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맥 파랜드 감독의 추천을 받은 나와 구단 이사회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나는 구단 사무실로 갔다.
구단 이사회에선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앉아 있던 이사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래, 맥 파랜드 감독이 신병을 이유로 감독직을 사퇴하면서 후임으로 자네를 추천했네. 그동안 U-21 팀 코치로서 여러 선수를 육성, 재활하는 데 공헌했기에 U-21 팀 감독 대행으로추천하겠다는 얘기였네. 이사회에서도 전원 찬성했네.
어떼, U-21 팀 감독을 맡아 볼 텐가? 주급은 지금의 2배로 책정하지.”
“주급은 상관 없지만,(상관 없는 게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요구가 있습니다.”
“무언가?”
“그동안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EPPP 정책 카테고리 2등급으로 올라가고 The FA England DNA 정책을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 정책일세.”
“그건 EPL뿐만 아니라 챔피언십, 리그1까지 모두 72개 구단이 합의한 정책입니다. 노팅엄 포레스트 구단이 앞으로도 프로구단으로 생존하려면 더 나아가 리그1로 강등당하지 않고 챔피언십에서 승격하여 프리미어 리그에 올라가려면 튼튼한 저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챔피언십 리그의 스타 선수 몇 명 영입하고 감독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좋아.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네.”
“검토만으로는 안 됩니다. 즉각 시행하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이 친구가?! 그게 인터뷰하는 사람이 할 말인가?”
“잠깐!”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알 하사위가 입을 열었다.
“그 조건이면 감독 대행을 하겠나?”
“네.”
“그래. 도입하겠네.”
“그럼 좋습니다. 맡겠습니다.”
“다만 이번 시즌은 강등되지 않는 게 먼저일세. 3부 리그에 가도 시행은 하겠지만 우선 강등을 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팀을 운영해야 하네. 이번 시즌 강등만 안 당해도 대대적으로 투자해서 시행하겠네.”
“알겠습니다.”
U-21 팀의 임시 감독이 되어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팀의 기본적인 방침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 팀의 방향을 육성에 맞추느냐, 재활에 맞추느냐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도 저도 아닌 행보를 걸어왔지만 그동안 미온적으로 시행되었던 EPPP 정책과 The Fa 정책의 전면적인 시행을 위해 구단 수뇌부와 담판을 지었고, 나의 임시 감독직을 걸고 강하게 주장한 바 결국 시행하기로 했다.
EPPP는 Elite Player Performance Plan의 약자로 유소년 정책의 완전한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정책이다.
EPPP 정책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클럽의 4단계 카테고리화로, 모든 변화가 이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카테고리에서 1등급은 유소년 클럽에 쏟는 예산으로 최소 230만 파운드, 한화로 약 35억 원) 이상의 예산을 쓰고 18명 이상의 코칭 스태프를 둬야 했다.
당장 성적을 올리는 데 급급한 노팅엄 포레스트로서는 유소년에 많은 예산을 투자할 수 없었고, 코칭 스태프도 많이 고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EPPP 클럽 등급이 4단계였고, 그에 따라 상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PPP 등급이 높은 클럽들, 특히 EPL 빅클럽들이 클럽의 유망한 유소년들을 마구잡이로 영입해 가도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었다.
특히 이전엔 클럽에서 90분 이상의 거리가 소요되면 U-16 선수들을 영입할 수 없었고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면 U-12 선수들을 규정이 철폐되어 이제는 잉글랜드 전역에서 제한 없이 영입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만큼 유소년에 투자하게 됨으로써 선수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장점도 있었지만 재정이 취약한 노팅엄 포레스트 같은 구단은 EPL의 빅클럽처럼 큰 돈을 투자할 수 없었기에 제대로 된 전력분석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반협박성 요구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구단에선 1군 선수단뿐만 아니라 U-21, U-19, U-16~9팀까지 비디오 촬영을 통해 선수들이 자신의 플레이를 곧바로 보고 스스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고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다.
이는 선수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축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다 데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단의 등급이 4등급에서 2등급으로 올라가면, EPL 구단에서도 함부로 노팅엄 포레스트의 유소년 유망주와 계약을 맺지 못하게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그 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아카데미를 발전시키면 2등급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프리미어 리그에 올라가서 투자를 확대한다면 1등급에도 올라갈 수 있었다.
노팅엄 포레스트 U-21 팀의 기조를 육성으로 확정한 후 나는 게임 모델을 선택했다.
게임 모델이란 내가 감독으로서 어떤 축구를 하고 싶은지 정하는 것이다. 압박 축구를 할 것인지, 수비 축구를 할 것인지, 패싱 축구를 할 것인지, 실리 축구를 할 것인지 확실한 방향을 정하고 그에 따라서 전술을 정하고 출전 엔트리를 짜는 일이다.
이전 감독인 맥파랜드는 4-4-2를 기본 시스템으로 해서 공수의 균형을 추구하는 혼합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전략적인 유연성이 없는 시스템이었다. 고전적인 4-4-2 시스템에 킥앤 러쉬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잉글랜드 스타일의 축구를 추구했다.
그에 더해 상대방에 대한 전략적인 분석이나 구성원에 따른 세부적인 전략 없이 경기를 치러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까지 U-21팀의 운영은 U-21 선수들의 육성보다는 1군에서 부상이나 콘디션 난조에 빠진 선수들의 재활과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U-21 선수들 중에서는 일부 유망주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어쨌든 경기는 계속 이어졌고 팀의 시스템을 정하긴 해야 했다. 이미 시즌이 2/3 이상 진행된 이상 전임 감독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자체를 전부 바꿀 수는 없었다. 선수들이 4-4-2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는데 단번에 바꾸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그래서 나는 4-4-2를 기본으로 상대와 선수 구성에 따라 4-4-1-1이나 4-1-3-2, 4-1-4-1 등의 시스템을 활용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3백 시스템을 도입하기보다는 4백 시스템을 바탕으로 상대에 따라 수비형 미드필더를 기용하거나 공격형 미드필더를 기용하는 등의 변화를 주기로 했다.
U-21 선수들의 능력치는 대부분 낮은 편이어서 레귤러 팀의 콜업을 받을 선수는 거의 없었지만 그나마 봐줄 만한 능력치로 공수의 핵 역할을 해줄 선수가 중앙 수비수 자말 라스셀레스와 공격형 미드필더인 제이미 패터슨, 공격수 마크 더비셔 정도였다. 하지만 제이미 패터슨은 레귤러 팀에 콜업되어 U-21팀에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문제는 챔피언십 리그에서 경기를 뛰지 못하면서 실전 감각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벤치에서 의자만 데우고 있는 제이미 패터슨의 모습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U-21팀으로 내려달라고 요청하고 싶지만 일개 코치의 입장에서 의견을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내가 U-21 팀의 감독 대행이 됐고, 레귤러 팀도 감독이 교체되었다. 빌리 데이비스 감독이 계속된 성적 부진을 이유로 마침내 감독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사회에서 새로 감독으로 선임한 이는 바로 스튜어트 피어스였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주전 레프트백이자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레프트백이었다.
1978년에 선수로 데뷔해 80~90년대 잉글랜드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군림했다.
논 리그에 속한 월드 스톤에서 데뷔한 그는 1983년 코벤트리 시트에 트레이드됐다가 그의 재능을 알아본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에 의해서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했다.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그는 12년간 주전 레프트 백이자 주장으로 활약하며 401경기에 출전하여 63골을 넣었다. 특히 1993년 2부 리그로 강등됐을 때에도 이적하지 않고 팀을 다시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1996년 12월에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는 리그 꼴지로 추락했는데 스튜어트 피어스는 1월에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분전했지만 노팅엄 포레스트의 강등을 막지 못했고, 다시 선수로 돌아가 뉴캐슬에 입단했다.
이후 웨스트햄, 맨시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 2002년 은퇴하여 맨시티의 코치가 되었고, 2005년 자신을 맨시티로 데려간 켈빈키건이 경질되자 맨시티의 감독이 되어서 초반엔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2006~2007 시즌에 간신히 강등을 면하는 부진을 겪으면서 경질되었다.
스튜어트 피어스는 대한민국과도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바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 단일팀을 이끌고 감독직을 수행했던 게 바로 스튜어트 피어스였다.
그때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은 지동원의 선제골과 이범영의 승부차기 선방으로 영국 단일팀에게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브라질에게 패했지만 3. 4위전에서 일본 대표팀에게 2대 0으로 승리하며 축구에서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올림픽 메달 획득에 스튜어트 피어스의 공헌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인연의 스튜어트 피어스가 16년 만에 다시금 친정팀으로 돌아왔으니 그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그의 귀환을 축하했지만, 한편으론 16년 전 강등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취임 기자 회견에서 스튜어트 피어스는 친정팀의 강등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인터뷰만을 했다.
자극적인 기사로 악명 높은 《더 선》 기자가 물었다.
“16년 전에도 지금처럼 임시 감독을 맡았다가 강등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과거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까?”
금발의 스튜어트 피어스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선수 겸 감독이었지만 이제는 감독만 합니다. 그리고 그 후 감독으로서 한번도 강등을 겪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강등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이크가 한 마디 했다.
“저 사람이 처음 감독을 맡았을 때, 선수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하면서 주전 골키퍼를 빼놓고 제출하려는 걸 부인이 발견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어.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내가 보기엔 감독으로서 형편없는 사람이야. 우리 구단은 빼박 강등당하게 생겼어.”
나도 그가 올림픽 8강전에서 한국 선수를 잘 모른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과연 그가 나와 호흡을 잘 맞춰서 노팅엄 포레스트를 강등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강등권 탈출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