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얘기 들었어? 무당집 손녀. 그 아이가 글쎄 저승사자의 아이라네.
-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그럼 무당이랑 저승사자가 붙어먹 생긴 아이라는 겨? 어디서 그런 시답잖은 얘길 듣고 온겨.
- 에이, 그게 나도 말 같지 않은 소린 건 알지. 어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에 벌어 질 법한 일인가.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가 처녀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불쑥 배가 불러 왔다는 거야. 헛구역질까지 하고.
- 무당집 할머니는 뭐라시는데… 그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거 아녀. 아니지. 어느 사내랑 이렇쿵 저렇쿵 해서 생긴 아 아니여?
- 물론 그 뱃속 아이가 누구 씨냐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런데 그 애 엄마가 배 를 끌어않고 하는 얘기가 이 아기는 사자님의 아이예요! 라고했다 자나.
- 저런 망측 혀라. 단단히 미친 거구먼. 정신을 놓지 않는 이상 그런 소릴…그러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는 거자녀. 미친거네 미친거. 아무리 용하다는 무당도 제 딸년 미치는건 막지 못하는 구먼.
- 그렇지 않아도 미친 것인지 어쩐지, 아이를 낳고 어느 날 밤에 불쑥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어디 병원에라도 입원 시킨 건 아닌가 하고 한동안 동네가 그 얘기로 시끌 했지.
“그건 제 태생이 불분명해서 그런 건가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를 불경스러운 아이이고, 거기에 더군다나 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량품이라! 반무당도 안 되는 애라 그런 가요!”
처음 만났을 적에 자신을 보고 불량품이라 말하던 오구의 말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었는지 달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 언성을 높였다.
툭!
입술을 깨물며 눈에 힘을 주고 오구를 바라보고 있자 한 장의 원고가 입력이 끝났는지 구겨진 원고용지가 버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닥이 아닌 달자의 머리를 맞추고 떨어진다.
“…?!”
“왜 그리 열을 내는 거야. 시끄럽잖아."
".......그건!"
"그리고 난 네가 곰과 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났건, 거북이와 토끼 사이에서 태어났건, 이름 모를 누구의 자식이건 그런 건 상관없다고.”
“…오구 씨”
화려한 미사어구를 넣은 위로의 말은 아니었지만 달자의 가슴에 살짝이지만 감동의 물결이 이는 듯 했다.
비록 그 예가 곰과 호랑이, 거북이와 토끼일지언정 오구는 그 짧은 말에서 자신의 출생을 불경하다고 보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라고 달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가 말이야. 너는 생각 좀 해봐라. 아님 머리가 나쁜 건가? 도대체 솟대의 영조인 나를 뭐로 아는 거야. 자고로 솟대란 말이다. 천계와 이승을 이어주는 영조란 말이다. 예전에는 죽은 이의 영혼을 태워서 천계까지 데려다 주는 일도 했었다고. 그런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긴데 지랄 맞은 저승사자 놈들이 뭐 거창한 프로젝트라도 되는 듯 이러한 나에게 무당을 붙여! 그것도 아무런 지식도 갖추지 않고 생각도 없는!아니 생각이라는 거 조차 않하는 초짜 무당을? 도대체 저승사자 놈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솟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기나 한거야? 쥐뿔도 없으면서 솟대 영조의 조수로 들어오겠다니. 그러니깐 네가 불량품일 수밖에...... 그런데 태생이 어쩌고 저쩌고. 너는 무당집에서 자랐으면서 아무런 기본 지식도 없잖아. 무식은 자랑이 아니야. 태생타령 하지 말고. ”
정말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을 놈!
좀 전의 느꼈던 아―주 작은 일말의 감동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잘게 잘게 부셔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당장 새로운 결심을 하나 박아 넣겠다고 달자는 결심했다.
그 결심이란, 즉―
널 내 손으로! 이 조달자의 손으로! 얼굴에 어울리는 겸손이라는 말을 아는 신으로 만드노라!
툭!
이전 날의 결심을 생각하며 새로이 각오를 다지는 달자의 머리에 종이뭉치가 날아왔다.
“오구 씨! 제발 원고용지를 머리에 던지지 말아달라고 제가 몇 번을 부탁 했잖아요!”
“불러도 대답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머리에 맞으면 그 멍청한 머리가 더 나빠질까 걱정되서 그러냐? 그보다 어디서 멍하니 망상에 빠져있기나 하고 다 큰 처자가 그게 무슨 포즈야.”
달자는 쌓여진 책 더미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반대쪽 손에는 먼지떨이를 불끈 쥔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독립투사라도 되는 듯.
조금은 민망한 포즈에 달자는 살그머니 책에서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보다 오구가 종이뭉치를 날려가며 달자를 부른 이유는 조금 전에 사온 포도주스 때문 이었다.
“이 주스가 아니잖아.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 내가 방금 냉장고를 열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내가 말한 건 S사의 100% 포도 주스였다고. 네가 사온 건 완전 다른 거잖아. 간단한 포도주스 이름 하나 집어넣을 자리, 네 텅 빈 머리에는 더 이상 없는 거냐?”
또다시 머리용량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저 자그마한 머리통을 날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가며 달자는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요 앞 구멍가게에는 안 판단 말이에요. 큰길 마트까지 가야 살 수 있는데 오늘은 서점 일도 많이 있어서 그냥 그걸로 사왔어요. 오늘 하루만 참고 드세요. 내일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들렸다 사올 게요.”
오구는 달자의 변명을 듣고 아무 말도 없이 긴 유리컵에 보랏빛 액체를 따른 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는 어차피 마실 거면서 왜 머리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처먹을 꺼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느는 건 비꼬는 재주밖에 없나 보다.
능구렁이 영감탱이!
겉 껍데기만 번지르르 탱탱하지 속은 수백 수천년 묶은 능구렁이가 틀어 앉아 있을 것이다.
달자도 시끄러운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웬만하면 학교에서 10분가량 떨어진 마트까지 일부러 찾아가 심부름을 해오겠지만 오늘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여유를 부리고 싶지 않아 구멍가게서 대충 손에 잡히는 포도 주스 한 병을 사온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오구 씨가 기간에 걸쳐 잔뜩 구해놓은 헌책들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방아 건물의 반절은 서점으로 반절은 주거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점은 네 개의 벽 중 출입구과 집필실을 연결하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전부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내부 공간 역시 성인남자의 가슴팍 정도 높이의 책장들로 즐비해 있다.
책장들 사이사이에도 수많은 책들이 질서 없이 넘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쌓여있는데, 이러한 정신없는 서점의 공간 한쪽 구석에조차 지난주 어느 지방에서 구했다는 ―당장이라도 곰팡이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낡고 낡은 책들이 풀다 만 채 산더미 같은 모양새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오구가 원고마감에 쫓겨 풀다 만 것도 있는지 노끈에 묶여져 있는 책 더미도 눈에 띤다.
아마 마감으로 인해 만지지도 못할 책들이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났던 것인지 어젯밤 오구는 달자에게 이 방대한 양의 책을 정리하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한 것이다.
꽂을 책꽂이도 없는 이 마당에 이 이상 뭘 더 정리하라는 건지 한 숨만 나 올 뿐이고 계속해서 책을 사다 나르는 오구도 얄밉기만 한 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