요. 공주님."
영희는 공주님이라는 말에 꺄르르 웃었다.
"공주? 그래, 나, 원래 너의 공주님이었지. 호호호......"
"근데, 영희야. 지금 좀 만날 수 있니?"
"지금? 갑자기 왜?"
"니가 보고 싶어서."
"글쎄......"
"시간없니?"
"시간이야 있지만......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때 보면 안될까?"
"지금 잠깐만 볼 수 없니? 나 지금 휴식 중인데... 잠시만 봤으면 좋겠어."
영희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래, 알았어. 어디서 만날까?"
철수는 영희가 만나는 것을 동의하자 몹시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파트 상가 커피숍, 어때?"
"좋아, 언제 만날래?"
"난 언제든 상관없는데......"
"그럼, 십오분 후에 커피숍에서 보자."
"응, 기다리고 있을게."
철수와 만날 것을 약속한 영희는 거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갑자기 왠일이지? 개학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도 보고 싶긴 하지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괜히 공부하는데 방해되지 않을까 걱정되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동안 잘 해왔잖아.'
영희가 커피숍에 가보니 철수는 이미 자리에 앉자 기다리고 있었다.
철수는 영희를 보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영희야, 여기!"
영희는 철수를 보자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철수야,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응, 정말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나야, 뭐. 그렇지. 무늬만 고3이라서...... 넌,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힘들긴... 공부하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았어. 널 못봐서 힘들긴 했지만......"
"그랬니?"
영희는 자신을 못봐서 힘들었다는 철수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자신을 이처럼 사랑하는 철수와 헤어지지 않은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영희가 철수와 헤어지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영희의 첫사랑이었던 희성의 고백을 들었을 때 희성이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철수에게 깊은 정이 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영희는 그동안 마음이 흔들렸던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다.
영희는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메뉴판을 가리키며 밝게 말했다.
"우리 팥빙수 먹을래?"
"좋아. 내가 쏠게."
"아니야, 내가 쏠게. 그동안 니가 많이 쐈잖아. 우리 이제부터 공평하게 번갈아 내자. 그럼 서로 부담 안되서 좋을 것 같아. 우리 만날 때마다 니가 내니까 좀 부담될 때가 있었어."
"좋아. 난 니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니 말대로 할께."
영희는 철수의 재치있는 말에 웃고 말았다.
"호호호, 고맙다."
영희는 카운터로 가서 팥빙수를 주문한 후 돌아왔다.
"철수야, 너,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오늘은 내가 화끈하게 쏠께."
철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오로지 나의 수호천사님과 함께 팥빙수나 먹고 싶을 따름이야."
영희는 '수호천사'라는 철수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수호천사? 내가 언제부터 니 수호천사였지?"
"내가 널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실은 내가 널 처음보는 순간, 내 심장에 큐피트의 화살이 꽂혔거든."
영희는 익살스러운 철수의 말에 깔깔 웃었다.
"호호호...... 그랬어? 근데, 니가 날 짝사랑했다고 내가 수호천사가 되었다는 건 좀 웃긴다. 그때 난 너한테 관심도 없었는데......"
"난, 니가 있는 것만으로도, 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그러니까 내 수호천사 맞지."
"그랬니?"
"응, 난 집에 가면 '오, 나의 천사여! 나에게 마음을 열어다오.'하면서 널 생각했어."
"그랬구나. 고마워."
"고맙긴, 내가 고맙지. 너랑 사귀는 게 내 소원이었는데,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지금도 가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어."
영희는 철수를 꼬집는 시늉을 했다.
"정말? 내가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시켜 줄까?"
철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지금은 분간되니까, 사양할래."
"피, 언제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안되면, 콜."
"알았어. 필요하면 콜 할께."
영희와 철수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할 말이 태산처럼 많었지만, 무슨 말을 할지 생각나지 않아 계속 농담만 주고 받았다.
영희는 철수와 농담을 주고 받던 중 별안간 6개월이 지나면 철수와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육개월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 되니, 철수를 못보게 될 텐데...... 유학가면 일이년도 아니고 수 년을 못보게 될 테니...... 너무 아쉬워.'
영희는 6개월이 지나면 철수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찹찹해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철수는 영희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영희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말했다.
"영희야, 너, 오늘 따라 정말 예쁘다."
영희는 예쁘다는 말을 듣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얼만큼?"
철수는 두 팔을 쭉 펴면서 말했다.
"이만큼"
"그만큼이 얼만큼인데?"
"무한데로 예뻐,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짜?"
"당근이지. 내가 거짓말하는거 봤어?"
"날 예쁘게 봐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예쁘게 봐준게 아니라, 넌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어. 세익스피어의 시에 나오는 절세의 미녀처럼."
"세익스피어의 시? 그게 뭔데?"
"소넷 백육인데, 혹시 들어봤니?"
"와... 넌 그런 것도 읽었니? 난, 피아노 소나타는 알아도 소네트는 어떤 건지도 몰라."
"얘기하면 기니까 요점만 말해줄게. 너와 같은 아름다운 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기에는 이 세상의 언어는 부족하도다. 쉽게 말하면 너와 같은 아름다운 미녀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하기 어렵다는 말이지."
영희는 철수에게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106에 대한 설명을 듣자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줍어 침묵하던 영희는 철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고맙긴, 공부만 한다고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공부 열심히 하는 게 어디야, 니가 열심히 공부해 주니까 내가 이렇게 부담없이 널 만날 수 있잖아.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줘. 그래야 우리 시험 끝나고 신나게 놀지."
철수가 각오를 다짐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맞아! 빨리 대학에 붙어야 널 빨리 만날 수 있지. 그래, 열심히 공부할게. 이제 수능까지 90일도 채 남지 않았으니,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지."
"구십일? 아참! 벌써 그렇게 됬네."
영희는 수능이 90일도 남지 않았다는 철수의 말에 수능 D데이 100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기다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