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과 매일 밤 악몽을 꾸는 것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원어민 선생님은 언제나 그랬듯 이상한 질문을 침착하게 잘도 말했다. 다소 모호한 질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결국 학생들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건 뭘 뜻하는 거죠?”
“뭐, 예를 들면 귀신이라거나, 특이현상이라거나, 그런 게 되겠죠.”
원어민 선생님은 더 질문이 있냐는 듯 학생들을 쭉 둘러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15초 재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순식간에 음소거를 한 듯 교실이 조용해졌다. 열심히 샤프를 종이 위에 부딪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나도 샤프를 들었다.
귀신을 보는 것과 악몽을 꾸는 것. 둘 다 최악인데.
난 생각하다 말고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더니 급기야 어제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난 애써 샤프를 바로 잡았다.
토플 말하기 시험에서는 질문을 보여주자마자 15초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45초에서 60초 동안 답하는 시간을 준다. 한마디로, 어떤 질문이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순발력과 대처능력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토플학원에서는 학생들이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별별 이상한 질문들을 다 가지고 왔다.
그렇다 해도 귀신과 악몽이라니.
무서운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둘 다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물, 귀신, 어둠, 높은 곳 등등 세상에서 무서워할 수 있는 건 전부 무서워하는 나니까.
하지만 굳이 고르자면 아무래도 이쪽이 더…….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칠판 쪽에서 삐빅거리는 알림음이 크게 울렸다. 덕분에 학생들은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알림을 끄고 학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야말로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다들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내 주위를 눈으로 훑다가 옅게 인상을 썼다.
아, 눈 마주쳤다.
“그럼, 실비아.”
원어민 선생님이 밝은 얼굴로 내 영어 이름을 불렀다.
이래서 눈 마주치면 안 되는 건데, 방심했다. 하필이면 컨디션도 안 좋은 오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선생님은 핸드폰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한 번 대답해볼까요? 시간은 60초 줄게요. 하나, 둘, 셋, 시작!”
망했네, 정리 다 못했는데.
난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말은 꺼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음……. 저는……. 귀신을 보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일단 주장은 했고, 그다음에는.
난 겨우 머리를 굴리며 생각이 닿는 대로 내뱉었다.
“왜냐하면 저는 악몽 꾸는 것을 매우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악몽을 꾼다면, 저는 잠을 잘 자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피곤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는 이게 끝인데, 알림음은 울리지 않았다. 시간을 채우기 위해 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저는 공부도 제대로 못할 거고, 다른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도 못 할 거고, 또…….”
아, 이제 진짜 없는데.
원어민 선생님의 눈치를 슬쩍 봤지만 그는 그저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될 대로 돼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걸 저만 본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고맙게도 알림음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든 이유는 적절하지 않았다. 애초에 양쪽 모두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알기에 원어민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는데, 다행히 항상 친절한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했어요. 마지막 이유는 좀 그랬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말해보도록 해요.”
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어민 선생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토플 말하기 시험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이유를 대서 계속 말을 이어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이유가 많이 있으면 되는 거죠. 아무도 여러분이 정직하게 말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는 모르잖아요?”
그래,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왠지 진실 되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 수업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여러분과 정이 들었는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원어민 선생님이 살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아쉽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순간, 원어민 선생님의 시선이 내게서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가 날 보면서 더 짙게 웃음 지었다고.
착각인가?
“열심히 배웠으니까 곧 시험을 보겠죠? 다들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원어민 선생님의 마무리 멘트에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 그걸로 수업은 끝이 난다. 짐을 챙기는데, 옆에서 율이 갑자기 환호했다.
“아싸! 나 오늘 발표 안했다!”
“좋겠네. 그래도 저번에는 했잖아.”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율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키득거렸다.
“나 그때 완전 당황했잖아. 무슨 질문이, ‘오리 크기의 말 열 마리, 아니면 말 크기의 오리 한 마리. 둘 중에 하나 선택해서 싸워야 한다면 뭘 선택하겠느냐’였나? 와, 진짜 이유가 전혀 생각 안 나는데 발표 시키니까!”
“너 당황한 건 옆에서도 보였어. 얼굴 진짜 새빨개졌으니까.”
“아니, 생각을 해봐. 커다란 오리랑 싸우면 이기기 힘들 것 같고, 작은 말 여러 마리랑 싸우면 빨라서 내가 못 쫓아갈 것 같은데 어떻게 해!”
율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하긴, 좀 어려운 질문이긴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커다란 오리를 선택한다고 해서 진짜 내 앞에 오리를 대령해놓고 싸우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작은 말을 선택한다고 해서 진짜 그게 현실이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항상 고민하게 된다. 이걸 선택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쩌지, 하는 식으로.
오늘도 그렇다. 귀신을 보는 걸 선택한다고 해서 그게 현실이 되는 것도 아닌데, 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귀신을 보게 되면 어쩌지, 하고.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난 피식 웃었다. 웃자 뇌가 머릿속에서 춤을 추는 듯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가방을 싸고 있던 손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다가, 난 가만히 눈앞을 응시했다.
칠판 앞에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기대서서 교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게 강사는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다른 반 학생이 친구를 찾으러 왔나 싶었지만, 기다리는 눈치는 아닌 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여유로워 보이는 게 왠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데.
방금, 눈 마주치지 않았나?
“시아야! 무슨 생각해?”
“어? 아, 그게.”
난 여전히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 아무도 없는데?”
“아니, 저기 칠판 앞에-”
난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방금까지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학생들이 전부 빠진 교실의 칠판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교실엔 나와 율이 전부였다. 율이 나를 툭치며 웃었다.
“무슨 소리야, 너 가방 늦게 싸는 바람에 사람들 다 빠진지도 꽤 됐는데.”
“어? 아니, 그게-”
“-무섭게 왜 그러냐, 너. 안 그래도 겨울이라 추운데 무서운 얘기하면 재미없어!”
율이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난 맥없이 밀려나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사람이 있었는데.
난 율을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진짠데? 근데 그 사람, 겨울인데 반팔 입고 있었어.”
“야, 아무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지금 여름 아니다! 자꾸 호러 특집 만들지 마!”
율은 눈을 흘기며 날 더 열심히 밀었다.
거짓말 아닌데.
걸음을 옮기는데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율이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율에게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내 탓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인사를 한 뒤, 내 방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열 시가 지나고 있는 게 보였다.
대충 가방을 의자 위에 던져놓고 거실로 나와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텔레비전을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다가, 포기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분명히 방학인데 어째 학기 중일 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아픈 것도 한 몫 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학생이 되면 좀 많이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자격증 걱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무 걱정 없이 학교 공부만 하던 나였다. 하지만 결국 주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학년이 끝난 겨울방학을 틈타 토플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 수업도 오늘이 마지막이지만.
방학 두 달 내내 학원 다니고, 이제야 수업 끝나나 싶으니까 바로 개강이라니 조금 우울하기는 하다. 게다가 개강하자마자 학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씻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 그 때였다.
“분명히 아까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내 정신을 깨워놓았다.
“아닌가……?”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실 때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여동생이 학원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3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사람 목소리라니. 그것도 웬 남자의 목소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주위를 훑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난 미간을 좁히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 집에 있는 건 나 혼자였다.
잘못 들었나?
난 고개를 모로 기울이다 실없이 웃었다.
아프다고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보다. 씻고 잠이나 자야지.
난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불행히도, 한 발자국을 내딛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서야만 했다.
내 방에서, 한 남자가 머리를 헤집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데! 아, 분명히 아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남자와 내 눈이 정확히 허공에서 얽혔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까 그 남자였다.
학원에서, 칠판 앞에 기대 서있던 남자. 그가 지금 내 앞에 서서 얼빠진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우리 집 거실에서.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여는데 갑자기 세상이 핑 돌았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더니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아, 지금은 안 되는데. 지금 쓰러지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난 그대로 의식을 놓았다.
시아가 휘청거리자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허리를 재빠르면서도 조심히 감싸 안은 그는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곤란하네…….”
이 상황을 외면해버리기로 택한 그녀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잘만 자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는 이상한 느낌에 손을 그녀의 이마로 가져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마가 불덩이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렸다.
어쩐지 오늘 안색이 많이 안 좋다 싶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그는 그녀의 방에 들어가 그녀를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간간히 내쉬는 숨이 뜨거웠다. 그는 걱정스레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다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불행히도 남자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까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던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