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천장이었다.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고개만 돌려 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몸을 일으키다가, 머리가 띵 울려서 반사적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직도 열이 나나.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뜨거운 건지 어쩐 건지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난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서랍을 뒤적이다 체온계를 꺼냈다.
열을 재니 삑 소리와 함께 38이라는 숫자가 깜빡였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힘이 빠져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아프니까 입맛도 없고 병원에 가기도 귀찮았다.
역시 어제 병원을 갔어야 했나.
하지만 어제는 학원에 가느라 그럴 시간도 없었다. 다시 눈을 감다가, 불쑥 떠오른 기억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제, 어떤 남자가 분명 우리 집에.
기억을 더듬으려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팠던 탓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그 남자 앞에서 쓰러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집안 상태도 그렇고, 내가 멀쩡히 누워있는 것도 그렇고, 너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역시 꿈인가.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또 어제 입고 나갔던 그대로였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난 고민하다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아무 일도 없으니 된 것 아닌가. 만약 그 남자가 침입했었던 게 사실이라면 가족들이 돌아왔을 때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였다.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슬쩍 고개를 빼 방 밖을 내다보았다.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자냐. 어제 씻지도 않았지?”
“…….”
“옷에 밖에서 묻히고 온 먼지 그대로일 텐데 그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자고. 들어오자마자 씻으라고 했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잔소리였다. 난 대충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방 안인데도 한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휘적휘적 거실로 향하자 아빠가 다시 날 불러 세웠다.
“어른이 말하는데 대답도 안하고. 아빠가 집에 들어왔는데 인사도 안하냐?”
난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죄송해요. 제가 좀 아파서…….”
“뭐?”
말 안하려고 했는데.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어제부터 열이 좀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대답하자 아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난 화장실로 걸어가다 아빠의 표정을 살폈다. 아빠는 딱 내가 예상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다. 나를 경멸하는 표정이었다.
아빠가 혀를 찼다.
“어제부터 아팠으면 바로 병원을 가야지 여태 안 가고 뭐했어? 시간도 남아도는 애가.”
“…….”
“아프면 주변 사람들만 고생시키는 거야. 네가 귀찮아서 병원 안 간 걸로 돈도 더 많이 나가고, 다른 사람들 시간도 뺏는 거라고.”
아빠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픈 것도 자기관리 제대로 못 한 네 잘못이야. 씻기 전에 병원이나 갔다 와.”
아빠가 흘겨보며 말을 마치는 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난 방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조용히 눈으로 쫓다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병원에서는 감기몸살이라며, 약 꼬박꼬박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는 것으로 진단을 끝냈다.
병원이 집에서 먼 편은 아닌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아빠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아픈 것도 자기관리 제대로 못 한 네 잘못이야.
예전부터 그랬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전부 내 잘못이었다.
동생이 어릴 때 경기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나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동생의 경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이 나야했다.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아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내 탓이었다. 부모님은 무조건 네가 잘못했겠지, 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뭐, 성폭력도 피해자가 잘못한 거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 부모님이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라는 걸 아는데, 난 그럼에도 항상 그 말들에 상처를 받고는 했다.
뿌연 하늘 아래 부는 바람이 오늘따라 특히 매섭게 느껴졌다. 한숨을 쉬자 입김이 공기 중에 하얗게 흩어졌다. 아파트 앞에서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난 몸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집에 아빠가 계실 줄 알았는데, 신발장에 신발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가셨나, 생각하며 외투를 벗고 약봉지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난 대충 약만 챙겨먹은 다음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그 후 몇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정말 죽은 것처럼 먹은 것도 없이 잠만 자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내 잠을 깨운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막 시침이 숫자 9를 지나고 있는 게 보였다. 무기력하게 이마를 짚는데,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침묵을 깼다.
“……는 도대체 뭐였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침대에서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어제 착각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한 번 들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제 본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꿈이, 아니었구나.
난 헛숨을 토해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밖인가?
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내가 신중히 움직이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가끔가다 저런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근데 쟤는 아니었잖아.”
거실까지 나갔다가, 남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 어정쩡하게 들키면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근데 쟤는 밥도 안 먹고 그냥 자버리면 어떡해. 벌써 몇 시간째야.”
조금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경계하며 난 잠깐 두리번거리다가 곧 결심을 굳혔다. 조금 있으면 부모님이 돌아오실 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저러다가 뭔 일 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난 숨을 죽이며 부엌 안으로 들어가 식기건조대로 손을 뻗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가운데 끼어있는 칼을 빼들었다.
“원래 아니었는데 저렇게 되는 경우도 있나? 아, 근데 오늘은 또 왜 못 보는 건데…….”
소리가 나는 쪽은 안방이었다. 칼을 꼭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난 애써 숨을 참으며 그쪽으로 향했다.
“역시, 착각이었나…….”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나는 방문 바로 옆 벽에 바짝 붙어 섰다. 긴장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안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났다.
“나 왜 실망하지.”
난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설마 착각이 아니길 바랐-”
셋.
마지막 숫자를 헤아리자마자 방문 쪽으로 몸을 틀며 칼을 허리 높이로 들어올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안방 침대 앞에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더 확신했다.
저번에 봤던 그 남자다. 학원에서 봤고 집에서 봤던, 겨울인데도 하늘색 반팔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 남자. 복장은 어제와 똑같았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스물 둘인 나와 동갑이거나 더 어릴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동안 남자와 나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손이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며, 난 겨우 입술을 뗐다.
“당신 누구야.”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칼을 든 건 내 쪽이었다. 그래서 난 남자가 물러설 거라고, 아니면 최소한 당황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몸을 한 번 움찔했을 뿐 오히려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
오히려 뒤로 물러선 건 내 쪽이었다. 난 칼을 가슴 높이까지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물러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래서는 내가 칼을 들어봤자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깨닫자 칼을 든 손의 떨림이 한층 심해졌다. 남자의 시선이 내 손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가 뻗었던 손을 거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먼저 내려놓고 얘기해.”
“누구냐고 물었어.”
“위험하니까,”
남자가 한 발자국 물러서며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마쳤다.
“그거 내려놓고 얘기하자.”
그의 반응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난 여유를 가장하며 한 번 웃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상황 파악 제대로 못하나 본데, 이거 당신 위험하라고 들고 있는 거야. 똑바로 말해.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지.”
“내가 아니라,”
남자가 자신의 뒤를 확인하며 또 한 발자국 물러났다.
“너 다칠까봐 내려놓으라는 거야.”
“…….”
“너 지금 손 떨어. 놓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상황에 맞지 않게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하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아파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난 일부러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칼을 더 꽉 쥐었다. 난 단호하게 그의 요청을 잘라냈다.
“싫어. 무단침입 한 주제에 수작 부리지 마.”
내 말에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무리 여자고 그는 남자라고 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칼을 들고 있는데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눈까지 팔며 중얼거렸다.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 한 번 한숨을 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으나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그가 말했다.
“그럼 내 정체부터 밝힐게.”
정체?
난 미간을 좁혔다.
물론 누구냐고 내가 묻기는 했지만 ‘정체’라고 부를만한 거창한 걸 물은 건 아니었는데.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가 말했다.
“난 인간이 아니야.”
실없는 소리에 하마터면 칼을 내릴 뻔했다.
그냥 미친놈인건가. 난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그 와중에도 여유로웠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지금 그런 걸 물을 때야? 말해봐. 안 놀랄 테니까.”
“혹시라도 놀라서 칼 떨어뜨릴까봐 그래.”
“그럴 일 없어.”
난 단칼에 그의 쓸데없는 걱정을 잘라냈다. 그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고, 난 그게 탐탁지 않아 인상을 썼다. 자꾸 얕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욱 똑바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유령.”
“…….”
“인간이 아니라 유령이야.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몇 번 웃은 내가 칼을 더욱 높이 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평온하던 그가 처음으로 눈썹 한 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안 믿겨?”
“그걸 믿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럼 증명해볼까?”
난 다시 미간을 좁혔다. 그는 대답이 없는 나를 보다가, 이번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데 그 전에 제발 그 칼 좀 내려놔주면 안 돼? 진짜 이거 보면 놀라서 떨어뜨릴 것 같아서 그래.”
애절하게까지 들리는 그의 부탁을 들으며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뇌가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포기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