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릉.”
아침을 알리는 알람이 울려서 눈을 뜨고 보니 들어오는 낯선 천장과 방 안의 풍경.
새삼 내가 과거로 회귀했고, 이곳이 잉글랜드에서도 촌구석에 위치한 노팅엄임을 실감한다.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한 후 침상에서 일어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 본다.
나는 왜 잉글랜드로 왔을까? 왜 잉글랜드 촌구석까지 와서 이 생고생을 하는 걸까?
죽었다 살아나서 생긴 특수한 능력을 써서 큰 물에서 출세하여 세계적인 명장이 되겠다는 다소 허황되고 야무진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잉글랜드의 유소년 축구 양성을 배우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그런데 왜 잉글랜드일까? 물론 코칭 연수 동기인 마이크의 추천으로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불러서 오긴 했지만 다른 리그에 가려고 하면 얼마든지 갈 수는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페인 축구 메이저 대회 3연패를 하며 프리메라리가가 세계 최고의 리그로 군림하고 있었고, 분데스리가도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를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소년 육성 노하우를 배우려고 잉글랜드에 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직까지 유소년 리그 운영 면에서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잉글랜드는 유소년 축구 후진국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
사실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이라 불리고 EPL은 전 세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리그지만, 유소년 양성에선 낙제점을 받고 있었다. 1999년 트레블을 이룩한 맨유는 오래전부터 구축한 유소션 양성 시스템이 길러낸 퍼거슨의 아이들이 그 주축이었다. 이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지역 라이벌로서 2008년 UAE의 왕족이자 갑부인 만수르가 인수한 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맨시티, 그리고 웨스트햄이 유소년 3대 명문 구단으로 불리고 있지만 나머지 구단의 유소년 육성은 아직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맹점-정식 선수 계약 연령이 18세인 데 비해 잉글랜드는 16세부터 가능-을 악용하여 유망 선수들을 빼와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스날이 바르셀로나 유소년 소속이었던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빼온 것이 그 대표적인 일로 결국 그 여파로 프리메라리가와 세리에-A는 유소년의 프로 계약 연령을 낮추기에 이른다.
이렇게 선수 빼오기에만 공을 들였던 프리미어 리그였지만 국제대회에서 연이어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면서 결국은 유소년 육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2011년부터 EPPP(Elite Player Performance Plan)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EPPP는 코치들의 훈련방식, 구단의 교육, 선수관리, 분석관의 역할부터 선수와의 대화시간, 대화방식, 리뷰시간, 교육방식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시스템적으로 제도화시켜 관리하는 정책이다.
그 결과 2017년 U-17 월드컵과 U-19 월드컵을 모두 우승하고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선 32년 만에 4강에 오르는 쾌거를 올렸다. 물론 이런 사실은 미래에서 온 나만이 알고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나는 감독으로서 성공하여 명성을 떨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EPPP 정책을 제대로 배워가서 한국 축구에 접목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내 계획대로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이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침 안 먹어?”
어젯밤 하숙을 계약한 이 집의 주인 영감님이다.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그 내용은 다정하다.
조식 제공이라고 계약한 것도 아닌데 아침을 챙겨주신다.
비록 먹고 싶은 메뉴는 아니지만… 피시 앤 칩스. 뼈를 들어내고 통째로 튀긴 생선고 감자 튀김을 흰 종이에 둘둘 만 음식을 영국 사람들은 이것에 소금이나 식초를 뿌리거나 완두콩 소스를 뿌려서 먹는다. 영국의 유일무이한 전통음식이라고 할 만한 이 음식을 받아놓고 나는 오트밀이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했다.
앞으로도 지겹게 먹을 피시 앤 칩스를 먹고 이빨을 닦고 있는데 마이크가 왔다.
이 녀석 참 부지런하다. 어차피 내 신세에 차를 구입하거나 리스하기도 힘드니 계속 신세를 져야겠다.
우리는 또다시 노팅엄 포레스트의 니겔 도우티 아카데미로 향했다.
U-21 리저브 팀은 오늘도 훈련이다.
그라운드에 모인 선수들은 워밍업부터 시작했다.
가볍게 조깅을 한 후 가벼운 스트레칭과 정적인 스트레칭, 동적인 스트레칭을 한다.
축구는 하체를 주로 쓰는 운동이기 때문에 스트레칭도 하체 위주로 하는 것이 맞다.
나 또한 함께 스트레칭을 하면서 다른 선수들의 유연성을 파악했다.
아직 어린 선수들, 비주전 선수들이 많아서인지 레귤러 선수들보다 유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능력치를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요가 전문가라도 초빙해서 유연성 강화 훈련을 해야 할 거 같았다.
워밍업이 끝나고 선수들을 모은 맥 파랜드 감독이 한 마디 한다.
“오늘은 수비로부터 공격을 전개해 가는 패턴 훈련을 할 거야. 첫 번째 패턴은 골키퍼로부터 시작이고, 두 번째 패턴은 수비수가 공을 뺏었을 때, 세 번째 패턴은 공격수가 압박을 통해 뺏었을 때….”
안타깝게도 아직 챔피언십 하위팀인 노팅엄 포레스트잉글랜드 축구협회의 지침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노팅엄 포레스트의 리저브 팀 감독인 맥 파랜드 감독이 심하게 구식 인물이든지….
유소년 축구가 활성화된 네덜란드나 스페인에서는 개인의 창의성과 임기응변을 중시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패턴 플레이를 미리 정해놓고 하거나 감독이 세세한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저 순서만 알려준 채 바로 훈련을 실시한다. 하지만 아직도 잉글랜드에서는 아니 이 팀 노팅엄 포레스트는 아니었다.
잉글랜드가 국제대회에서 계속 죽 써왔던 데에는 이런 정형화된 플레이 스타일이 한몫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래서 2011년부터 앞에서 말한 EPPP 정책과 함께 The FA England DNA라는 잉글랜드 교육정책을 만들어 시행, 보급 중이었다. 다만 아직 노팅엄 포레스트에서는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2부 리그 하위 리그 팀으로서 당장 강등이 코앞이니 유소년 축구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맥 파랜드 감독의 개인적인 역량에 맡겨 놓았을 뿐이었다.
“감독님! 그렇게 세세히 상황을 지시하면 선수들의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마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감독한테 나 자르슈 하는 거와 다를 게 뭔가?
물론 U-21 리저브팀 감독에게 코치를 자를 권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이미 첫인상이 안 좋아서 처음부터 푸대접을 받은 터라 더 인상을 나쁘게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는 그저 뛰는 선수들의 능력치를 하나씩 점검하며 이 선수에게 이런 조언을 하면 좀 더 성과가 나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지리한 패턴 훈련이 끝나고 아카데미 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뷔페식으로 그때그때 메뉴가 바뀌는데 선수들의 영양 섭취나 몸 상태를 따로 체크해서 식단을 짜는 게 아니라 그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육류와 단백질 위주로 식단을 짜는 듯했다.
2018년에 결국 사임하긴 했지만 아스널에서 장기집권했던 아르센 뱅거 감독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선수들의 식단을 조절하는 것이었는데, 노팅엄 포레스트는 그런 시대적인 조류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나는 일부러 마이크와 함께 감독실에서 식사를 끝낸 맥 파랜드 감독 앞에 앉았다.
“감독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우리 구단은 EPPP 정책을 시행하지 않나요?”
맥 파랜드 감독이 나를 뻔히 쳐다봤다.
마이크도 눈빛으로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뿐만 아니라 한창 성장 중인 어린 선수들을 위한 맞춤형 식단도 필요한데 모두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건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맥 파랜드 감독은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리, 자네가 아직 현실을 잘 모르나 본데 우리는 20년 넘게 2부 리그에서 승격하지 못하고 있는 구단일세. 당장 EPPP 정책을 시행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들거니와 선수별 식단을 짜기는커녕 영양사를 고용하는 것조차 예산적인 문제로 시도하기 어렵다네. 레귤러 팀조차 선수 개개인에게 몸 관리를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당장은 이럴 수밖에 없네. 지금 우리 구단은 승격은커녕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야. 당장 3부리그로 떨어지면 지금 수입의 절반 이하로 구단 수입이 줄어들 거고, 선수들뿐만 아니라 코칭 스태프도 대거 방출해야 하는 위기에 처할 걸세. 구단으로선 당장 강등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네. EPPP 정책이나 선수들 개개인의 몸 상태 관리 등은 구단이 살아남은 후에야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그러면 우리 U-21 팀의 존재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근시안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 우리 팀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는 레귤러 팀이 강등권 싸움에서 지지 않고 승격 경쟁에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서포트하고 유망주나 후보 선수들이 리그 경기에서 뛸 수 있는 몸상태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걸세. 미래를 위한 육성이나 개개인의 발전은 성적을 올리고 나서 생각할 문제라고.”
나는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팀이 우선이고, 구단의 생존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팀의 미래를 포기할 순 없는 것이다.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언제고 무너질지 모르는 게 클럽의 운명이다.
어차피 정답은 없었다. 빅클럽이 아닌 이상, 제대로 유소년 시스템을 갖추고 운영하는 클럽은 거의 없었다.
레귤러 팀의 성적을 우선시하면서 그를 뒷받침하도록 U-21, U-19팀을 운영하는 게 대부분 유럽 클럽들의 실상이었다.
“나라고 U-21 팀을 제대로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나? 하지만 2부 리그 하위권 팀인 우리로선 한계가 있다네. 그래서 자네를 코치로 영입한 거야. 자네가 여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 믿네.”
“알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의문을 제기하러 갔다가 오히려 짐만 잔뜩 짊어지고 왔다.
점심 식사 후엔 포지션별로 나누어 코치들이 지시했다.
“자네가 공격수 출신이니 공격진의 지도를 맡아주게.”
맥 파랜드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출신인 나에게 포워드와 공격형 미드필더들을 가르칠 것을 주문했다.
전날 나와 호흡을 맞췄던 제이미 패터슨은 1군의 콜업을 받아 연습을 합류해 있었다.
그와 자리를 바꿔 1군에서 부상을 당해 재활에 전념하다가 u-21 훈련에 합류한 덱스터 블랙스톡이란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방출 명단에 올라 있는 마커스 투가이란 윙포워드와 매트 더비셔란 스트라이커도 있었다. 또 호주 청소년 대표팀이자 나에게 어제 인터셉트를 당했던 제임스 드미트리오도 있었다.
사실 이렇게 포지션을 나눠서 정지 상태에서 훈련하는 것은 유소년 선수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훈련법이다. 단순히 테크닉만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경기 이해력, 판단력, 문제해결력 등을 키워서 경기 상황에 맞는 판단과 기술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게 유소년 코칭 방법으로써 훨씬 미래지향적이다.
하지만 부상에서 회복하기 위해 갓 훈련에 합류한 덱스터 블랙스톡이나 1군 경기에서 활약을 못 하면서 타 팀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지 못하고 있는 마커스 투가이와 매트 더비셔에겐 기술 훈련을 통해서 보다 기술을 다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들이 이후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 팀 내에서 나의 평가도 올라갈 터였다. 전체적인 능력치가 떨어지는 제임스 드미트로우는 논외지만.
그래서 부상에서 회복 훈련을 하고 있는 덱스터 블랙스톡은 제쳐두고 마커스 투가이는 무엇이 문제의 원인인가 살펴봤다. 그의 키는 178cm의 센터포워드로선 작은 키이고 골결정력도 10밖에 안 돼서 최전방 공격수로선 경쟁력이 떨어졌다. 대신 주력과 활동력, 민첩성은 15로 꽤 높은 편이었다. 결국 최전방 공격수가 아닌 오른쪽 윙으로 나오는 게 제일 좋은 활용방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크로스 능력치가 11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와 그는 크로스를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매트 더비셔도 마커스 투가이와 178cm로 역시 키는 작았지만 그 대신 골결정력은 12이고, 공격 위치선정이나 대담성은 14로 높은 편이었다. 헤딩도 16으로 타깃형 스트라이커로 활용할 만했다.
“투가이 자넨 이제부터 센터 포워드보다 오른쪽 윙으로 활약하는 게 좋겠어. 그게 자네를 위해서나 팀을 위해서 그게 더 좋은 길일 듯해.”
나의 지적에 투가이는 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이윽고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나는 마커스 투가이에게 한 박자 빠르게 러닝 크로스로 매트 더비셔에게 이른바 ‘떠먹여 주는 크로스’를 보내도록 주문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에게 특수 능력을 부여했다.
‘핀 포인트 크로스 부여.’
그러자 나의 포인트가 다시 500포인트 사라졌다.
순간 투가이의 오른발끝을 떠난 공은 떠오른 점프한 매트 더비셔의 정확히 연결됐다.
그리고 매트 더비셔는 골문을 향해 깨끗하게 집어넣었다.
투가이는 믿기지 않는지 자신의 오른발을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지금껏 수만 번 크로스를 날렸고, 여러 차례 골로 연결도 했지만 이렇게 깨끗하게 올라가는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른쪽 윙으로서 그의 진가는 이제부터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