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章.
몇 번 가본 길. 이매는 익숙하게 앞장서서 나갔다.
그런 이매를 루하는 흐뭇한 눈길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매는 많이 떨리는지, 몇 번이고 들고 있던 책을 놓쳤다.
루하가 이매에게 손을 내밀었다.
“책 이리 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매는 책을 루하에게 건넸다.
루하는 책을 안전하게 품에 안고 뒤를 따랐다. 책을 슬쩍 쳐다본 루하가 물었다.
“꽃신 작가님 책인 건가요?”
“꽃신 작가님을 아느냐?”
이매가 물었다. 루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책을 자주 보지는 않지만, 하도 유명해서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그럼…….”
이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루하가 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꽃신 작가님께서 어디 사시는지도 아느냐?”
묘한 흥분과 기대감이 어우러진 말투였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루하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왜, 왜 웃는 것이냐?”
탈 안의 고운 이매의 눈이 루하를 지긋이 응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귀여워서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루하는 대충 얼버무렸다.
“제가 꽃신 작가님이 사시는 곳까지는 모릅니다.”
“……그건 그렇겠지?”
금세 풀이 죽어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이매를 보며 루하는 달콤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떡하지? 코피 뿜을 것 같아.
“제가, 꽃신 작가님이 사시는 곳을 알아봐 드릴까요?”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수습할 틈도 없이 이매가 눈을 반짝이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야 고맙지.”
“예,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시간도 잠시, 벌써 책방 앞에 도착했다.
****
문을 열자, 퀴퀴한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루하는 쿨럭거리며 이매의 뒤를 따랐다.
어찌나 먼지가 많은지 앞이 뿌얘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이매는 자주 와서 그런지 쭉쭉 앞으로 잘만 나아갔다.
주위가 먼지로 하얀 공간 안에서 루하는 다급히 이매를 찾았다.
어느새 이매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마마! 어디 계십니까?"
그때 어디선가 팔이 쑥 나와 루하의 소매를 잡고 당겼다.
"여기."
달콤한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루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목소리다.
루하는 온몸에 힘을 쭉 빼고 이매가 잡아당기는 쪽으로 끌려갔다.
책방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마침내 먼지가 걷혔다.
루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득 들어찬 서가에 책이 빈틈없이 꽂혀있었다.
이매는 어느새 루하의 소매를 놓고 서가에 다가가 책을 고르고 있었다.
루하는 이매가 잡았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곁으로 다가갔다.
"꽃신 작가님의 책을 고르시는 겁니까?"
루하의 질문에 이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한 모습조차 귀여웠다.
루하는 전혀 지루할 틈 없이, 이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책 두 권을 양손에 들고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고민하는 이매도 귀여웠고, 작게 한숨을 흘리는 모습도 귀여웠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귀여웠다.
"진짜 귀여워."
루하는 붉어진 얼굴을 두손에 묻었다. 도저히 눈 뜨고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음, 이걸로 해야지. 가자."
이매의 시선이 루하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두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루하를 보던 이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아픈 것이냐?"
"아, 아닙니다!"
루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 바람에 붉어진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얼굴이 빨간데, 열이 있는 것 같구나. 돌아가는 길에 약방에 들려보겠는가?"
"괘, 괜찮습니다! 좀 더워서 그런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순전히 마음이 시켰다.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루하의 볼을 짚었다.
"뜨겁구나."
자신이 다른 이의 볼을 만졌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 후로부터 얼마 안 돼서였다.
화들짝 놀란 이매가 얼른 손을 뗐다.
"어, 그. 미안하구나."
이매는 루하를 지나쳐 책을 계산하기 위해 갔다.
루하는 이매의 손이 닿았던 볼을 지분거리다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어떡해.
****
"근데, 아가씨. 저 남자는 누구야?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책방 주인이 책값을 계산하며 물었다. 책방 주인이 가리킨 곳에는 루하가 서 있었다.
책방 문 사이로 살짝 비쳐들어오는 햇빛이 루하를 비추었다.
햇빛으로 생긴 후광 덕분에 그는 귀공자(貴公子)처럼 보였다.
"호위……에요."
호위란 말에 책방 주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귀티가 나더니만, 아가씨 집 부잣집이었구나?"
이매가 궁궐에서 산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책방 주인은 루하와 이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을 뿐이었다.
"어디보자……. 또 꽃신 작가의 책인건가?"
"네."
"그래, 자 여기 있소이다."
"수고하세요."
"예. 안녕히 가세요."
나란히 나가는 루하와 이매를 보며 책방 주인은 중얼거렸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만."
****
돌아가는 길은 설렘의 연속이었다.
루하는 스칠 듯 말듯한 이매의 손도 신경쓰였고, 붉게 물들어 있는 이매의 귀도 신경쓰였다.
지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마마."
루하가 말을 걸었다.
이매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듣고 있다는 표시로 루하를 슬쩍 쳐다보았다.
"저, 그…….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종의 떠보기였다. 만난 지 오래 안 되었지만, 자신을 생각하는 마마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대에 대해?"
이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하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탈, 벗으면 예쁠 텐데. 왜 벗지 않는 걸까?
"그대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매가 말했다. 그게 끝?
루하는 내심 기대 했던 만큼, 조금 실망했지만 애써 웃어보였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니."
"그대는 좋은 사람이 아닌 건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꼭 끌어안은 채로 이매가 나직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대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곁에 있어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니까."
"……."
왜, 왜 이러는 거지?
가슴이 막 쿵쾅거리고, 애틋해.
참을 수 없어서.
내 앞에 있는 당신이 미치도록 예뻐서.
루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동그란 눈의 이매를 보니, 잠깐이나마 고개를 들었던 뜨거운 마음이 사그라졌다.
루하는 고개를 저었다.
"전 마마의 호위니까, 곁에 언제까지고 있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루하의 눈동자가 어쩐지 달콤해서, 이매는 아찔함을 느꼈다.
뭐지? 뭐야. 이 분위기는 뭔데.
"얼, 얼른 가자."
이매는 루하를 지나쳐 앞장섰다.
그런 이매의 뒤를 묵묵히 따르며 루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모란은 동궁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둘 사이에서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빨래도 마침 다 끝난 상태였다.
모란은 이매에게 팔짱을 낀 채 루하를 내버려두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마마. 밖에서 무슨 일 있으셨죠?"
이매는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모든 걸 얘기했다.
모란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이매는 모란이 왜 화를 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란은 이매에게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다과와 차를 가져다 준 뒤, 루하가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
쾅쾅쾅.
"이봐요!"
이제는 나를 '이봐'라고 부르는 건가.
하지만 부르는 호칭 따위는 평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루하는 별 거부감 없이 문을 열었다.
"당장 따라 나오세요!"
모란이 다짜고짜 화를 냈다. 루하는 이젠 그러려니 하면서 따라 나섰다.
****
모란은 별채 뒷편으로 갔다.
이곳엔 커다란 감나무 하나가 있어, 시원한 그늘 밑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란은 루하를 땡볕에 세워놓았다.
"할 말이 뭔가?"
루하가 물었다. 모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당장 호위청에 가서 동궁 호위 못 맡겠다고 하세요!"
이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말했지 않은가. 이건 중앙궁에서 결정된 사항이라, 호위청에 가서 말을 해도 못 바꾼다고. 정 내가 싫다면 직접 중앙궁에 가서 청을 넣어보는 건 어때?"
일개 동궁의 궁녀가 중앙궁에 청을 넣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모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희 마마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딱히 괴롭히진 않았는데. 마마도 즐거워 하셨고."
할말이 없어진 모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문득 이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그리 오래 저 호위가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리하여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동궁에 관한 소문을 슬쩍 흘려라. 그럼 겁먹고 도망가겠지.'
그렇지! 바로 이것이다.
'동궁에 관한 소문'
이것만 있으면 이 호위를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모란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루하는 그런 모란의 속마음은 모른 채,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궁녀가 나한테 왜 이럴까? 아, 혹시.
"나랑 마마 둘이서만 나간 게 많이 외로워서 이러는 건가?"
모란이 입술을 뿌우 내밀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절대 아니라고요. 단지 저는……."
모란이 말을 멈추었다. 루하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지 저는. 뭐?"
"전……."
모란이 앙칼지게 눈을 치켜뜨고선 외쳤다.
"마마께서 상처를 받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뿐이라고요!"
대체 내가 무슨 상처를 준단 말인가.
"알아듣게 얘길 해야, 내가 뭐라도 하지."
"마마께서는, 마마께서는……."
모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놀란 루하가 어쩔 줄 몰라했다.
"왜 우는 거야? 잠깐, 잠깐. 울지 마. 왜 이래?"
이러다 마마께 들키면 열심히 쌓은 호감 떨어지는 건 순식간인데.
"뭐든 도와줄게. 말만 해! 울지 말고. 뚝!"
계속 울먹이던 모란은 루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루하는 뭐든 도와주겠다는 말을 순간 후회했으나, 근처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 불안해졌다.
절대 마마께 들키면 안 돼.
"울지 마."
루하가 다급하게 모란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바람 때문인지 계속해서 바스락 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아세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모란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안다는 말인지. 루하는 어르고 달래며 추임새를 넣었다.
"응, 응. 얘기해봐."
잠시 루하를 응시하던 모란이 얘기했다.
"이곳, 동궁에 관련된 소문 말이에요."
****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리고, 달릴 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이매는 그제야 발을 멈췄다.
더운 숨을 뱉어낸다.
조금 전, 별채 뒤편이 소란스럽길 래 호기심이 들어 가보았다.
그랬더니, 모란과 호위가 같이 있는 게 아닌가.
거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모란이 울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모란이 우는 걸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으나, 호위가 그 눈물을 닦아주는 장면을 보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모란의 눈물을 닦아주는 호위의 눈빛이 애틋해서, 더 보기 힘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더욱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저 호위가 동궁에 들어오면서, 많은 게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