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章.
“몰래 숨겨둔 정인이라도 만나는 거냐?”
동료의 질문에 루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뭐야? 너 요즘 일 끝날 때마다 어디로 달려가잖아.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맞아. 누구 보러 가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몰아치는 질문에 루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빨리 대답 안 하냐? 호위대장님께 다 일러바친다?”
한참을 뜸을 들인 뒤에 루하가 입을 열었다.
“그건……. 비밀이야.”
“재미없네. 김빠진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혼자 남은 루하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정인이라…….
루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 번이라도 그 분이랑 제대로 대화할 수만 있다면.
아니다. 쓸데없는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잖아.
루하는 몸을 일으켰다.
중앙궁 호위를 위해 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루하 호위.”
묵직한 이 목소리는 호위대장의 것이었다.
루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하는 일이 많이 바쁜 걸로 알고 있는 호위대장은 웬만해선 호위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이리 숙소로 찾아온 것은 할 말이 따로 있을 터. 그것도 자신에게.
루하는 긴장되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호위대장이 루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중앙궁 호위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호위대장이 말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다른 이한테 이미 맡겨놓았으니. 소루하 호위는 날 좀 따라오고.”
무슨 일이지? 루하는 긴장된 모습으로 호위대장의 뒤를 따랐다.
****
모란은 동궁에 들어오면서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 호위는 며칠 째 보이지 않고 있다.
약속은 충실히 지키는 모양인데.
모란은 바구니 한 가득 화전을 가지고 들어왔다.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이매가 모란의 기척을 듣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모란이 왔느냐?”
“네. 화전 좀 얻어왔습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
“그거 좋지.”
작은 궁에 딸린 마루에 나란히 앉은 둘은 바구니를 가운데에 놓고 화전을 집어먹었다.
“두견화전(杜鵑花煎)이구나.”
“네. 예쁘게 피어서, 이걸로 화전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맛있구나.”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화전이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봄이었다.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꽃에서도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덜커덩’
그때 동궁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이매가 얼른 뒤로 들어가 탈을 쓰고 나왔다.
모란은 문으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거 앞에 누구 있으십니까?”
“…….”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호위가 실수로 문을 친 건가?
모란은 다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안으로 들어왔다.
화전을 오물오물 씹고 있던 이매가 물었다.
“누구더냐?”
“……바람인가 봅니다.”
“그런가.”
“탈 벗으셔도 됩니다.”
모란의 말에 이매는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실 텐데 왜 벗지 않으십니까?”
모란의 물음에 이매가 싱긋 미소 지어보였다. 물론 탈을 쓰고 있어서 보이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탈을 벗으면 모란이 네가 불편해질 것 같아서 말이다. 좀 쓰고 있어야겠다.”
“제가 왜 불편합니까!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공주마마의 얼굴은 아름다우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모란의 말에도 이매는 탈을 벗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지 않다는 건,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다. 그보다 모란이 오늘 선약이 있다고 하질 않았느냐. 난 알아서 잘 먹고 있을 테니, 어서 나가보아라.”
“……공주마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제일 아름다우십니다.”
잠시 이매를 쳐다보던 모란이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매는 탈 너머의 모란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얼른 가보래도.”
한참이나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지, 가만히 서 있던 모란은 꾸벅 인사를 하고선 동궁을 나왔다.
모란이 떠나고 조용해진 동궁 안에서 이매는 가만히 뒤로 누웠다.
이매는 갑갑했던 탈을 벗었다. 숨이 탁 트였다.
“누군 탈 없이 안 살고 싶냐고…….”
나도 탈 없이 맨얼굴로 동궁을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장난도 치면서, 사랑도 속삭이고 싶다.
그러나 그건 자신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다. 이매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가족들에게마저 버림받은 나는, 동궁으로 쫓겨났다.
오랜 세월부터 이곳에서 모란과 단둘이 자라왔고, 죽을 때까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매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슬프진 않았다.
단지, 외로울 뿐.
어느 순간부터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
“소루하 호위. 중앙궁에서 급하게 회의가 결성되었네.”
그런 중요한 사항을 왜 일개 호위인 내가 듣고 있는 거지?
이상했지만, 루하는 잠자코 호위대장의 말을 들었다.
“일전에 소루하 호위가 동궁의 호위를 맡고 싶다고 했지 않았는가?”
“예, 그랬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대에게 그곳의 호위를 부탁하고 싶은…….”
루하가 눈을 반짝이며 호위대장의 손을 마주잡았다.
“감사합니다! 당장이라도 맡겠습니다.”
루하가 마주잡은 손이 불편한지, 호위대장이 슬쩍 손을 빼며 위엄 있게 말했다.
“그럼 오늘부로 소루하 호위. 그대는 중앙궁이 아니라 동궁 호위를 맡을 것이네.”
서류 처리를 한 호위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루하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앙궁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네. 나도 자세한 건 모르네. 하라는 대로 할 뿐이지. 그럼 더 이상 물을 건 없겠지?”
호위대장이 나가고, 루하는 물끄러미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했던 동궁 앞에 호위의 업무로 서게 되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그 앳된 궁녀는 보이지 않았다.
문도 살짝 열려져 있는 걸 보아하니, 안에 아무도 없는 건가?
루하는 안을 기웃거리다가 그만 안으로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옷에 흙이 잔뜩 묻었다. 루하는 재빨리 일어나 옷을 탈탈 털었다.
그때 안쪽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놀란 루하가 안으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자,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라.”
위협을 하는 거였지만 목소리가 워낙 고와서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찾았다. 목소리의 주인.
그런데 좀 이상했다.
목소리는 나는데 도통 정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십니까?”
루하가 두리번거리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라고 했다. 넌 누구지?”
루하는 대답하지 않고 동궁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발견했다.
“거, 거기 서라고!”
발견했다.
“……탈?”
루하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내는 여자는 도깨비 탈을 쓰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지?”
이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루하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매는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난 그대가 누구냐고 물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호위를 불러 쫓아낼 수밖에 없다."
말은 위협적이게 했지만, 실은 이곳을 지키는 호위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그 어느 사람도 이곳을 지키지 않는다.
미동도 없고, 입도 열지 않는 루하가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 이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대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지? 누군데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다른 이들을 부르기 전에 썩 나가거라."
"……있으십니까?"
루하의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이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지?"
"이곳을 지키는 자가 있다면, 오는 길에 제가 보았을 것입니다. 허나 없는 것으로 보아하니……."
이매는 이를 악물었다.
"없는 것 같군요. 이곳을 지키는 호위는.”
뭐야! 도대체 넌 누구냐고!
"누군가! 대체 누군데 이러는 것인가!"
루하가 씩 미소 지었다.
"이번에 새로 발령받은 호위, 소루하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이매의 동공이 흔들렸다.
"동궁의 호위를 맡을 예정입니다."
이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떠나라.”
이매가 나직이 말했다. 루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발령받은 호위한테 떠나라고 해봤자…….
“중앙궁에서 결정된 사항이라 무를 수 없습니다.”
“난 호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루하가 미소 지었다.
“그럼 노래를 들어줄 사람은 필요하십니까?”
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이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노, 노래? 어떻게 그걸…….”
“동궁 근처를 지나면서 자주 들었습니다. 아름답길 래, 거의 매일 찾아와서 들었죠.”
“…….”
이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하가 말했다.
“호위를 명분으로 이곳에 노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남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이매가 뒤로 들어가더니 화전이 아직 남은 바구니를 가져왔다.
화전은 이제 식었지만, 아직도 그 고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매가 루하에게 화전을 권했다.
그런 이매를 보면서 루하는 쿡쿡 웃었다. 귀엽잖아.
조그만 손으로 바구니를 용케 붙잡고 있는 것도 귀여웠다.
루하는 화전을 하나 집어서 먹었다.
“맛있네요. 제게 화전을 권했다는 건,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겁니까? 아니면 남아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건 이따 모란이가 돌아오면 모란이와 얘기하도록 하라.”
그 말만 남긴 이매는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모란이? 잠시 고민하던 루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 엄청 싫어하는 그때 그 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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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은 이매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가쁜 호흡이 전신을 타고 불규칙하게 흘렀다.
얘기했어. 만났어. 화전을 건넸어.
가끔 나가는 책방 주인하고는 이례적으로 돈을 건넬 때 얘기를 하지만, 모란 외의 다른 사람하고 얘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대로 엎어졌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
선약을 마치고 돌아온 모란은 동궁 정원에 서 있는 루하를 보며 떡하니 입을 벌렸다.
“뭐, 뭐야? 왜 저 사람이 저기 있는 건데?”
루하는 표정이 썩어가는 모란을 보며 직감했다.
일단 잔소리 폭격을 맞고 시작하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모란은 잽싸게 다가와서 말을 퍼부어댔다.
“뭐에요! 조용히 노래만 듣겠다면서! 마마 보기 전에 얼른 안 나가요?”
그때 이매가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놀란 모란이 루하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실실 웃으며 얼버무렸다.
“마마! 어, 이건. 그러니까…….”
“괜찮다. 동궁 호위로 발령받아 왔다고 하는구나.”
“네?”
모란의 눈이 커졌다.
“동, 동, 동궁 호위?”
이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모란은 루하를 잡았던 손을 놓아주고 루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루하는 모란의 노골적인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호위하러 왔다는데 뭐 이리 경계할 필요가 있어?
“이름이?”
모란이 물었다. 루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도 한 번 얘기했던 것 같은데. 소루하라고 한다.”
“그럼. 몇 가지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질문?”
여긴 들어오기가 왜 이리 까다로워?
루하는 속으로 툴툴 말을 내뱉으면서도 잠자코 모란의 말을 따랐다.
모란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힘차게 말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