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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의 새벽
작가 : 라브로지아
작품등록일 : 2016.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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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章. 부드럽고, 촉촉하고
작성일 : 16-08-31     조회 : 118     추천 : 1     분량 : 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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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四章.

 

 “정녕 동궁 호위로 발령 받으신 것이 맞으십니까?”

 

 

 모란의 물음에 루하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엔 내세울 게 없었으나, 이번엔 확실한 명분(名分)이 있었다.

 

 

 “중앙궁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을 것 같은데.”

 

 

 모란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루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쌤통이다. 날 그렇게 싫어하더니.

 

 

 “……어, 어쩔 수 없군요.”

 

 

 저것 봐. 당황하고 있잖아.

 

 루하는 크게 웃어젖히고 싶은 걸 참으며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마마!”

 

 

 그때 이매가 방에서 나왔다.

 

 이매를 발견한 모란은 루하는 제쳐두고, 이매에게 달려가 루하를 가리켰다.

 

 불안과 원망이 가득 섞인 표정이었다.

 

 

 “저 호위를 들이실 겁니까?”

 

 

 호위들의 거처는 자신이 호위를 하는 곳에 따라 정해진다.

 

 이번 동궁으로 배치가 바뀐 루하는 호위청 숙소에서 동궁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한다.

 

 하루아침밤낮이고 매일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루하는 흔쾌히 짐을 싸오겠다고 했다.

 

 모란은 루하와 같이 산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역정을 냈지만, 이미 루하는 짐을 싸겠다고 나간 뒤였다.

 

 이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루하가 동궁을 나간 뒤에도 모란은 멈추지 않았다.

 

 

 “마마. 동궁에 관련된 소문을 알게 된다면 저 호위 역시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이곳을 뛰쳐나갈 거라고요! 상처 받으시기 전에 먼저 내치시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호위청에서 이곳까지 감시하러 오진 않을 테니…….”

 

 

 “모란아.”

 

 

 이매가 나직이 모란의 말을 끊었다. 무심코 이매의 얼굴을 쳐다본 모란은 놀랐다.

 

 

 “마, 마마…….”

 

 

 햇빛을 많이 마주하지 않아 항상 창백했던 이매의 얼굴이 불긋하게 물들었던 것이다.

 

 탈을 쓰고 있던 탓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붉어진 귀와 목이 그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드러난 모습과는 다르게 이매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나도 그리 오래 저 호위가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리하여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마음과 반대인 말이 나오고 있다.

 

 

 “수고 말씀이십니까?”

 

 

 “동궁에 관한 소문을 슬쩍 흘려라. 그럼 겁먹고 도망가겠지.”

 

 

 그런 말을 하는 이매가 어쩐지 쓸쓸해 보여 모란은 고개를 숙였다.

 

 아프고, 아프고, 아파서.

 

 마마께 더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예, 마마…….”

 

 

 힘없는 모란의 대답에 이매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

 

 

 

 

 돌아온 루하는 모란의 안내에 따라 작은 별채에 짐을 풀게 되었다.

 

 중앙궁에 비하면 훨씬 작은 곳이었지만, 그만큼 경치가 좋고 운치 있는 곳이었다.

 

 공기도 좋아서 루하는 이곳이 좋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모란은 오직 혼자서 이곳의 시중을 다 들어야하기 때문에 바빠서 좀처럼 동궁에 붙어있지 않았다.

 

 호위라고는 하지만 내가 지켜야할 대상이 방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딱히 할 일이 없다.

 

 루하는 방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낮잠이나 한숨 청할 예정이었다.

 

 ‘서걱서걱’

 

 그러나 그의 잠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으니.

 

 활짝 열린 창문으로 탈을 쓰고 마루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매가 보였다.

 

 왜 항상 탈을 쓰고 있는 걸까?

 

 루하는 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마루로 나가보았다.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이매는 루하가 다가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옆에서,

 

 

 “이게 무엇입니까?”

 

 

 라는 루하의 질문이 나오자 화들짝 놀라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어, 으으…….”

 

 

 “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루하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매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감추고자 소매 안에 손을 넣었다.

 

 루하는 이매가 그리다 만 종이를 쳐다보았다.

 

 종이에는 활짝 핀 꽃 사이에 날아다니는 노란 나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나비?”

 

 

 매무새를 가다듬은 이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것은 나비가 아니다.”

 

 

 그 말에 루하가 눈을 찡그렸다.

 

 

 “흠……. 아무리 봐도 나비로 보입니다만.”

 

 

 “그것은 모란이다.”

 

 

 모란이라는 말에 루하가 이상한 눈초리로 이매를 쳐다보았다.

 

 

 “저한테는 늘 나쁜 말만 하는 그 궁녀 말입니까? 어떻게 그 궁녀가 나비가 될 수 있습니까?”

 

 

 이매가 고요히 웃었다.

 

 탈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대에게는 나쁜 궁녀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항상 나를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나비 같아 그려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루하는 아예 이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매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마마. 노래를 들려주십시오.”

 

 

 “노, 노래?”

 

 

 “예. 애초에 전 이곳에 마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왔는걸요. 듣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허나…….”

 

 

 “그 궁녀가 없을 땐 저랑 좀 놀아주셔야지요.”

 

 

 루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이매는 머뭇거리다가 그 작고 붉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이 루하의 시선을 빼앗았다.

 

 탈에 난 구멍으로 언뜻 보일 뿐이었지만,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단번에 입맞춤을 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루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노래, 해주십시오.”

 

 

 이윽고 이매의 입이 열렸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달콤하고, 산뜻하고.

 

 때로는 조용하면서, 강렬했다.

 

 그녀의 노래에 순식간에 매혹되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듣다가 어느 순간 이매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노래를 부르는 이매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책방에 가면 있는 ‘오래된 전설 이야기’ 책에 등장하는 선녀인 것처럼.

 

 그녀는 빛이 났다.

 

 

 “예뻐요.”

 

 

 무심코 루하가 중얼거렸다.

 

 노래를 부르던 이매가 입을 닫아버렸다.

 

 한창 빠져있던 루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매를 보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 그, 그게…….”

 

 

 ‘예쁘다’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이매는 당황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하지?

 

 뜻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내게 쓸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루하의 눈이 울긋불긋해진 이매의 귀와 목을 쓸어내렸다.

 

 

 “……부끄러우십니까?”

 

 

 단도직입적인 루하의 물음에 이매는 그 자리를 박차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루하는 이매를 막을 틈도 없었다.

 

 부끄러운 건, 루하도 마찬가지였다.

 

 루하는 커다란 손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으……. 귀엽잖아.”

 

 

 대체 뭘 먹고 저리 귀여운 건지.

 

 루하는 이매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알려줘.”

 

 

 “네, 안 됩니다.”

 

 

 “한 번만.”

 

 

 “안 된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제발.”

 

 

 “아, 좀!”

 

 

 결국 모란은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모란의 기세에 루하가 뒤로 살며시 물러섰다. 아이고, 무서워라.

 

 모란의 날카로운 눈빛이 루하를 푹푹 찔렀다.

 

 볼 때마다 저 눈빛은 무섭다.

 

 

 “저리 가십시오! 빨래하는데 방해되지 않습니까!”

 

 

 모란이 손으로 루하를 퍽퍽 밀었다. 힘이 잔뜩 담겨있었다. 그렇게도 내가 싫나.

 

 남아있는 물기 때문에 루하의 옷이 조금 젖었다.

 

 그 사이 루하는 곁눈질로 아직도 남아있는 수많은 양의 빨래를 보고선 말했다.

 

 

 “내가 빨래를 도와주는 대신 마마께 대해 알려주어라. 이 거래,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루하의 말에 모란이 동작을 멈추었다.

 

 구미가 당기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모란이 곧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루하는 살짝 한기가 돌았다.

 

 모란이 물 묻은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대체 뭐가 궁금한 겁니까?”

 

 

 루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마마에 대한 모든 것. 난 아직 성함도 모르고, 저 분의 직위도 몰라. 단지 동궁에 사는 ‘마마’라는 것만 아는 것뿐이지.”

 

 

 “될 수 있는 대로 다 알려주라는 건가요…….”

 

 

 루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말했다.

 

 

 “나 호위청 소속 호위다. 저 정도 빨래는 순식간에 너끈히 할 수 있지. 여기 온 뒤로 체력이 남아돌아서 오히려 문제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빠른 속도! 이것이 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냐? 한 번 체험해보는 것이.”

 

 

 잠시 고민하던 모란이 말했다.

 

 

 “그럼 일단 시험 삼아 몇 개만 해보십시오. 완벽한 빨래라고 인정이 되면 거래를 하겠습니다.”

 

 

 루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까짓 빨래. 뭐가 어렵겠냐?

 

 

 

 

 ****

 

 

 

 

 “……어흑.”

 

 

 대야에 가득 담겨 있는 빨랫감들을 지분지분 밟으면서 루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옆에서 비누칠을 하던 모란이 놀리는 것 같은 어조로 물었다.

 

 

 “설마 우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다리 당긴다.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다.

 

 어디 하나 빠진 곳 없이 몸 구석구석 싹 다 아프다.

 

 으어어.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야.

 

 루하가 존경 어린 눈빛으로 모란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혼자 다 하는 것이냐? 믿을 수가 없네.”

 

 

 모란이 혀를 쯧쯧 찼다.

 

 

 “얼마 지나지 않고 나가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저는.”

 

 

 “나가떨어지다니! 난 포기하지 않는다.”

 

 

 속도는 느려졌지만, 아직 남아있는 힘으로 루하는 꾸준히 빨래를 했다.

 

 모란은 그 옆에서 보란 듯이 척척척 빨래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한껏 증진되었던 사기가 꺾였다.

 

 루하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들린 솜씨네.”

 

 

 “제가 왕년에 우물가의 여신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지요.”

 

 

 “풉.”

 

 

 모란의 넉살에 루하가 웃었다. 그때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단 하나.

 

 

 “모란아.”

 

 

 빨래에 정신이 없던 모란이 벌떡 일어서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루하는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는 모란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예! 마마.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마.”

 

 

 그렇게 말한 이매는 이미 탈을 쓰고 장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상태였다.

 

 나갈 준비를 먼저 끝낸 것 같았다. 모란이 물었다.

 

 

 “책방가시는 겁니까?”

 

 

 이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탈을 쓴 상태였다.

 

 잠시 이매를 보던 루하가 물기 젖은 손을 옷에 대충 문질러 닦고 덩달아 일어섰다.

 

 

 “난 호위이니, 마마와 함께 다녀오겠다.”

 

 

 그간 루하가 했던 모든 말과 일을 반대했던 모란도 이번만큼은 허락해주었다.

 

 안 그래도 나가실 때마다 불안했는데. 잘 됐지, 뭐.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모란이 루하에게 꾸벅 인사했다.

 

 루하가 맡겨주라는 의미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이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살짝 기분이 상기되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껏 누구하고는 같이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들뜬 것이었다.

 

 루하가 호위복을 갖춰 입고 검을 챙겼다.

 

 둘이 함께 하는 첫 외출이었다.

 

 

 “나가시죠. 마마.”

 

 

 루하가 동궁의 커다란 문을 열어젖혔다.

 

 환한 바깥세상이 이매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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