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노팅엄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EPL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나는 제2의 브라이언 클래프가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답은 그저 내가 만들어 갈 뿐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마이크가 손짓하며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라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을 맞이하는 리셥센룸이 있었고, 뿔테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의 여자 비서가 앉아 있었다.
“굳 애프터 눈, 미스 섈리.”
모건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자 그녀도 인사를 하더니 사장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생큐.”
우리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자 정면에 앉아 있는 중동 남성과 몇 명의 중장년 남성들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구단주와 구단 운영진인 건가?’
모건이 나를 소개했다.
“구단주님.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프로필 보여드렸던 이호영 코치입니다.”
양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중동 남자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헤이, 미스터 리. 반가워요. 공항에서 바로 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파와즈 알 하사이 대표님.”
“하하. 아주 의욕이 넘치는군요. 하지만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테니 첫날은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하면서 구단주의 숨겨진 능력치를 봤다. 어차피 축구 관련 능력치는 중요하지 않았으니 다른 능력치만 훑듯이 살폈다.
야망 19, 참을성 10.
야망이 엄청 높은데, 참을성은 중간이군.
선수 영입 능력이 19로군. 맘에 드는 선수는 왠만하면 데려온다는 것인가? 자금력도 받쳐주고...
기대가 되는데?
“이분은 내 형 압둘이오. 구단 이사지.”
머리에 터번을 쓰고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인사했다. 구단주의 형인 압둘 알 하사이였다.
굳이 둘이 형제라고 밝히지 않아도 딱 보면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번을 쓰고 말고의 차이 정도랄까.
“이쪽은 빌리 데이비스. 1군 감독님일세.”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중년 남자가 인사했다. 대부분의 능력치가 11~13를 왔다 갔다 하는 평범한 감독이었지만 의욕을 불어넣는 능력은 13, 유소년 육성 능력은 15였다.
“반갑네.”
‘차라리 유소년 감독이 낫겠군.’
“이쪽은 이안 맥파랜드 23세 이하 팀 감독님. 자네와 같이 일할 감독님이야.”
“잘 부탁해.”
50대 중반의 비쩍 마르고 늙어 보이는 사람으로 능력치가 더 낮았다. 대부분의 능력치가 10 이하인데 그나마 유소년 육성 능력이 14였다.
‘2부 리그라고 해도 코칭 스태프들의 능력치들이 많이 떨어지는데?’
그런데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무시하며 깔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한국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건가?’
“잘 부탁드립니다.”
무능한 사람의 무시를 받으니 좀 황당하긴 했지만, 반대로 무능하기 때문에 나를 경계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외 인사한 이들은 두 번 다시 볼 것도 없는 능력치였다.
특히 스카우트 팀장의 선수의 성장 가능성을 판단하는 능력과 현재 능력을 판단하는 능력이 13밖에 안 된다는 게 큰 충격이었다.
구단이 성장하려면 좋은 선수의 영입이 필수이고 그를 위해선 스카우트들의 선수 보는 눈이 뛰어나야 하는데 스카우트 팀장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내가 감독이었다면 제일 먼저 스카우트 팀장 이하 스카우트 팀을 전부 갈아치웠을 것이다.
구단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호영 코치는 선수로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더군.”
“오~!”
구단주의 말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감독인 빌리 데이비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저도 그가 뛴 경기를 본 기억이 납니다. 벨기에과의 조별 예선 최종전이었는데…. 대한민국이 투혼을 발휘해 1대 1로 비겼죠. 마지막에 골키퍼와 1대 1 상태에서 그가 날린 슛이 골대 옆 그물을 맞췄는데 그 슛이 들어갔으면 대한민국이 16강을 진출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아저씨가 하필 이런 자리에서 내 흑역사를 들추고 그래?
그랬다. 그 슛이 골대에 들어갔으면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전에 대한민국은 원조 붉은 악마인 벨기에를 상대로 월드컵 첫 승을 거두고, 흑역사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나도 선수로서 K리그가 아닌 유럽에 진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렇군요. 코치로선 그 정도 레벨까지 아직 이르진 못한 모양이지만…. 앞으로 많은 발전을 이뤄서 우리 구단에도 큰 공헌을 하기 바라네. 비록 우리 쿠웨이트 팀이 한국에 밀려 월드컵을 못 나가긴 했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구단주의 말은 2012년 2월 29일, 월드컵 2차 예선 대한민국과 쿠웨이트의 최종전에서 우리 대표팀이 쿠웨이트 대표팀을 이기면서 쿠웨이트의 월드컵 최종 예선행이 무산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는 신경 쓰란 얘기 아닌가?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쿠웨이트는 4년 후 또 한 번 우리한테 밀려서 최종예선에 못 나가는데….’
80년대 한때 대한민국과의 상대전적에서 앞서기까지 한 쿠웨이트였지만 걸프 전쟁의 후유증으로 축구 실력은 크게 후퇴했고 이제는 한국의 라이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팀이 되었다. 그래도 2014 월드컵 2차 예선 때는 우리를 단두대 매치까지 이끌긴 했다. 어쨌든 구단주의 그런 마음이야 내가 코치로서 능력을 발휘하면, 별 영향을 못 줄 것이다.
“어쨌든 먼 길에 고생했을 텐데, 오늘은 첫날이니 편히 쉬고…. 내일 보세.”
구단주의 작별 인사를 받고 나와 모건은 사무실을 나왔다.
“브라더, 사장이랑 코칭 스태프 인상들이 어때? 좋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잘 모르겠군. 다만...”
“다만?”
“21세 이하 팀 감독은 나를 무시하고 경계하는 거 같은데?”
“맥 파랜드 코치? 그 사람은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최근 21세 이하 팀 성적이 안 좋고 좋은 선수도 안 나오니까 초조감을 느끼는 거야. 브라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오케이, 알았어.”
그러고 보니 맥 파랜드의 얼굴색이 창백한 게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디가 아픈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간 쪽이 안 좋다는 거 같아. 감독 생활을 오래 못할지도 몰라.”
‘그렇군. 그렇다면 싸우기보단 잘 지내는 쪽을 택해야겠어.’
나는 그렇게 마음먹고 모건을 따라 구장 곳곳을 구경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구장이어서 그런지 곳곳이 노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3만 명을 넘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만큼 구장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전경은 웅장했다. 뿐만 아니라 구장 뒤로 흐르는 강과 어우러지는 풍경도 훌륭했다. 중세 유럽 회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정도의 멋진 풍경이었다.
자연을 없애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짓는 대한민국의 건축과 달리 유럽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을 택했다. 이 시티 그라운드도 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구장의 메가 스토어에선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역시나 가장 눈에 띄는 건 브라이언 클래프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였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아직까지도 그게 가장 많이 팔리는 티셔츠라고 한다.
구장을 둘러보고 나온 모건과 나는 노팅엄 시내를 둘러봤다. 노팅엄 시티 센터엔 중세와 근대의 건물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중심가에는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최신식 건물들이 많았다. 시내를 거닐다가 기념품 상점이 보여서 들어가 보니 그곳에서도 브라이언 클러프의 기념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노팅엄은 브라이언 클러프 빼고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건가 싶을 정도다. 시내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좀 구경하다가 다시 모건의 차를 타고 다른 곳을 향했다.
시내에서 3분 정도 차를 타고 가서 도착한 그곳은 로빈 훗 동상이 서 있는 노팅엄 성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볼 정도는 아니어서 성 내부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로빈 훗 동상이 서 있는 외부는 둘러볼 수 있었다.
로빈 훗의 동상은 두건을 쓴 인물이 활을 들고서 겨냥하고 있는 동상이었다.
‘나도 이렇게 전 세계 축구인들의 심장을 겨냥해야겠군.’
그런데 모건이 나를 다른 동상이 서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엔 왠 남자와 여자의 동상이 서 있었고 옆에는 추모비가 있었다.
“저건 정의의 여신이 이끄는 용사의 모습이야.”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하는 남자의 동상이었다.
“저건 무엇을 나타내는 비석이지?”
내가 동상 옆에 서 있는 비석을 가리키자 모건이 말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추모하는 비석이지.”
가까이 가서 보니 위에는 ‘IN MOMERY OF THOSE WHO GAVE THEIR LIVES IN THE KOREAN WAR’라고 씌어 있었고 아래에는 ‘NOT ONE OF THEM IS FORGOTTEN BEFORE GOD’이라고 씌어 있었다. 한국전쟁에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을 기억하며 신 앞에서 그들 누구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곳에 와서 이 추모비를 보고 호영 브라더를 떠올렸어.”
멍하니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는 나를 보고 모건이 말했다.
“60년 전 한반도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웠던 한국과 영국의 군인들처럼 호영 브라더와 나도 함께 싸우는 거지.”
끼워 맞추기도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같이 잘해 보자는 말이니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찬동의 뜻을 나타냈다.
“오케이.”
우리는 추모정원을 나와 성벽 아래에 있는 펍으로 갔다.
“여기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이야.”
정말 오래돼 보이는 흰색 건물 벽 위에는 ‘ye olde trip to jerusalem inn’이라는 글이 아래에는 ‘the oldest inn in England’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역대 주인의 이름이 씌어 있는 팻말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니 천장이 들쭉날쭉하다.
“1189년부터 운영되던 곳인데 1760년부터 이름을 적었어. 이 여관은 노팅엄 성 아래에 사암을 깎아 만든 곳이라 내부가 이래.”
나와 모건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메뉴를 보니 다양한 에일 맥주가 있었다.
하지만 안주는 몇 개 없었다. 영국의 대표 요리인 피시 앤 칩스와 함께 간단한 요리 몇 개만 있을 뿐이었다.
차마 피시 앤 칩스를 시키진 못하고 선데이 로스트라고 야채 구운 걸 시켰더니 이건 굽기는 한 건지…. 마치 토끼가 된 기분으로 밍밍한 소스에 찍어 덜 익은 당근을 씹다가 도저히 먹지 못하고 뱉었다.
“퉤.”
그런데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우리를 본 거대한 뚱보 아저씨가 다가온다.
‘뭐지? 내가 뱉는 걸 본 건가?’
쿵쿵거리며 걸어온 뚱보 아저씨는 모건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이 친구는 누구야? 모건.”
“이번에 새로 온 코치에요.”
“오호 그래?”
살 속에 감춰져 있던 두 눈이 커지더니 나를 응시한다.
“잘 부탁해! 우리 Reds를.”
‘누구야?’
눈빛으로 물어보니 모건이 소개한다.
“호영 브라더 인사해. 이 펍의 주인이자 노팅엄 포레스트의 서포터 ‘The Reds’의 회장인
빌 풀먼 씨야.”
앉으라는 허락도 안 했는데 어느새 작은 의자에 낑겨 앉은 빌 풀먼.
땀을 뻘뻘 흘리며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한국에서 왔다면서? 2002년에 한국은 대단했지. 북한도 1966년에 8강에 들었고…. 그때 내가 6살이었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 8강에 진출하여 에우제비오의 포르투칼을 몰아세우던 북한의 돌풍을 떠올리던 그는 예의 브라이언 클러프를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자기 브라이언 클러프라고 아나?”
그의 추억팔이는 한 시간가량 계속됐다.
그의 젊은 시절을 지배했던 브라이언 클러프의 전설.
“그때 우리는 미쳤었지.”
UEFA 컵 2연패에 리그 우승까지 다시금 그 전설이 재현되면 여한이 없겠다며 그는 술값을 받지 않았다.
모건은 예약해 둔 시내의 유스 호스텔에 나를 데려다 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훈련장인 노팅엄 포레스트의 니겔 도티 아카데미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호스텔은 우리 식으로 보면 모텔과 게스트하우스의 중간쯤 되는 숙박 시설이다. 가격은 5만 원에서 2만 5천 원 정도까지 하는데 1인실에서 12인실까지 어떤 객실을 택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었다. 그래도 19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혼자서 푹 자야겠다 싶어서 1인실을 예매했다. 그런데 호스텔에 체크인해서 들어가니 아 놔. 보일러가 안 들어온다.
데스크 직원에게 항의해도 모른다는 말뿐.
어차피 보일러가 들어와도 바닥은 차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온 전기장판을 깔고, 두꺼운 오리털 점퍼에 내복을 껴입고 침대 위에 누웠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잉글랜드 노팅엄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