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도시도 모두 잿빛이었다. 그런 잿빛 아래 서있는 청년은 타인의 피와 자신이 입은 상처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몸과 입이 검붉은 피를 바닥에 토해내자 바닥에 닿은 부분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하지만 청년의 눈에는 그런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흐릿한 눈에는 심장에 새빨간 꽃을 한 송이 피우고 숨이 끊어진 한 남자의 시체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때는 귀찮게도 생각했지만 싫어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중위....... 루모스 중위.........”
그는 애써 루모스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장난치는 것이라고, 그가 고백해오면 자신이 밀어내기만 해서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며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그의 시체에 손을 올렸다. 장난치는 거라면, 심술부리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난다면 모두 용서하겠다고 밀어낸 일도 전부 사과하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손이 올라간 뺨은 혈기 없이 창백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미세한 온기는 식어가며 그의 손보다도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점차 흔들림이 커지며 물기가 어려 들었다. 그리고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과 함께 오열을 터뜨렸다.
“이건 아니잖아! 일어나, 일어나라고 루모스 중위!”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루모스를 보면서 청년은 피눈물을 흘렸다. 기억 속 그의 고백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와 비수가 되어 들어왔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 서로 다른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말, 세상이 자신을 적으로 돌려도 자신은 곁에 있겠다던 말. 그 모든 게 비수가 되어서 꽂혔다.
“.........잔인하잖아.......”
청년은 루모스의 시신을 품에 안은 채 허무한 듯 중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것도, 남자로써 최악의 성별을 판정받은 것도 신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스스로 극복해가며 넘겨왔건만 신은 그의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자신이 이뤄낸 피투성이의 명예 이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 중에는 루모스, 그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이번 총력전이 끝나면 전부 해볼 심산이었는데.......”
그는 울면서 루모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총력전이 끝나고 네가 고백하면 그때는 받아들이자. 상관과 부관 사이가 아닌 평범한 연인처럼 데이트나 스킨쉽이나 못했던 것들을 서툴지만 해보자라고 생각했다고 이제 와서는 이뤄지지 않을 후회 섞인 말일 뿐이었다.
‘쿨럭’
새카만 피가 입에서 튀어나와 루모스의 얼굴에 묻어나고 그 옆으로 청년의 몸이 쓰러졌다.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어갈 생각으로 가만히 있던 그에게 또각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해진 눈앞에 새카만 하이힐을 신은 검은색 일색의 여인이 새빨간 입술만 드러낸 채 그의 앞에 서있었다.
“진 람파스. 맞지요?”
“......누구지.......?”
여인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은 채 죽어가는 그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그를 되살리고 싶지 않으세요?”
그 말에 진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죽어가는 눈을 가늘게 떠서 그녀를 보던 진은 정말 그를 되살릴 수 있느냐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능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당신과 그의 영혼을 걸고 계약을 해야 합니다.”
그 말에 멈칫한 진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물론 그냥 계약하라고는 안합니다. 3가지 조건을 드리지요.”
그녀가 제안한 조건은 간단한 듯 복잡했다.
첫 번째는 100송이의 장미꽃이 시들어 떨어지기 전까지 기한을 준다는 것.
두 번째는 이 계약을 회귀하고 나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것
마지막은 기한까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행복해지라는 것
이 3가지를 이행하지 못할 시 진과 루모스 두 사람의 영혼을 그녀가 거두어 구원조차 받을 수 없는 지옥으로 인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때요? 당신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잖습니까?”
“..........”
“시간도 없는데 이대로 저 원망스러운 신이 내린 운명 아래 잠들 건가요?”
그 말에 진의 머릿속에 지나간 것은 루모스의 첫 고백 후의 모습이었다. 포기하지 않을 거라며, 햇살 같았던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달라지고 싶었다.
“..........걸겠어. 하지만 절대로 내 영혼과 이 녀석의 혼은....... 당신의 소유는 되지 않아..........”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이 호선을 그려나갔다. 그녀와 진 사이에 두 개의 모래시계가 나타나더니 진의 가슴에는 계약의 표식이 새겨졌고, 모래시계의 모래는 역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행운을 빌게요. 진 람파스.”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라는 일말의 불안감을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