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왔느냐?”
“...!”
백발의 노인이 흑의의 건장한 사내에게 지긋이 물었다.
8척 장신에 흑의를 걸친 사내의 눈은 깊고도 맑았다.
사누라 불리는 남자는 이제 갓 17세가 넘은 듯 보였다.
사누는 공손히 예를 갖추어 작은 백자를 노인 앞에 내려놓는다.
반 자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백자 주둥이는 호리병과 닮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흐음!”
노인의 긴 탄식이 이어졌다.
“애썼다. 그만 물러가거라!”
...!
노인이 사내를 물리고, 가만히 백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휘이잌!’
바람소리인가 휘파람소리인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들리지 않을 이상한 공명음이 노인 앞에 놓인 등잔불의 불꽃을 거칠게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보이지 않는 대상이 노인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어떤 인기척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방 안에서 노인이 다시 묻는다.
“말씀하시지요!”
노인의 거침없는 물음에 진중한 저음의 파장이 두 평이 안 되는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어쩌시렵니까?’
저음의 파장, 그 기음을 전해오는 신위는 놀랍게도 태종 이방원이었다.
“허허...어쩌다니요? 소승이 어찌...”
백발과는 달리 검은 눈썹이 귀에까지 닿은 노인은, 훗날 정조에게 불법을 전한 보경 대사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외다.’
“이미 예견 된 일이옵니다.”
‘대사의 신명은 언제 펼치실 것인지요?’
“소승의 소업은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그럼, 신도 움직이겠습니다.’
“...!”
대사는 합장을 하고 예를 갖췄다.
잠시 일렁이던 호롱불의 불꽃이 파란색을 띄우다가 보라색, 이내 검은 색으로 변하다 다시 백광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불과 세 시즌 전의 일이었다.
검은 잿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탁한 대기에 한 줄기 은은한 역광이 비추는가 싶더니 이내 시리도록 찬, 달 빛이 주변에 내려앉고 있었다.
'ㅅ...ㅉ...'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기 시작했다.
‘흐으으...흐읔!’
사람의 소리인 듯, 아니 사람의 소리라고 예상하기 힘든 처참한 통곡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곳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창경궁 내의 문정전이었다. 그 한 복판에 검은 색 물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굵은 동아줄에 칭칭 옭아매진 뒤주였다.
그 안에 정현세자(사도세자)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산, 산아...부디...이 못난 아, 아비의...”
정현세자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아비의...그늘에...”
그 때였다.
희뿌연 달을 마치 용의 형태를 한 검은 구름이 가리는 순간, 문정전의 짙푸른 담벽을 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위가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든 그 순간에 순식간에 문정전 한 복판에 놓인 뒤주를 향해 소리없이 다가오는 그것은 흑의를 걸친 사누였다.
“누구냐?”
문정전을 지키는 금군이 거칠게 물었다.
“클클클...”
기분나쁜 소리로 희죽대던 남자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훌쩍 문정전의 담을 넘었다.
“잡아라!”
‘삐이잌!’
금군은 서둘러 호각 신호를 울리며 남자의 뒤를 쫓았다.
뒤주 앞에 서둘러 무릎을 굽힌 사누는 품안에서 작은 백자 한 병을 꺼내, 뒤주 앞에 내려 놓았다.
“세자 저하!”
“사누?”
“네! 저하 소인입니다. 이제 가셔야 할 때이옵니다.”
“허허허...”
“잡아라! 침입자가 있다. 놈을 잡아라”
문정전으로 들어서는 금군들의 일사분란한 발자국 소리가 순식간에 뒤주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저하!”
“...!”
급하게 정현세자를 부르던 사누는 세자의 혼백이 백자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고는, 서둘러 백자의 주둥이를 붉은 천으로 막았다.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백자를 가슴 안에 품은 사누는, 잠시 하늘을 향해 힘없는 미소를 흘리더니 이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금군의 이목을 끌면서 뒤주로 다가오는 남자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젠장...한 발 늦었군...”
남자의 얼굴이 일순 심하게 일그러지는가 싶었다. 이내 몇 번의 경쾌한 발구름을 하더니, 십여 장 떨어진 문정전의 담을 훌쩍 넘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