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나에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건가?’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나는 저승의 시스템 오류로 갑작스럽게 죽었고, 저승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몇 가지 특수 능력을 받았다.
하지만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능력이 생겼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기억을 남겨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깽판을 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을 리는 없었다.
어쨌든 나에겐 다른 이의 축구 관련 능력치를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나에게 훈련을 받는 이에게 특수한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그래! 이 능력을 활용해 K리그 최고의 코치, 더 나아가 감독, 국가대표 감독까지 되어서 월드컵 우승까지 이루어보는 거야!’
더 이상 강등권 팀의 감독으로 게 고생만 할 게 아니라 K리그 우승이 가능한 팀의 감독이 되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도 나가고 국가대표 팀 감독도 되어서 월드컵 우승까지 노려보겠다는 큰 꿈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면 꿈 깨라고 하겠지만 이런 능력이 생겼으니 결코 꿈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대전 네티즌스의 사장인 김주환 사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 감독, 오늘 오후에 사장실에서 좀 볼까?”
시민구단인 대전 네티즌스의 구단주는 대전 시장인 염동철 시장이었고, 사장은 그의 측근인 김주환 사장이었다.
김주환 사장은 30대 후반의 젊은 남성으로 날카롭고 이지적인 인상의 수재였다.
전임 감독이 사퇴했을 때 김주환 사장은 나를 불러 말했다.
“이 코치, 이번에 감독 대행이 되어 우리 팀 강등을 막아주면 다음 시즌 자네를 정식 감독으로 임명할게. 부디 임시 감독이 되어서 우리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 줘.”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에게 하대를 받는 게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사장이고 나는 고작 임시 감독 아닌가? 고깝게 생각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나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고 나는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내가 감독을 맡고 5승 3무 1패의 성적을 거두면서 대전 네티즌스는 케이리그 클래식에 잔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임시 감독을 맡을 때 얘기했던 대로 정식 감독이 되는 것만 남았다.
잠깐, 아 이 상황은 미리 겪었던 일이 아니던가?
그래, 그때도 나는 이렇게 사장실에 불려갔고... 그때 사장이...
맞다. 오늘 난 해고 통지를 받고 기약 없는 백수 생활을 시작하는구나. 그리고 한참 후 마이크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노팅엄 포레스트 구단은 이미 대체자를 구했다고 해서 결국 난 영국에 가지 못하고 한동안 일자리를 찾다가 인천시티즌에 들어갔다.
나는 차를 몰고 대전 네티즌스의 구단 사무실이 있는 대전 시내로 향했다.
대전 네티즌시의 사무실은 생뚱맞게도 대전시 외곽 모텔 건물 사이에 있었다.
대전 월드컵 경기장으로부터 차를 타고 대전시를 가로질러 정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모텔촌에 있었다.
축구단 사무실에 경기장 근처에 있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그마저도 모텔촌에 있다니 구단 운영이 제대로 될까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사장실에 들어가니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 좀 앉게.”
자리에 앉자 구단의 여직원이 차를 내왔다.
자리에 앉아서 김주환 사장을 보니 그의 능력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선수뿐만 아니라 비경기인의 축구 관련 능력치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비경기인의 능력치는 의미있는 능력치만 표시되는 것 같았고, 선수들에 비해서 간단했다.
김주환 사장의 능력치는 상술 7, 간섭 11, 인내심 10 등이었다. 능력치를 보면 객관적으로 유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를 자를 사람이고 그동안 겪은 일이 있으니 굳이 능력치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신뢰도가 낮은 대신 구단주에 대한 충성심은 높을 터였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사장이 말을 꺼냈다.
“이 감독, 작년엔 진짜 수고가 많았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구단은 K리그 클래식에 잔류하지 못했을 거야.”
“별말씀을요. 다 사장님 이하 구단 직원 분들이 도와주시고 선수들이 열심히 뛴 덕분이죠.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짤릴 신세였지만 나는 마음에도 없는 겸양의 말을 했다. 짤릴 때 짤려도 인상은 좋게 남겨야지.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 감독이 고생한 것도 알고, 감독으로서 능력이 탁월한 것도 인정하는데….”
‘뒤통수 치려고 슬슬 시동을 거는군.’
“구단 고위층에서 2002년 월드컵 멤버 중 한 명으로 차기 감독을 임명해야 한다고 그러는 거야. 다음 지방 선거 때 구단 이미지도 있고 해서….”
그러니까 2002년 월드컵도 뛰지 못했고, 선수 시절 대표팀 무단 이탈로 이미지가 나쁜 나는 정식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올해 열리는 지방 선거에서 재선하기 위해선 프로 축구단에 유명한 스타플레이어가 감독으로 와야 지역민들의 관심을 끌고 시장의 업적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사실도 말했다.
그래야 선거 때 얼굴 마담으로 한 번이라도 내세울 수 있으니까.
“음….”
이미 한번 당한 일이지만 그때와 달리 여기서 깽판을 칠 순 없었다. 그럴 경우 나의 평판은 땅에 떨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건가? 나에게 선택지는 없는데….
“다른 구단에도 일자리를 알선해 볼 테니 좀 기다려 주게.”
사장이 의례상 하는 말을 했지만 어차피 내 일 자리는 내가 구한다.
“감사하지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왔다.
대전 네티즌스의 클럽 하우스로 돌아온 나는 짐을 챙겼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코치와 선수들이 모두 답답해 하고 일부는 화를 냈다.
“감독님, 이대로 물러서시면 안 됩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희도 동참하겠습니다. 함께 싸우시지요.”
“토사구팽이라고, 죽을 힘 다해 강등 막았는데 이렇게 내칠 수 있습니까?”
“야야. 아냐. 아냐. 다들 오버하지 마. 감독이란 게 그런 거지. 구단이랑 맘이 안 맞으면 관둘 수도 있는 거야. 왜 늬들 앞날까지 망치려고 들어? 나 선수촌 무단 이탈했다가 선수 인생 조진 거 몰라? 다들 진정하고 새로 오는 감독과 다음 시즌 잘 준비해 봐. 이번엔 상위권 들어서 좋은 구단 가야지.”
나는 3년간 정들었던 클럽 하우스를 나왔다.
모든 구단 관계자들이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그중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 특수한 능력을 얻었는데, 과거로 다시 돌아와 정작 임시 감독을 하던 팀에선 쫓겨나다니…
이렇게 해서 나는 다른 구단들의 코치로 전전하다가 제주 감독으로 가서 승격을 시켰다가 다시 강등되고 또 다른 팀에 가고…. 그렇게 K리그 클래식 강등권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승격해결사’로 불리는 게 이후 나의 미래였다.
그게 죽기 전 내가 경험했던 미래였다.
그때 차 안에 대충 실었던 짐 중에서 잡지가 하나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였다.
서울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잡지를 펼쳐봤다.
지인이 추천해 준 잡지의 기사는 축구발전의 핵심 요인을 분석해 놨는데, 요점은 축구 발전의 핵심 요인이 첫째는 경제력, 둘째는 축구 인구와 전체 인구의 비율, 셋째는 축구에 관심 있는 인구와 전체 인구의 비율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축구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어서 이코노미스트는 구조개혁의 방법으로 6세에서 10세 이후 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며 뛰어놀 수 있는 클럽수, 재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유소년 시스템, 유럽과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력은 갖췄지만, 전체 인구 대비 축구 인구의 비중이 적고, 또한 월드컵 축구가 아닌 프로 축구에 관심 있는 전체 인구의 비율이 적다. 그리고 유소년 클럽도 적고, 유소년 시스템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유럽과의 글로벌 네트워크도 미약했다. 특히 유럽에 가서 제대로 배운 지도자는 적을뿐더러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는 코치는 전무했다.
‘그래서 내가 영국에 안 간 걸 후회한 거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K리그 클래식에서 아등바등 강등을 하니 마니, 감독이 되니 마니 하느니 유럽으로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부딪혀 보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처럼 산다면 결과가 뻔했으니까.
‘그래, 영국에 가보는 거야. 어차피 코치 라이센스도 5급을 따야 하고,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 1~2년쯤 고생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래, 결심했어.’
나는 바로 마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딸깍”
“헤이~ 브라더~ What’s going on?”
“마이크. 나 결심했어.”
“오? 정말이야?”
“그래, 영국으로 갈게.”
“Welcome! Welcome! Come on!”
나와 마이크는 영국에 가는 날짜에 대해 이야기했고, 2주일 후 가기로 했다.
날짜를 정하고 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이제는 구직자 신세니 최대한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중간 경유하는 비행기 티켓을 찾았다. 다행히 아랍 에미리트의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항공권이 있었다. 유류할증료와 TAX까지 포함해서 편도 55만 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다른 항공권은 최소 65만 원에서 80만 원까지 했는데 이거보다 싼 티켓은 없었다. 물론 이코노미에 아부다비까지 10시간을 타고 가서 5시간 대기 후, 다시 4시간을 비행, 총 19시간이 걸리는 항공권이었지만 잉글랜드에서 코치가 된다 해도 박봉에 겨우 입에 풀칠만 해야 할 판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공권을 예매한 나는 주변에 인사를 하러 다녔다.
시골에서 혼자 사시는 어머니께선 이러다 장가도 못 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셨지만 어차피 홀아비로 살다 죽었다 살아난 몸 겁날 게 없었다. 단지 당분간 생활비를 못 보내드린다고 죄송하다고 했더니 쉬엄 쉬엄 소일거리로 하는 공공근로로 먹고 살 만큼은 버신다면서 걱정하지 말라신다.
‘어머니, 제가 세계적인 명감독이 되어 꼭 호강시켜 드릴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공수표 남발이 될 거 같아 차마 입밖에는 못 꺼낸 말을 삼키며 각오를 다졌다.
중고등학교 시절 은사들을 만나니 모두 하나같이 걱정들을 하셨다.
한때 축구천재 소리 들으면서 국내 축구를 평정했던 제자가 한때 혈기를 못 이기고 현역 선수 생활을 망친 데다가 지도자로서도 가시밭길을 걸으니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4년이 넘는 세월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다른 이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는 몸. 걱정 꽉 붙들어매시라고 말은 못해도 머지 않아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섰다.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다 보니 2주가 훌쩍 지나고 영국으로 떠나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 자신의 새로운 미래, 또 대한민국 축구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