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에 맺힌 한이 많더냐.
이승에 남긴 아쉬움이 많더냐.
영혼아, 영혼아
이승의 걱정일랑 하지를 말고
이승의 남겨둔 아쉬움 잊고 가거라
영혼아, 영혼아
이승의 부정 깨끗이 씻고, 맺힌 한(恨) 시원이 풀어
황천길 사뿐사뿐 걸어 걸어
꽃 만발한 극락에 가거라
영혼아, 영혼아
극락가는 황천길 모르거든
새 등 타고 훠이훠이 날아가거라
뒤죽박죽 온갖 말들을 섞어 만든 엉터리 넋풀이 노래가 그럴싸하게 영혼의 넋을 풀어주며 그 저승 가는 길의 방향마저 옳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오구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달짜의 노래가, 아니 그 가사가 썩 맘에 든 것이다.
“극락 가는 길 새 등 타고 날아 가라라… 기는 없어도, 무당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건가.”
“무당과 사자의 피를 갖고 태어났으니, 그 피의 본능으로 알고 있겠지요. 저승 가는 길을.”
오구의 말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자가 그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오랜시간 침묵을 지켜온 이의 목소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노래와 연주소리에 눈발마저 거세져 굿판의 분위기는 한 것 더 고조되었다. 달자의 발도 치맛자락 사이에서 보일락 말락 하며 빠르게 속도를 내며 회전하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지전의 마찰 소리가 더욱 커지고 영혼을 부르는 달자의 호흡도 점점 거칠어 졌다.
춤을 바라보는 오구와 저승사자가 순간이지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왔군.”
“그렇군요. 왔습니다.”
사자의 눈이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주위의 나무들을 휘젓듯이 빠른 속도로 훑어보았다. 마치 먹이를 찾으려는 짐승마냥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오구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처음 그 시선 그대로 달자만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 더 추다가 멈추면 되는 건가…?'
처음해보는 굿이라 언제 멈추면 되는지 달자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금씩 회전의 속도를 줄이며 멈추자 생각하고 지전을 휘두르며 회전을 하고 있는 그때였다.
달자의 뒤쪽, 즉 흰 천을 묶어둔 복숭아나무 중심의 뒤편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크기로 보아 아이인 듯 했다.
'뭐지? 어째 저기에 꼬마애가?'
굿을 시작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아직 동은 오르지 않아 숲은 컴컴하기만 하는데 이런 곳에 아이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빨리 도는 바람에 잘못 보았나 싶어 속도를 줄이고 회전하여 그 아이가 있던 장소를 다시 바라보았다.
'분명 저기 있었는데. 잘 못 보았나?'
아이가 없다.
잘못 보았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고 곧 생각을 고쳤다. 그것은 그곳에 있던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이 한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상아색 저고리위에 짙은 남색의 조끼를 걸치고 아래는 산호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순간이었지만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요즘 같은 때에 그리고 지금 이 계절 이 시간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이기 때문이다.
'잘 못 본 것이 아니야. 분명 봤어.'
이번에는 조금 더 속도를 낮춰 돌아야겠다고 몸을 비틀려고 하는 순간, 시선의 조금 위로 앞뒤로 움직이는 작은 발이 보였다. 한복을 입었을 때만 신는 꼬까신이다. 조끼와 같은 색 바탕에 빨강 물결무늬가 새겨져있다.
'아.'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도는 걸 멈출 수 없어 다시금 한바퀴를 돌아 이번엔 시선을 좀 더 높이 해 바라보았다. 한 작은 아이가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어째서 저런 곳에.'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려 보았다.
아이의 나이는 대략 6~8세 사이로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역시 아까 본 한복이다. 머리는 사극에서 보았던 댕기머리였는데 요즘 아이 답지 않은 헤어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 퍽 어울려 보였다. 인상이 무척 귀엽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지독히 하얘 보이는 얼굴과 올망졸망 하다고 말할 수 있는 크고 검은 눈, 코도 오뚝하며 그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입술도 작고 붉다.
어떻게 저런 곳에 아이가 앉아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 볼 수 없는 상황이라 달자는 도는 동작을 천천히 해가며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달자의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빙긋―
달자를 향해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그리고 아이는 고개를 돌려 옆 가지에 소복하게 쌓여있는 하얀 눈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마치 그것이 부드러운 카스텔라라도 되는 듯 크게 한 입―
'뭐야?'
달자는 아이의 의아한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눈을 베어 물은 아이의 입술은 더욱 붉게 물들며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운다.
씨익―
조금 전 웃음과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그것은 마치 불길한 듯한 미소였다.
벙긋 벙긋.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웃음이 사라진 아이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 노래를 들으러 온 거야?”
아이의 가냘픈 목소리가 달자의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노래? 무슨 노래를 말하는 거야?'
아이는 달자에게 자꾸만 '내 노래가 좋은 거지? 내 목소리가 좋은 거지?' 라고 연신 웃으며 말할 뿐 달자의 대답은 바라지도, 아니 필요치도 않은 듯했다.
“그래서 다들 내 노래를 들으러 온 거지?”
'굿이 끝나면 저 아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자신의 노래가 형편없어 혼이 저승에 못간 다고 생각한다면 따로 무가를 부르는 사람을 불렀을 수도 있다. 그럼 저 아이도 무당인 건가 생각하면 아이의 옷차림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무당의 옷이라고 하기에는 색이 좀 다르지만 요즘에는 충분히 시대에 발 맞춰 색이 거부감 없어 보이는 저런 옷을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린 아이지 않은 가.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아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싫다고 했잖아…"
'싫어? 뭐가?'
춤을 추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달자는 아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듣기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와 날 찾아온다고 해서 내가 부를 줄 알아!”
'누가 그런 소리를?'
아이는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듯 다시금 소리쳤다.
"듣기 싫다 했잖아! 내가 부를 줄 아냐고! 내가 노랠 부를 꺼라 생각했어! 난 부르지 않을 꺼야!"
갑작스런 아이의 비명스런 외침은 고막이 찢어 질 듯한 날카로운 소리였다.
'아아아아아아... 아파... 귀가... 아아아아 아파.'
귀가 아파온다.
참을 수 없는 고막의 아픔에 지전을 쥔 두 손으로 귀를 막아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더 깊숙이 소리가 찔러 오며 통증은 더욱 심해진다.
'…어째서?'
“부르라, 부르라, 하면 내 불러주지.”
“.......뭐?”
“나의… 원망과 절망을 가득 담아…. 노래를 불러 줄 거야. 부르라, 부르라, 부탁 한다면 내 불러 줄께. 나의,”
아이의 붉은 입술이 꿈틀거리듯 기분 나쁘게 움직인다.
달자의 다리와 팔이 떨려온다. 추위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춥지만 전신에 달려오는 떨림은 무언가 다르다.
'아...'
아이의 붉은 입술이 다시 움직이다. 흰 이를 드러내며…...
“부르라 부르라 하면 불러주지. 나의 원념을 가득 담아… 나의 목울대를 울려서… 너희들의 고막을 찢어 놓을 노래를 부를 거야!!!!!”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아이의 목에 가로로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지는 가 싶더니 그 선에서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고통의 비명을 지른 것은 아이가 아닌 뜻밖에도 춤을 추고 있던 달자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달자의 고통의 찬 비명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푸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면 산새들과 들짐승이 놀라며 일제히 어딘가로 달아난다.
"달자야!"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말년이 쓰러진 달자에게 달려간다. 말년이 이름을 불러보고 얼굴도 두드려 보지만 의식이 없다.
"달자야! 아이고 내새끼."
“혼절이 군”
말년의 뒤를 이어 온 저승사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년이 두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을 머금고 오구를 바라보자 오구는 그 모습에 아무 말 없이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다. 그러자 어찌된 것인지 손녀를 끌어안으며 애뜻하게 부르던 말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달자를 놓아두고 어렵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상황에 악사 둘과 기천 부부도 달려왔다.
“할멈. 무슨 일이요? 손녀는 왜 이런 다우?”
"달자는 괜찮은겨? 갑자기 왜 이려?"
아쟁을 들고 허겁지겁 뛰어온 악사가 숨을 헐떡이며 묻는다.
굿판에서 무당이 혼절을 했다.
아무리 악사라지만 굿판만 벌써 20년째다. 예감이 좋지 않다고 느낀 것인지 표정이 어둡다. 기천은 쓰러진 달자의 모습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기천이 걱정 어린 마음에 말년을 불러 보지만 말년은 눈밭에 쓰러진 아이를 잠시 이대로 나둬야 한다는 괴이한 말을 하고 달자의 몸 밑에 겉옷을 깔아준다. 아이의 할머니가 그리 말한다면 타인인 그가 무어라 할 말은 없다.
“뭐야? 그냥 저 대로 놔두는 거예요? 이런 새벽에 눈밭에서 소복입고 쓰러진 아이를? …기분 나쁘잖아. 소름끼쳐! 그러게 이런 짓은 왜하는 거예요!”
“쉿! 조용히 해.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기천의 제지에 미옥은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고 입고 있던 애꿎은 고급 코트의 깃을 여민다. 돌아가고 싶다며 웅얼거리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기천은 말년에게 죄송하다는 사과를 한 뒤 미옥과 함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의식도 없이 쓰러져 있던 달자의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썩 들썩 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아닌 위 아래로 탄력을 받듯이 힘차게 퍽퍽 소리를 내며 온 몸이 들썩인다.
발작인 것인가?
제정신인 사람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다르다.
기천은 놀라 말년과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년과 악사들은 입술을 깨물고 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이 상황과 아이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행동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바라 볼 뿐이었다.
기천은 자기 바로 옆에 와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굿이 시작하며 나타난 은발의 남자는 가까이서 보니 청회색의 머리를 한 미남형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발작을 하는 아이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뿜어내는 시선과 잘생긴 얼굴이 한 몫 더해 지독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뭐야, 이 사내는.'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돌려 기천을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바라본 남자는 외적으로는 호감형의 얼굴이라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그 시선을 받은 기천의 몸에서는 한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