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초조하게 편전과 산실청을 서성였던 성내관의 부산스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숨죽이던 궁녀들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숨죽인 채 속삭였다.
“역시..그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중전마마께서 몇 번씩 아이와 함께 죽...”
“흠!”
성내관의 헛기침 소리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어슴푸레한 빛만이 산실청을 에워쌌다. 어의도 없는 전례가 없는 산실청의 모습은 국모의 출산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산실청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빛을 성내관이 모를 리 없었다. 성내관은 궁내에 떠돌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고하게 어둠을 밝히던 달을 사랑한 밤이슬.
아침이면 사라져버릴 자신의 운명에 밤이슬은 슬피 울부짖었고
그 모습을 가엽게 여긴 신은 밤이슬을 꽃으로 태어나게 했다.
오직 달님을 위해 태어난
야래향(夜來香).
밤에만 피어나 바람도 벌레도 풀마저도 취하게 만든 향.
달은 꽃의 마음을 모른 채
매일 밤 떠오르고
꽃은 그마저도 좋아 자신의 향으로
밤을 물들인다.
낮이 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유혹의 향.
동이 트면 밤새 물든 향을 거두는 야래향을 사랑하게 된 해.
해는 꽃을 보기 위해 기다리지만
달이 없는 꽃은 피어나는 일이 없었다.
꽃의 모습도 향도 가까이 하지 못하던 어느 날,
해는 꽃을 원망하며
달이 영원히 뜨지 않는 곳에 꽃을 가둔다.’
산실청 밖으로 중전 소윤의 비명소리와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조한 기색이 여실이 들어난 성내관이 자신도 모르게 산실청 가까이에 다가서는 순간, 산실청에 있던 어의녀가 환한 미소로 뛰어나왔다. 동시에 성내관의 얼굴에 절망만이 가득 피어올랐다.
“감축드리옵니다. 대군아기씨옵니다.”
어의녀의 밝은 목소리가 산실청 안까지 들려왔고 잠시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려던 소윤은 흐린 눈으로 어느새 금색 실로 수놓아진 천에 감겨진 아이를 내려다봤다.
“결국 태어나버렸구나. 그 비참한 운명을 그대로 이어받고.”
소윤의 얼굴은 온 몸에 느껴지는 저릿한 아픔 때문인지 일그러졌고 한 없이 울어대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 기대어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조금씩 밀어냈다. 그때 산실청 밖에서 때 아닌 소란스런 소리와 함께 성수청 도무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눈이 흐려져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듯 도무녀의 거동은 느릿하고 불편해보였다.
도무녀의 모습에 놀란 궁녀들을 향해 소윤은 나가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궁녀들의 기척이 사라짐을 느낀 도무녀가 설핏 미소를 지으며 예를 지키려는 듯 몸을 숙였다.
“되었느니.. 성수청 밖으로 자네가 나왔다는 것은.. 이 아이의 운명이 그만큼 불길한 것이겠지..”
“중전마마. 제가 온 것은... 다른 이유때문이옵니다.”
“무슨...”
“소인에게 대군아기씨를..”
소윤의 대답도 듣기 전에 도무녀는 아기의 기척을 정확하게 읽었다. 잠든 아기가 깨지 않게 느릿하지만 묘한 손놀림으로 얼굴과 손을 만져 내려갔다.
“그때 말씀드린 대로 이분의 운명이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예, 새끼손가락에 검은 실이 묶여있습니다.”
“역시.. 그 애비에 그 아들이구나..하하하...”
그때 소윤의 웃음소리에 잠이 깬 아이가 크게 울어댔다. 소윤은 처음으로 제 품에 아이를 안아들고는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서 어서 장성해서 이 어미의 꿈을 이뤄다오. 네 손으로 이 나라 주인의 피를 내게 다오.”
도무녀의 흐린 눈에 비춰진 소윤의 인영(人影)은 닿기만 해도 살갗이 찢어질 정도로 날카로웠지만 이내 쉽게 부서질 정도로 나약해보였다.
‘마마, 당신은 어디까지 향하려고 하십니까.. 하늘이시여...대군아기씨의 진짜 저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