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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달의 학교
작가 : 소수이
작품등록일 : 201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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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순혈의 길
작성일 : 18-02-21     조회 : 268     추천 : 1     분량 : 6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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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있습니다.”

 “……역시.”

 

 제이드는 질린 표정으로 에드리앙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피를 마시다니.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는 유난히 피 냄새에 예민했다.

 

 다른 사람들은 맡지 못하는 미세한 피 비린내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아주 어렸을 적에는 반쪽짜리 뱀파이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남들은 맡지도 못하는 피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고.

 

 “저도, 뱀파이어라고 했죠?

 “네. 귀한 순혈이시죠.”

 “그런데 전 어떻게 피 한 방울 안 마시고 지금까지 살아있죠?”

 

 제이드의 질문을 예상한 건지, 에드리앙은 손쉽게 답변을 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색 눈이 언뜻 일렁였다.

 

 “순혈은 피를 마시지 않고도 꽤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마시지 않으면, 힘이 조금씩 약해지겠지만.”

 “……언젠가는, 피를 마셔야 한다는 말인가요?”

 

 말을 하면서도 제이드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사람의 목에 이를 박고 피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소름이 돋을 만큼 싫은 장면이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에드리앙은 가볍게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인간의 피를 마신다고는 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모습은 아닐 겁니다. 특히나 윈터에서는.”

 “어째서죠?”

 “윈터 아카데미는, 뱀파이어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윈터에서 보내며 인간 세상의 교양과 질서를 배웁니다. 인간의 목을 물어뜯는 건, 별로 교양적이지 못하죠.”

 

 에드리앙은 손끝으로 자신의 목을 톡톡 두드렸다.

 

 “목을 무는 건 사실 뱀파이어 세상에서도 무례한 행위입니다.”

 “그건 왜요?”

 “보통은 반려에게만 허락된 일이니까요.”

 

 반려, 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에드리앙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제이드의 시선이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지만.

 

 그는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고서 제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은 얘기는 윈터에 가서 마저 들려드리겠습니다.”

 “네? 당장 가자구요?”

 

 제이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을 완전한 오밤중이었다. 섣불리 나섰다가 괜히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지금 출발했다가 무슨 위험을 만날 줄 알고, 막 나가자고 해요?”

 “제가 그렇게 못 미덥습니까, 시에라 영애.”

 

 에드리앙은 풀 죽은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뱀파이어 주제에 처량한 얼굴은 또 왜 저렇게 잘 짓는데.'

 

 제이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에드리앙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런 거 안 통합니다, 데이블로스씨. 뱀파이어면서 상처받은 척하지 마세요.”

 “뱀파이어도 상처는 받습니다, 영애.”

 “어쨌든, 안돼요. 짐도 안 챙겼고, 백작가에게도 말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전 아직 당신을 믿지 않아요.”

 “지금 저를 따라오시는 게 나을 겁니다. 나중에 원로회와 마주치는 것보다는.”

 

 제이드는 항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에드리앙의 얼굴을 보고서 멈칫했다.

 

 그는 그녀를 공주라 불렀을 때와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로회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시에라 영애. 당신에게 무얼 요구할지 모르니까.”

 “저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요.”

 “아뇨. 당신은, 너무나 많은 것을 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에드리앙은 단박에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제이드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시에라 영애. 저와 함께 윈터로 향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겁니다.”

 

 파랗게 빛나는 눈에 잠깐 어둠이 서렸다. 심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은 색이었다.

 

 제이드는 어쩐지 그 눈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당장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남아있었다.

 

 “일단 알았어요. 당신 말을 들어보니, 제가 여기에 남아있을 방법은 없는 것 같네요. 그래도 지금 바로 움직이는 건 무리예요.”

 “시간을 달라는 말입니까?”

 “적어도 짐을 쌀 시간 정도는 줘요. 일하고 있는 곳에 보낼 편지도 써야 하고요.”

 “한 시간이면 되겠습니까?”

 “두 시간은 주세요.”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제이드는 피하지 않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기죽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끌려가는 입장이었으니, 이 정도의 요구는 정당했다.

 

 결국 먼저 항복을 한 것은 에드리앙 쪽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십시오.”

 “알았으니까, 저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이드는 강아지에게 명령하듯이 말을 하고는 재빠르게 침실에 뛰어 들어갔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침대로 다가가서 그 아래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침대 아래에 있던 물체가 그녀의 손끝에 톡, 하고 걸렸다.

 그녀는 두 손을 뻗어 침대 아래에 있는 것을 꺼냈다. 무늬 하나 없는 낡은 종이 상자였다.

 

 오랫동안 침대 밑에 방치되어 있었는지 상자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제이드는 상자 뚜껑을 열고서 안쪽에 놓여있던 목걸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목걸이의 끝에는 그녀의 눈을 닮은 초록빛의 보석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보석의 색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얼핏 노란 색과, 푸른색이 섞여서 보이기도 했다.

 

 목걸이는 그녀가 가진 물건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받은, 어머니의 유품. 그녀와 부모님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였다.

 

 제이드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서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드레스 안에 집어넣고는 다른 방으로 향했다.

 

 침실의 옆에는 작은 드레스 룸이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몇 개의 드레스와 액세서리, 가방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제이드는 걸려있는 가방 중 가장 큰 것을 꺼내어 드레스 두 벌과 속옷만 간단하게 챙겼다.

 

 어차피 그녀가 가진 옷으로는 북쪽의 날씨를 견딜 수 없을 테니, 옷은 새로 사야 될 운명이었다.

 

 액세서리는 비싼 것 위주로 담았다. 팔아도 몇 푼 안 되는 것들이었지만,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넣었다.

 

 필요한 물건을 다 챙기고서 제이드는 가방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녀가 거실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드리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챙기셨습니까?”

 “네. 가는 길에 이것저것 많이 사야 하겠지만.”

 “윈터로 가는 길에 마을이 몇 개 있습니다. 거기에 들려서 사죠.”

 “좋아요.”

 

 제이드는 가방을 고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과 물품을 새로 살살 것을 대비하여 그녀는 가방 공간을 반 정도 남겨두었다.

 

 덕분에 가방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에드리앙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바라보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주시죠.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요. 별로 무거운 것도 아니고.”

 

 제이드는 단칼에 거절하며 먼저 문 쪽으로 움직였다.

 

  이왕 나갈 거면 한 시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나았다.

 

 에드리앙은 미묘한 표정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그녀를 따라갔다.

 

 워낙 보폭이 넓은 탓에 그는 금세 제이드를 따라잡았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그리 말하고는 몇 걸음 만에 그녀를 앞질렀다. 제이드는 망설임 없이 앞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가다가 넘어져서 코나 깨져라.’

 

 ***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제국의 밤길은 꽤 평화로웠다.

 

 제이드와 에드리앙은 큰 위험 없이 약 한 시간 만에 수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도를 벗어나니 주위에는 검은 수풀만이 무성했다.

 

 수도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것은 처음인지라, 제이드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듯 에드리앙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에라 영애. 제가 있으니 안전할 겁니다.”

 “글쎄요. 뱀파이어도 죽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뱀파이어라고는 했지만, 제이드의 눈에 에드리앙은 그리 강해보이지 않았다.

 

 굳은 살 하나 없이 하얗고 기다란 그의 손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귀족 도련님의 것처럼 보였다.

 

 “쉽게 죽지는 않습니다.”

 “죽기는 죽는다는 얘기네요.”

 “뱀파이어도 불로불사는 아니니까요. 언젠가는 죽겠죠.”

 

 제 이름은 에드리앙입니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처럼 평온한 음성이었다.

 

 제이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문득 뱀파이어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졌다.

 

 “뱀파이어는 어떻게 죽죠?”

 “보통은 늙어서 영면에 들거나, 혹은.”

 “혹은?”

 

 제이드가 그의 말꼬리를 따라 읊었다. 잠깐의 공백은 긴장감을 더했다.

 

 “산 채로 심장이 뜯겨 나가면 죽습니다.”

 

 에드리앙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잔인한 말을 뱉었다.

 

 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서 시선을 돌렸다.

 

 산 채로 심장이 뜯기다니. 그녀로서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리앙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순혈 뱀파이어는 죽음이 조금 더 까다롭죠.”

 

 순혈이라는 단어에 제이드는 멈칫했다. 듣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순혈이라면,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데요?”

 

 결국 호기심이 찝찝함을 이겼다. 제이드는 에드리앙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질문을 던졌다.

 

 “산 채로 심장을 뜯어낸 다음, 불에 태워야 합니다. 재생할 수 없도록.”

 

 제이드는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말을 들었을 뿐인데도 누군가 그녀의 심장을 건드리는 것처럼 가슴 쪽이 조여 왔다.

 

 불편한 기분을 들킬세라. 제이드는 걸음을 빨리하며 에드리앙과 보폭을 맞추었다.

 

 “저기. 순혈에 대해서 더 알려줄 수 있어요? 아직도 잘 안 믿겨서요, 내가 순혈이라는 게.”

 “순혈은 말 그대로, 가장 순수한 뱀파이어의 피를 타고난 이들입니다. 그들은 일반 뱀파이어들보다 강력하며, 몇 배에 달하는 삶을 살죠.”

 

 에드리앙은 마치 교과서를 읽듯이 막힘없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제이드 역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순혈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 뱀파이어보다 훨씬 아름답고, 다방면에서 뛰어납니다. 또한 아까 말했듯이 일반 뱀파이어에 비해 생명이 훨씬 질겨서 쉽게 죽지도 않습니다.”

 “훨씬 아름답다고요?”

 “네. 다들 시에라 영애처럼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죠.”

 

  ‘아닌 것 같은데.’

 

 제이드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뱀파이어들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하필이면, 눈앞에 있는 남자뿐이었으니까.

 

 그녀가 느끼기로는 에드리앙이 더 아름다우면 아름다웠지, 자신보다 못난 외모는 아니었다.

 

 “그럼, 데이블로스씨도 순혈인가보네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 없으니까.”

 

 작업을 걸 때나 쓸 법한 대사였지만, 제이드는 솔직한 심경을 그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에드리앙이었다.

 

 “낯간지러운 말도 제법 잘 하네요, 시에라 영애.”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서 제이드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덕분에 에드리앙이 빨개진 귀 끝을 문지르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 오늘 안에 다른 마을에 도착하는 것 맞죠?”

 

 그녀는 한참을 걷다가 자리에 우뚝 섰다.

 

 못 걸을 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피곤한 느낌이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몇 시간을 걸었으니까, 피곤할 법 했다.

 

 제이드는 한 손으로 어깨에 뭉친 근육을 꾹꾹 눌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레일루스라는 작은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서 쉬고, 마구간에 가서 말을 살 겁니다.”

 “말은 탈 줄 모르는데.”

 “기꺼이 태워드리겠습니다. 시에라 영애.”

 "윈터까지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뒷말을 덧붙이고서 에드리앙은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레일루스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데, 제이드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순혈들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은 편에 속했지만 그녀는 오랜 기간 동안 피를 마시지 않았으니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제이드는 속으로 투덜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평상시에 운동을 좀 많이 할 걸.

 

 “많이 힘드시면 업어드릴 수 있는데.”

 “사양하겠습니다, 데이블로스씨.”

 

 제이드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의 등에 업히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편안해지긴 했지만, 아직 그를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순혈 뱀파이어라면, 이 정도는 가뿐히 견디겠죠.”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순혈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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