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와 에드리앙은 레일루스에 도착하자마자 여관으로 향했다.
마을이 작은 만큼 여관은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몇 명의 사내와, 서빙을 하고 있는 젊은 여자 한명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손님. 묵으러 오셨어요?”
“네, 방은 두 개로 주시면 됩니다.”
여자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 둘에게 다가왔다. 에드리앙이 웃는 얼굴로 답하자, 여자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허둥댔다.
“네, 네! 물론이죠!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 분 것만 챙기면 될 것 같네요.”
“아, 네! 계단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맨 끝에 방 두 개 쓰시면 돼요! 식사는 가져다 드릴게요.”
제이드는 멀찌감치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새삼 느꼈다. 저 사람 진짜 잘생기긴 했구나. 속으로 감상하던 도중에, 에드리앙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실 텐데 이만 올라가죠, 시에라 영애.”
그는 에스코트하듯이 한쪽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이드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계단은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그리고는 에드리앙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에드리앙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시에라 영애. 도움 받는 것이 불편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일 때는 그렇죠.”
제이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그녀는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도움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는 것이 익숙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이만 들어가서 쉴게요. 데이블로스씨도 쉬어요.”
방 앞에 다다라서야 제이드는 에드리앙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웃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푹 쉬십시오, 시에라 영애. 내일도 갈 길이 머니까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둘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
방에 들어오자마자 제이드는 일단 침대에 뛰어들었다.
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일 끝나고 집에 왔을 때부터 녹초 상태였는데.
그대로 잠도 자지 않고 이 먼 거리를 걸어왔으니 몸이 힘들 만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뱀파이어, 그것도 순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거기까지 끌려갔는데, 사실은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에드리앙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장 그녀에게는 자신이 가진 성씨 말고는 순혈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비밀을 알았다고 죽이거나, 그러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지금까지 뱀파이어의 존재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존재였으니까.
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면 대륙이 발칵 뒤집힐 만한 일이었다.
비밀을 지키려고 사람 하나를 처리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을 터였다.
“순혈이 맞기를 빌어야 되는 상황인가.”
제이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못 참겠다는 듯 침대 위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미쳤지, 제이드 시에라. 그냥 뿌리치고 도망이나 갈 걸 왜 괜히 따라와서는.’
그녀는 속으로 외치며, 침대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 방 앞으로 와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시에라 영애.”
에드리앙의 목소리였다. 제이드는 퍼뜩 침대에서 일어나며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배고프실 것 같아서.”
에드리앙이 말을 하자마자 들으라는 듯이 배가 크게 꼬르륵 소리를 냈다.
제이드는 그가 문 너머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문을 열었다.
“…벌써 자고 일어났습니까? 영애.”
“네?”
“머리가, 조금.”
제이드는 무슨 소리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잔뜩 엉켜서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침대 위에서 난리 쳤던 것을 떠올리고서 얼굴을 붉혔다.
“잠깐만요. 십 분만 주세요.”
에드리앙이 대답할 새도 없이 제이드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덕분에 에드리앙은 식사를 든 채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신 좀 차려라, 제이드 시에라. 미쳤지 정말!”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었다면, 에드리앙은 지금쯤 제이드가 떠올리는 수많은 욕설들을 듣고 놀랐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귀가 조금 밝은 편일뿐이라서, 그녀가 미쳤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제이드는 단정한 모습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뻔뻔한 표정으로 에드리앙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식사, 잘 먹을게요.”
“별말씀을.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럼.”
에드리앙은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제이드에게 식사를 넘겨주고서 방으로 돌아갔다. 제이드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식사를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양호했다. 양고기와 채소가 들어간 스튜였는데, 의외로 맛이 좋았다.
함께 나온 빵도 부드럽고 달았다.
제이드는 말없이 빵을 스튜에 찍어 먹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창밖은 온통 어둠이었다.
은은한 달빛 말고는 주위를 밝힐 만한 불빛이 없었다. 여관 주위에 있는 저택들도 전부 불을 끄고 있었다.
아마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건 술 취한 주정뱅이들과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제이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앞날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
“시에라 영애. 일어날 시간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이드는 비몽사몽 눈을 떴다.
어젯밤에 워낙 피곤했던 탓에 그녀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졌었다. 꿈조차 꾸지 않은 잠은 오랜만이었다.
“……데이블로스씨?”
제이드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예, 시에라 영애.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식사는 미리 시켜 놓겠습니다.”
“알았어요. 이따 봐요.”
발소리가 멀어지자 제이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레이디답지 않은 움직임으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스트레칭을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거 조금 걸었다고, 난리 났네.”
제이드는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몸을 씻고, 짐을 챙기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니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그녀는 놓고 온 것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어제 봤던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에드리앙이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친해진 것인지, 둘은 꽤 가까이에 붙어있었다.
제이드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에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시에라 영애. 준비 다 하셨습니까?”
그녀를 발견한 에드리앙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있던 여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질투를 받는 건 귀찮은데.’
제이드는 여자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에드리앙의 맞은편에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고 어디로 갈 거예요?”
“마구간에 들려서 말부터 살 겁니다. 윈터까지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윈터까지, 여기서 얼마나 걸리죠?”
“이틀은 달려야 할 겁니다. 중간에 마을은 따로 없으니, 여기서 준비를 하고 가야겠죠.”
말을 타고도 이틀이나 걸린다는 건 거리가 제법 멀다는 뜻이었다. 제이드는 아침 식사가 차려진 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출발을 서둘러야겠네요.”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에드리앙은 그녀를 달래듯이 말을 했다. 제이드는 대답하는 대신에 수저부터 들었다.
그녀가 준비하는 동안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인지, 음식을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예.”
제이드가 먼저 음식을 뜨자 에드리앙도 따라서 수저를 들었다.
둘이 대화하는 에드리앙의 옆을 맴돌던 여자는 결국 끼어들지 못하고 자리를 피한지 오래였다.
‘특별히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그리 생각하며 제이드는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어젯밤에 먹었을 때보다는 조금 딱딱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이드는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준비해야 되는 게 너무 많아. 옷도 새로 사야하고, 식량도 사야하고.’
사야하는 것은 많은데, 제이드의 가방 속에는 고작 해봐야 은화 두어 개 정도밖에 없었다.
그 걸로는 제대로 된 겨울 옷 한 벌도 사기 힘들 터였다.
오는 길에 백작가에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다시 거기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을 확률은 적었다.
지난 달에 밀린 봉급을 당장 받아낼 방법도 딱히 없었다.
한마디로 제이드는 지금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 여관비와 식사비를 전부 에드리앙이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번 한 번 뿐이지, 가는 내내 그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제이드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 뿐이었다.
“…데이블로스씨. 부탁이 있어요.”
제이드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비장한 표정으로 에드리앙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드리앙도 먹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시에라 영애.”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다음 말을 꺼냈다.
“돈 좀 빌려줄래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에드리앙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에라 영애. 그걸 걱정하고 계셨습니까?”
“걱정해야죠.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
"옷을 못 사면 거기 가서 얼어 죽을 지도 모르는데."
제이드는 볼멘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남에게 도움 받는 게 불편하다고 한지가 바로 어제인데. 그녀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창피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탁했는데. 에드리앙의 반응은 가볍기만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데려왔으니, 영애가 필요로 하는 건 전부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공짜로 도움 받는 건 조금 그러니까. 나중에 꼭 갚을게요.”
“갚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굳이 그러시겠다면야.”
에드리앙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손가락 하나를 길게 폈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퍼졌다.
“나중에 소원 한 번 들어주십시오. 시에라 영애.”
뱀파이어가 요구하는 소원이라니.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집을 달라는 소원은 안돼요. 그건, 제가 가진 전부니까.”
“물론입니다.”
확답을 받고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제이드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빵과 스튜를 차례대로 해치우고서, 그녀는 부른 배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출발해요, 우리.”
“어디부터 들리고 싶습니까?”
“옷부터 보러 가죠. 그게 제일 비쌀 테니까요.”
그녀는 가장 비싼 옷부터 산 다음, 남은 예산을 최대한 아낄 생각이었다.
옷부터 사자는 그녀의 말에 에드리앙이 앞장서서 여관을 나섰다.
“제 뒤로 따라오십시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데이블로스씨는 이 마을에 자주 왔나 봐요?”
능숙하게 길을 찾아가는 에드리앙을 보며 제이드가 물었다.
“한두 번 와봤습니다. 시에라 영애, 옷은 여기서 보시면 됩니다.”
에드리앙은 제이드가 더 질문하기 전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조그마한 옷 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근처로 다가가자 차분한 분위기의 중년 여성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옷을 보러 오셨나요?”
“리안느 왕국 방향으로 갈 예정이라, 최대한 따듯한 옷으로 한 벌 준비해주십시오.”
“어느 분 것을 준비해드리면 될까요?”
“이쪽 여성분에게 맞는 걸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게 주인은 제이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소리 없이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고 한참 뒤에, 두꺼운 옷을 몇 벌씩이나 들고 나왔다.
“아가씨가 입기에는 이런 옷이 좋을 거예요. 리안느 왕국은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너무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불편하니까. 이렇게 장식은 따로 없는, 심플한 드레스가 나아요. 아가씨 몸매가 예뻐서 너무 헐렁한 디자인보다는, 살짝 붙는 디자인이 좋고요.”
“아… 그런가요?”
“그럼요. 이건 위에 망토와 같이 나온 드레스인데, 천을 여러 겹 덧대어서 무척 따듯할 거예요. 아가씨 눈이랑 어울리는 녹색이기도 하고요.”
주인은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고 옷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제이드는 평상시에 친한 지인들로부터 옷을 물려받거나, 가장 저렴한 드레스만을 구입했기에 이런 과정이 어지럽기만 했다.
게다가 그녀의 눈에는 주인이 들고 있는 드레스는 터무니없이 비쌀 것처럼 보였다.
귀족 아가씨들이 입는 것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어쨌든 평민으로 살아온 그녀에게는 과분하게 느껴졌다.
‘조금 춥더라도, 이것저것 걸치면 되니까.’
더 저렴한 옷으로 보여 달라고 하려는 찰나에 에드리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좋겠군요. 망토랑 신발, 모자까지 하나씩 다 주십시오.”
“저기, 데이블로스씨?”
에드리앙의 말에 주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가 반대하기도 전에 옷은 어느새 포장이 되어 그녀의 품에 쥐어졌다.
“탁월한 선택이네요, 손님. 원래는 금화 3개를 받아야 하는데, 손님이 워낙 안목도 좋으시고 아가씨도 예쁘시니까 특별히 2개만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리도록 하죠.”
에드리앙은 태연하게 답하며 주인에게 금화 두 개를 건넸다.
제이드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에드리앙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터무니없이 비싸잖아요! 그거!”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여기에 있는 옷 중에, 가장 질도 좋고. 윈터의 공주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그 놈의 공주 소리. 제이드는 당장에라도 쏘아붙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나, 참았다.
어쨌든 돈을 내는 것은 그였고 그녀는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제이드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새로 산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비싸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마찬가지였다.
“…고마워요, 데이블로스씨. 잘 입을게요.”
“별 말씀을.”
둘은 옷가게를 나서서 바로 식량을 사러 갔다.
이틀 동안 넉넉하게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사고서 이번에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에 도착하자, 말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에드리앙이 주인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제이드는 마구간에 있는 말들을 구경했다.
지금까지는 말을 타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길에서 지나다니는 걸 보는 것 말고는 가까이에서 말을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말에게 다가갔다. 달빛처럼 새하얀 털과 갈기를 가진 말이었다.
“예쁘다, 너.”
제이드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새하얀 몸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윤이 났다.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말이 마음에 듭니까, 시에라 영애.”
“아, 깜짝아.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면 어떡해요, 데이블로스씨!”
제이드는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에드리앙은 기척도 없이 그녀의 곁에 와있었다.
“시에라 영애가 원하시면 이 말로 데려가죠.”
“이 말도 꽤 비쌀 것 같은데.”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장난스럽게 말하며 에드리앙은 제이드와 눈을 맞췄다.
“윈터의 공주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