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굽이쳤다.
주위가 어두운 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윤이 났다.
초록빛의 눈동자도 선명하게 빛났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기묘하다 생각 할 만큼, 그녀는 어둠 속에서 존재를 드러냈다.
오늘 그녀의 하루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최악'이었다.
아이디렐 백작가의 귀하디귀하신 따님이 연인과 함께 가출을 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 일로 백작 부부는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아이디렐 백작은 음식이 차갑다며 데워오라 시키더니, 막상 데워서 가니 너무 뜨겁다며 성질을 부렸다.
백작 부인은 느닷없이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사라졌다며 쥐 잡듯이 사용인들을 잡아 놓고는, 몇 분 뒤에 욕실에서 발견했다며 사과 한마디 없이 방으로 사라졌다.
백작 부부가 동시에 이런 저런 일들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바람에 제이드를 포함한 사용인들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온종일 눈칫밥만 먹어야 했다.
"그러게, 아가씨가 허락해 달라고 할 때 그냥 해주시지……."
연인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며 울고불고 하던 게 어제 같은데. 아가씨 행동력 하나는 정말 빠르다니까.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손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에는 초록색 비단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오래된 것인지 끝이 조금 헤져 있었다.
그녀는 열쇠에 달린 리본이 풀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며 문을 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익숙한 거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의 낡은 벽지와, 최소한의 가구 몇 개. 장식품이라고는 무늬 없는 화병 하나뿐인 소박한 풍경.
오늘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백작가의 저택에 비하면 한없이 볼품없는 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드는 이 집이 좋았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살던 집이었다. 그만큼 소중한 기억이 많았다.
할머니를 생각하니 괜히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돌리면, 우아한 잠옷 차림의 그녀가 자신을 맞이해줄 것 같은데. 보이는 건 인적 하나 없이 휑한 거실 뿐이었다.
'생각하지 말자.'
제이드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놓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2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할머니도, 내가 쳐져 있는 걸 바라지 않으실 테니까.’
침실까지 가기에는 너무 피곤했기에, 제이드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대충 바닥에 던져두었다.
단정하게 올려 묶고 있던 머리도 풀고, 발을 아프게 조이던 신발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당장 소파로 뛰어가 몸을 뉘었다.
그녀의 할머니가 보았다면 필시 기겁했을 모습이었다.
"……슬슬 다른 일을 찾던지 해야지. 눈치 보는 것도 더 이상 못 해먹겠어."
친 투로 중얼거리며 제이드는 눈을 감았다. 그 잠깐을 누워있었다고 하루 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력이 좋은 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유달리 힘들게 느껴졌다.
종일 눈치 보고 일은 일대로 하고. 도저히 심신이 남아나질 않았다.
게다가 집까지 걸어오는 길도 멀고 험난한 바람에 그녀는 그야말로 탈진 상태에 가까웠다.
몸이 편하니 졸음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이드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밖에서 갑작스럽게 들리는 인기척에 제이드는 흠칫하며 눈을 떴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몇 초 뒤에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는 사람이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집은 화려한 제국의 수도와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위치한 저택이었고, 이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설마 도둑인가? 요즘 도둑이 그렇게 많아졌다고 하던데.'
오늘도 백작의 저택에서 다른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최근 들어 변두리에 위치한 저택들을 드나드는 도둑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귀족들의 저택과 달리 수도의 변두리에 있는 저택들은 평민들이 사는 곳이라 훔칠 것도 없을 텐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혹 안에 있는 것을 들키지는 않을까. 제이드는 숨을 죽인 채로 현관 쪽을 살폈다.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문 밖의 인기척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확하게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제이드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옆 탁자에 올려있던 화병을 손에 쥐었다.
화병은 이 집안에서 그녀가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침착하게 행동하자, 제이드 시에라.'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온갖 사건사고를 다 겪은 그녀였다.
웬만한 일로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특히나,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 하는 도둑한테는 겁먹을 필요를 못 느꼈다.
제이드는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며 화병을 고쳐 쥐었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기색이 보이면 당장에 머리를 내려칠 작정이었다.
물론 기절할 정도로만 힘을 줘야겠지만.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으니까.'
제이드는 문 앞까지 다가와서 밖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발소리가 들렸는데, 어느새 인기척이 사라지고 말았다.
'눈치 채고 도망간 건가?'
그녀가 내심 속으로 안심하던 순간.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제이드는 놀라다 못해 들고 있던 화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화병을 잡고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안에 있습니까?"
뒤이어 남성의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말투도 도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했다.
"……이 시간에, 무슨 볼 일이죠?"
제이드는 의심이 잔뜩 서린 말투로 답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의 집에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처음 들어본 목소리인 만큼, 그녀는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당신에게 전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어서."
"낮에 전달하면 안 되는 일인가요?"
"한시가 급한 일이라. 실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문밖의 남자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제이드가 머쓱할 지경이었다
.
'문을 열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문을 여는 대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 올 만큼 급한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안으로 들이기엔, 너무 늦었네요. 이른 시간에 다시 찾아오세요."
그녀가 생각해도 제법 단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제이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서 등을 돌렸다.
무슨 수작인지는 몰라도, 급하다는 남자의 말에 홀랑 속아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이 시간에 문을 열어주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 생각하며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도둑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였다.
‘쓸데없이 잠만 깨고, 정말.’
속으로 투덜거리며 제이드는 소파에 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앉으려고’ 했다. 정체불명의 물체가 그녀의 눈앞에 쿵, 하고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게 무슨……!’
양피지, 초콜릿. 그리고 희미한 피비린내. 도통 어울리지 않는 향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그녀의 집에서는 날 리가 없는 냄새들이었다.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하던가. 제이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꼭 달빛을 모아 놓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래로,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이목구비는 부드러운 편이었으나, 전반적으로 지닌 색채 때문에 어딘가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남자는 제이드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장신에, 난생 처음 보는 까만 제복까지 걸친 채였다.
아무리 봐도 도둑과는 먼 생김새였다.
무단침입이라는 어이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넋을 놓고 바라보았을지도 모를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제이드는 얼빠진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급하게 제 뺨을 꼬집었다. 제대로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데. 영,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게 맞지?'
눈앞에 있는 저 아름다운 남자는,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허공에서 뿅! 하고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평범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꼭 동화 속에서 방금 튀어 나온 사람 같았다.
"당신, 정체가 대체 뭐-"
제이드가 무어라 말을 꺼낼 겨를도 없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드리앙 데이블로스라고 합니다.”
문밖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한결같이 정중하고, 예의 바른 말투로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에드리앙 데이블로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제이드가 혼자 고민하는 동안 에드리앙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시라도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일이라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시에라 영애.”
영애.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호칭에 제이드는 굳고 말았다. 영애라니. 귀족 가문의 아가씨나 들을 법한 호칭이었다.
그러나 제이드는 누가 봐도 귀족 아가씨랑 거리가 멀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녀가 걸치고 있는 드레스도 다른 시녀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한 걸음을 물러섰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저는 영애도 아니고. 그쪽이 무슨 이유로, 어떻게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편지를 한 장 가져왔습니다. 시에라 영애 앞으로 된.”
“……편지?”
제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에드리앙은 품 안에 손을 넣어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진주 빛의 고급스런 편지 봉투는 처음 보는 밀랍 인장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어디서 온 편지죠?”
“읽어보면 알 겁니다.”
에드리앙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방긋 웃기만 했다.
제이드는 그런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결국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 봉투를 열자, 한눈에 봐도 질 좋은 종이에 까만 필기체로 글씨가 듬성듬성 적혀 있었다.
‘귀하의 윈터 명문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제이드는 첫 번째 문장을 읽자마자 당혹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
'아카데미 입학이라니. 신청한 적도 없는 아카데미에서, 대체 왜 입학서가 날아 온 거지?'
“저는, 아카데미에 입학 신청한 적이 없는데요? 입학 할 생각도 전혀 없고요.”
“당신에게 달리 선택권은 없습니다.”
에드리앙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제이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도 사라진 채였다.
갑자기 바뀐 태도에 제이드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다시,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에드리앙은 제법 진지해진 표정으로 자세를 고쳤다.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이드의 마음에 불안이 조금씩 피어났다.
이 남자.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에드리앙 데이블로스, 윈터의 공주님을 뵙습니다.”
“……이런, 미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