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章.
축시(1시-3시). 푸르스름한 어둠이 지천에 깔렸다. 매련국의 왕후가 머무는 궁.
그 안에서 우렁찬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공주께서 태어나셨습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왕후는 궁녀에게서 아이를 받아들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왕후는 눈을 몇 번 더 깜박여 흐릿한 시야를 말끔하게 만들었다.
“마마……. 공, 공주마마께서…….”
궁녀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왕후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인 것이냐. 내 아이가, 내 아이가…….”
모두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쏠렸다.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도깨비. 그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이 떠올랐다.
“마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유일한 왕실의 핏줄인 공주마마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말하는 왕후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날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애틋한 이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
꽃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날. 한 무리의 남자들이 호위청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이번 선발에 합격한 여러분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도 이리 훌륭한 인재들이 뽑혔다는 것이 기분 좋다. 이곳에 들어온 만큼, 호위청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일 테다. 이제부터 그대들은 배치 선발을 볼 것이다. 배치 선발이 끝나고 우수한 결과가 나온 무사들은 따로 지망하는 곳을 물을 터이니, 그리 알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알아서 이곳으로 돌아오길. 그때까지는 궁 안을 마음껏 둘러보아도 된다. 그럼 실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루하도 대열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순서가 적힌 종이를 받았다.
아직 자신의 차례가 오기에는 시간이 많았기에 루하는 한량처럼 궁 안을 돌아다니기로 마음먹었다.
****
느릿느릿 걸으니 봄기운을 듬뿍 집어먹은 궁 안이 더욱 화사하게 보였다.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펴 있는 분홍 꽃망울도 마음에 들었다.
루하는 기분 좋은 정취를 느끼며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띤 채 루하의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걷다보니, 이곳이 궁의 가장 동쪽 끝자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노랫소리가 더 커졌다.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소루하님. 시간 다 되셨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루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하필 이때.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배치 선발을 알리는 것이라는 건 잘 알았다. 루하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뒤돌아 가야했다.
****
배치 선발이 열리는 호위청 앞마당. 루하는 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늦은 낌새는 아니었다. 루하는 익숙하게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재량을 뽐냈다.
자신의 차례가 끝난 루하는 조심스럽게 아까 노랫소리가 들리던 곳을 응시했다.
다시 듣고 싶었다. 이건 언제 끝날까?
루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그 외에도 아직 남아있던 호위무사들도 배치 선발을 끝내고 마침내, 결과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그 틈을 타 루하는 옆 자리에 서 있던 호위에게 물었다.
“저기 어딘지 압니까?”
루하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은 노랫소리가 들리던 동쪽 끝자락이었다.
루하의 질문을 받은 호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눈치였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루하는 앞에 서 있는 호위의 등 뒤를 톡톡 쳤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호위였다.
루하는 다시금 손가락으로 동쪽 끝자락을 가리켰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기 어딘지 압니까?”
호위가 눈을 얇게 뜨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알아서 뭐하시게요.”
차가운 목소리에 루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나.
“저기도 호위가 필요한가 싶어서요.”
“저도 모릅니다. 나중에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세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루하는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물어볼 것을 다짐하며 얌전히 기다렸다.
앞에서 세 번째. 3등으로 뽑힌 루하의 차례가 되었다.
“그대는 실력이 아주 출중하더군. 특히 검술이 좋았네.”
“감사합니다.”
루하가 힘차게 인사했다.
“그래서 말인데 난 그대가 중앙궁 호위를 맡았으면 싶네.”
중앙궁이라니. 뛰어난 호위들도 맡기 힘든 곳을 건네다니.
루하는 뿌듯함을 느꼈지만, 승낙하지는 않았다.
“저는 따로 맡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오? 그래. 어서 말해보게. 이상한 곳만 아니면 어디든 다 들어줄 의향이 있으니.”
너그러운 기척에 한층 마음이 누그러진 루하가 편하게 대답했다.
“궁궐 동쪽 끝자락 호위를 맡고 싶습니다.”
그 순간 호위대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상하네. 왜 표정이 저리 되는지.
“음,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그곳은 호위가 필요 없는 곳이네. 애초에 사람이 살지 않지.”
떨리는 호위대장의 목소리에 루하는 직감했다.
아니다. 분명 거짓말이다. 그곳에서 노랫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제가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루하의 말에 호위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가던 궁녀가 부르기라도 했나 보지. 어쨌거나, 그곳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네.”
루하는 아쉬운 표정으로 결국 중앙궁 호위를 맡기로 했다.
아직도 귓가에선 자꾸 달콤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듣고 싶다. 누군지 알고 싶다.
****
그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루하는 멍한 표정으로 꽉 막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목소리. 보러 가고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결국 루하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몇몇 호위들 빼고는 다 잠들어 있을 것이다. 루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걷다 보니 금세 그곳에 도착했다.
아침에 보았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담장에 작게 피어난 꽃들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밝은 달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이곳은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도저히 사람이 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루하는 허리춤에 찬 검을 더 꽉 쥐었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라도 된 것 마냥 동궁 앞에 다다르니, 거대한 나무문이 루하를 반겼다.
이쯤 되니 슬슬 무서워졌다.
동궁 얘기만 꺼냈다 하면 어두워지는 궁인들의 얼굴과, 사악한 것을 봉인한 듯 굳게 닫혀져 있는 문.
그렇지만 무서움보다는 아까 들었던 그 노랫소리가 더 듣고 싶었다.
루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예상외로 문은 쉽게 움직였다. 루하는 문을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누가 온 것이냐."
여리게 들리는 목소리에 문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모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예?“
다정한 목소리가 모란의 잠을 깨웠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듯한데.“
모란이 다급하게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왔다고? 별다른 건 없는데.
문도 닫혀져 있고…….
"헉."
놀란 모란이 입을 다물었다. 깜박 잊고 문을 안 잠근 것이 화근이었다. 안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아, 아닙니다.“
모란은 더듬거리면서 슬쩍 일어났다.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 같으니, 지금 가서 잠그면 되겠지.
모란은 버선발로 뛰쳐나와 문을 잠갔다. 그러나 그 순간.
"쉬잇."
입을 덮는 커다란 손과 팔을 잡아당기는 힘.
모란은 소리를 지르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으나, 남자의 힘에 못 이겨 결국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
"살, 살려주십시오."
모란이 겁먹은 표정으로 애원했다. 루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난 그런 것이 아니고……."
"살려만 주세요!"
이 궁녀는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정신없이 애원하는 모란을 놔두고 루하는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궁에 궁녀가 일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끔 와서 정리를 하는 거라면 몰라도.
"제가 죽으면 마마께서는 못 사신다고요. 안 그래도 불쌍하신 분인데……."
"마마?"
역시, 이곳엔 누군가 살고 있었어.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루하가 제법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죄책감이 들지만, 뭐.
"이곳에 누가 살지?"
루하의 물음에 모란이 입을 떡 벌렸다.
"모, 모르십니까?"
루하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니까 묻고 있지. 루하는 멍하니 응시하던 모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모르는 대로 사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무슨 말이지?"
"딱 보아하니, 높은 집 자제 분 같은데. 괜히 이런 일에 휩쓸리지 마시고요. 제가 말해주었다가 나중에 이곳으로 와서 마마께 해코지를 하면 어떡합니까."
"……내가 해코지를 할 것처럼 보이나?"
"지금 절 가둬놓고 심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루하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 난 대답만 하면 보내줄 생각이었다. 걱정 말거라. 난 이번에 궁으로 새로 발령 받아온 호위이니."
모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루하를 훑었다.
"새로 발령 받은 호위께서 이런 밤중에 동궁엔 웬일이시래요? 와서 저를 가둬놓고 협박을 하고 계시지 않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단지 궁금한 게 있어서 왔을 뿐이다."
모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겁먹은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쪽 일과 엮이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왜 말을 못하는 거지?"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던 모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 동궁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소문이 있거든요."
낮아진 모란의 목소리에 덩달아 긴장한 루하가 물었다.
"무슨 소문?"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래봬도 궁에서 유일하게 마마를 뫼시고 있는 궁녀니까요. 소문은 밖에 나가면 흔히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궁에서 유일하게 마마를 모셔?
마마라는 호칭이 붙은 걸 보아하니, 낮은 직책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사람이란 말인가.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보겠다. 내가 아침에 들은 노랫소리, 그것은 여기서 난 게 맞느냐?"
모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줄지, 안 말해줄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말이 없던 모란이 마침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부르셨습니다. 목소리가 고우시거든요."
그제야 루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내 알아냈다.
"그럼, 그 마마라는 분을 만나볼 수 있는가?"
루하의 질문에 모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란이 손사래를 쳤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그만 절 놔주시고 돌아가 주십시오. 신입 호위라면 내일 할 일이 많을 터인데, 이 시간까지 노닥거리시면 안 됩니다."
완강히 거부한 모란이 루하를 퍽퍽 밀치며 나왔다. 모란의 뒤를 따르며 루하가 물었다.
"왜 만날 수 없는가. 혹시 일이 많이 바쁘신가?"
"…….”
모란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루하가 옆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결국 항복한 루하가 안타깝다는 듯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정 그리 하다면, 나에 대해 알려줘라. 난 중앙궁 호위를 맡고 있는 소루하라고 한다고. 마마의 노랫소리를 듣고 꼭 만나 뵙고 싶다고."
모란은 대답이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표정이 훨씬 나아졌다.
루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동궁을 나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