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는 머리로는 다시는 희성이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거듭 다짐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희성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희성아, 우리가 왜 이렇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 사이는 마음 아픈 추억이 되어버린 것 같아.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을 생각하면 너무 슬퍼져. 내가 너한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미안한데, 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희성아, 넌 참 좋은 애니까 나보다 훨씬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부디, 나로 인해 더 이상 가슴 아파하지 말기를 바래.'
영희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영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연주, 너 지금 바쁘니?"
영희는 연주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좋아져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하나도 안 바빠요. 전 백조인 걸요."
연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호호... 백조? 학생이 무슨 백조니? 내가 진짜 백조지. 그건 그렇고, 영희야, 정말 미안한데,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겠어. 실은 내가 아까 요일을 착각했어. 오늘이 토요일인 줄 알았지 뭐야. 내가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백조다 보니 오늘이 토요일인 줄 알고 오후 세시에 만나자 했거든. 오늘은 시간이 없구, 내일 토요일 만나자. 괜찮겠지?"
"네, 전 언제든 괜찮아요. 무늬만 고삼이라서 지금도 빈둥거리고 있거든요."
연주는 고등학생인 영희가 부러워 푸념하듯 말했다.
"좋겠다. 나도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갔으면 참 좋겠어. 그때는 아무 걱정도 없어 참 좋았는데. 나, 요즘 고등학교 여름방학이 생각나는데...... 타임머신사서,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영희가 재빨리 연주의 말을 받아 말했다.
"타임머신이요? 언니, 그거 사면, 저도 태워주세요. 저도 꼭 가고 싶은 시절이 있거든요."
"언젠데?"
영희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음......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요."
"초등학교 6학년? 왜? 누구 좋아하는 애 있었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때가 좋아서요."
"그냥이라구? 에이, 솔직히 말해봐. 누구 있었지?"
"그런 게 아니예요."
"아니면 됐고. 근데, 너 토요일 몇시가 좋겠니?"
"전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실은 우리 오빠가 구월에 미국에 가서 송별 파티 해주려는데, 우리 남매는 백수 백조니까, 니 일정에 맞춰 송별 파티하려고."
영희는 파티라는 말에 좋아 입이 벌어졌다.
"와, 언니 초대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근데, 제 일정에 맞출 필요는 없는데요. 저도 백조라......"
"같은 백조라도 내가 더 한가하니까. 내일 내가 픽업하러 갈게."
하필 토요일은 피아노 학원이 쉬는 날이었다.
영희가 재빨리 말했다.
"근데, 토요일은 제가 피아노 학원에 안 가는데요."
"그럼, 너희집 앞으로 갈게."
영희는 연주가 집까지 픽업하러 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회장님 딸인 연주가 차를 몰고 집 앞으로 오면, 또 이상한 소문이 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언니가 저희집 쪽으로 오시려고요?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전, 길 잘 찾거든요."
"아니야, 내가 갈게. 이 언니는 남는게 시간이니까 내가 너희집 쪽으로 갈께. 반대의견 없지?"
영희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알았어요."
"근데, 영희야, 혜정이도 초대하려고 하는데, 혜정이한테 시간이 되는지 물어봐줄래?"
"네, 근데, 지금 혜정이는 피아노 레슨 중이예요."
"언제 끝나는데?"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한시간 정도는 지나야 될 거예요."
"알았어. 그럼 이따 혜정이한테 전해줘. 근데, 영희야, 우리 셋이서 오빠 선물 준비하려는데, 어때?"
"좋아요. 근데, 뭐 생각하신거 있으세요?"
"아니, 일단 내일 만나 얘기하자. 내일 세시에 보자. 잘 있어."
"네, 언니, 내일 뵐께요."
영희는 연주와 내일 만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혜정이 화장실에 들어왔다.
혜정은 조금 전에 눈물을 흘리던 영희가 걱정되어 왔는데, 영희의 행복한 미소를 보자 의아했다.
"언니,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너, 레슨받다 말고 왜 나왔어?"
"선생님이 커피 좀 마시고 하자 하셔서...... 그동안 언니랑 얘기 좀 하려고요. 근데,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런 것 같아요."
"아, 실은 너한테 말하려 했는데...... 내일, 연주 언니 오빠가 미국으로 가기전에 송별 파티를 하는데, 언니가 우리 모두 초대했어. 우리 같이 가자. 재미있을 것 같아."
파티라는 말에 혜정도 영희처럼 입이 벌어졌지만, 무언가 걱정이 된 듯 물었다.
"정말요? 근데... 전, 연주 언니 오빠, 본 적도 없는데, 가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지. 초대받았는데...... 방금 전에 언니하고 통화할 때 언니가 널 찾았는데, 우리 셋이서 연주 언니 오빠 선물을 같이 사자고 하셨어. 우리 같이 연주 오빠 선물 골라보자."
"좋아요. 언니, 같이 가요. 제가 불청객이 아니라면 갈게요."
영희와 혜정은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우울했던 영희와 혜정이로선 기가 막힌 반전이었다.
토요일 오후 3시가 되자 연주가 영희의 집 앞으로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외제차를 몰고 나타났다.
연주는 차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기다렸니?"
"아뇨. 저희도 지금 막 나왔어요."
"그래? 안 기다렸다니 다행이야. 어서 타."
영희가 혜정과 함께 차에 탄 후 시계를 보니 3시 정각이었다.
영희는 신기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근데, 언니, 어쩜 약속시간에 딱 맞춰 오셨어요? 지금 세시 정각이예요."
"그러니? 뭐, 내가 백조다 보니,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늦지 않게 나온다는 게...... 좀 빼다 나올 걸 그랬나? 바쁜 것처럼? 호호호......"
연주가 웃긴 했지만, 영희는 자칭 백조라는 연주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닌데요...... 죄송해요."
연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죄송하긴...... 우리 사이에."
10여 분 쯤 지났을 무렵, 연주는 차를 세웠다.
연주가 차를 주차한 집은 대궐처럼 화려한 단독주택이었다.
"와! 언니 집, 정말 대궐 같네요."
영희가 감탄하는 얼굴로 집을 바라보고 있는데, 연주가 영희에게 놀랄만한 사실을 말했다.
"실은 여긴 오빠 집이야. 오빠 생일이니까 오빠 집에서 파티하는게 나을 거 같아서......"
연주의 말에 영희는 더욱 감탄한듯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럼, 여긴 현철 오빠 혼자 살아요?"
"응, 그런 셈이지. 식모 아줌마들과 경비 아저씨들 빼면 오빠 혼자야."
영희의 머리는 아직 계산이 정리되지 않았다.
현철 혼자 사는 집에 식모와 경비는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영희가 연주를 따라 집안에 들어가자 이러한 영희의 궁굼증이 풀렸다.
대문의 안쪽에는 경비원이 두 명이 있었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서너 명이 보였다.
영희는 구태여 연주에게 경비와 식모가 몇 명인지 묻지 않았다.
혜정이 영희에게 속삭였다.
"연주 언니 오빠는 지금 집에 없나봐요."
연주가 혜정이 속삭이는 말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약속이 있어 좀 있다 올거래. 내가 우리 오빠 집 구경시켜줄께."
거실의 선반에는 도자기 등 보물창고처럼 각종 귀중한 물건이 가득했다.
영희가 거실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떠뜨렸다.
"와! 정말 현철 오빠 집은 대궐 같아요."
연주는 영희의 감탄에 손사래를 쳤다.
"대궐 같기는...... 그냥 사람사는 집이지."
영희가 선반에 있는 도자기 하나를 가리켰다.
"근데, 여기 선반에 값비싼 물건들이 많은 것 같은데...... 혹시라도 제가 실수로 깨면 어쩌지요? 평생 벌어도 못 갚을거 같아 살짝 걱정되네요."
연주가 빙그레 웃었다.
"걱정마. 니가 깨면 내가 변상해줄게. 대신 내 동생이 되죠."
연주는 정말 영희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영희도 빙그레 웃었다.
"말이라도 정말 고마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실수해서 뭐 하나 깨면, 언니 집 하녀라도 되서 갚을 생각이었는데...... 제가 언니 동생이 되면 좋죠. 근데, 잘못해서 두 개 이상 깨면 어쩌죠?"
"그럼, 내 딸이 되던지......"
이 말에 영희가 깔깔 웃으며 선반 전체를 가리켰다.
"딸이요? 호호호...... 그럼 언니 딸이 되면 여기 있는 거 다 깨도 변상해주실 거예요?"
"그러던지. 나 요즘 나이 먹으니까 자식 생각이 간절하거든."
이때 옆에서 연주와 영희의 대화를 듣던 혜정이 꺄르르 배를 잡으며 웃었다.
"언니들, 너무 웃겨요. 저 배꼽 빠지겠어요. 호호호......"
평소에 얌전한 혜정은 조용히 거실을 구경하던 중 연주의 말이 너무 웃겨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연주는 배를 잡고 웃는 혜정을 더욱 웃게 만들었다.
"배꼽 빠지면 안되지. 오늘 아침에 청소 다 했거든. 안 빠지게 조심해. 알겠지?"
혜정이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호... 네, 언니. 배꼽 안빠지게 조심할께요."
거실의 시계를 쳐다본 연주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사실이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그건 그렇고. 뭐 좀 먹을래? 맛있는 거 많은데......"
영희와 혜정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영희가 혜정에게 동의를 구하듯 살짝 눈짓하더니 연주에게 말했다.
"저희는 조금 아까 점심을 같이 먹어 배고프지 않아요. 저녁까지 기다릴게요."
영희와 혜정은 허기를 때우려고 떡복이 한 접시를 같이 먹었을 뿐이었지만, 연주에게 폐를 끼칠까봐 영희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연주는 정말 영희와 혜정이 점심을 같이 먹은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땡기면 언제든 말해."
그러고는 연주가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따라와봐. 오빠가 오기 전에 오빠한테 줄 카드를 쓰자."
영희와 혜정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연주를 따라갔다.
연주는 영희와 혜정을 주방으로 인도했다.
주방에는 그야말로 사람 키만한 커다란 케이크가 있었다.
영희와 혜정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큰 케이크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