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강남 한 주택가에 있는 모던한 디자인의 이층집.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은아의 엄마가 10년 가까이 가정부로 일했던 곳이다. 가끔 엄마를 따라와 집 앞에서 기다린 적이 몇 번 있어서, 은아에게는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문 앞에 서서 망설이던 은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인터폰을 통해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저, 지은아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했던 윤은심의 딸인데요.”
달칵,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아직 이른 봄이라 새싹조차 자라지 않은 넓은 정원은 칙칙했다. 하지만 중앙에 있는 화려한 분수대는 말라 있어도 뭔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터폰를 통해 들었던 목소리의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한 화장을 했지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나 여기 집 주인 여동생 이염인이야. 예전에 한번 본 적 있지?” 염인이 특유의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네...제가 어렸을때...”
은아는 생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염인은 입가에 친절한 미소를 띠며 은아를 찬찬히 살폈다.
“어렸을때도 이쁘더니, 잘 컸네. 지금 몇살?”
“열일곱 살이요.”
“...어머니 일은 정말 안 됐어.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을 바라봤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어머니 유품 가지러 온 거지?”
“네.”
“그거 2층에 상자에 담아서 뒀으니까 가져가. 그리고 내가 오빠한테 잘 말해놨으니까 마지막 월급 두 배로 계좌에 넣으라고 할게.”
“감사합니다.”
은아는 고개를 최대한 숙여 인사하고 황급히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은아가 사는 단칸방과는 차원이 다르게 따뜻한 이곳.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이 층으로 오르자, 길게 펼쳐진 복도에 방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은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때였다. 은아가 막 지나치려던 방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온 건. 갑작스러움에 놀라버린 은아는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큰 키지만 은아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얼굴에 교복 차림을 한 그 남자는 은아를 슬쩍 내려봤다. 마치 귀찮은 벌레라도 보는 듯한 느낌으로. 거의 차갑다 못해 서늘한 그 눈빛에 은아는 기가 죽었다. 은아는 엄마가 주인 아들에 대해 종종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과 동갑이고 참 괜찮은 아이라고 했었는데.
“너 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남자의 차가운 태도에 은아는 당황해 일어날 생각도 못 하며 우물쭈물하였다.
“너 뭐냐고” 남자는 다그쳤다.
“죄, 죄송해요” 은아는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제가, 그러니까..제가 왜 여기에-"
“안 비켜?” 그는 관심 없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
“네! 정말 죄송-”
은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애는 가버렸다. 다시 조용해진 복도에 홀로 남은 은아는 서러워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이 집에 와야 했던 것도, 재수 없는 남자애를 만난 것도 모두 그녀를 매우 분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눈물을 쓱 닦아낸 후에야 복도 끝에 있는 작은 상자가 은아의 눈에 들어왔다.
부엌에서 요리책을 들여다보던 염인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그녀의 조카이자 은아에게 차갑게 굴었던 도운이 부엌에 들어섰다. 염인은 요리책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도운을 봤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다 일어나고? 그리고 지금 교복 입은 거야? 학교 가려고?” 그녀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도운은 시큰둥했다.
“참, 참참 은심씨 딸 봤어?”
“은심씨 딸?” 도운이 그제야 고모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래. 어머니 유품 가지러 왔잖아. 이 층으로 갔었는데 못 봤어?”
도운은 내려오다 마주쳤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아....봤어. 그 애가...은심 아줌마...딸이야?”
“그래. 지금 갔나?”
염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운도 염인을 뒤따라 부엌을 나섰다. 하지만 집은 고요했고 신발장에도, 그 어디에도 은아의 흔적은 없었다.
“갔나보네. 진짜 딱 짐만 싸서 갔네.” 염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왜? 할 말 있었어?” 도운이 물었다.
“뭐.. 10년 가까이 우리 집 가족처럼 지냈던 은심씨 딸이고..내가 알기로는 남편은 더 일찍 세상 떠난 걸로 아는데.. 그럼 이제 고아가 돼버린 건 아닌가 싶어서…. 만약 사정이 딱하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지.”
염인의 말을 가만히 듣던 도운이 거실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 추위가 덜 풀린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잘 살겠지. 뭐.” 그는 간단히 말하고 쇼파에 털썩 앉았다.
“으이구 이 매정한 놈. 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은심씨가 너 얼마나 챙겨줬니? 친아들처럼 보살펴주고….”
도운은 듣기 싫다는 듯 쇼파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한편, 집을 나선 은아는 엄마의 유품이 든 상자를 품에 끌어안고 천천히 걸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퍼져가는 것을 보며 은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입김이 나올 정도의 시린 날씨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와 외삼촌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은아는 내일 아침 일찍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그녀에게는 서울의 하늘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엄마, 나 정말 잘 지낼게.’ 은아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은아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 엄마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행복할게.” 은아는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10년 후.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밖에서 나는 소음에 은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을 찡그리고 몇 번 다시 잠을 청해보려고 노력하던 은아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사는 작은 원룸의 최대 단점은 방음이 잘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떠들썩한 적은 없었다.
‘무슨 공사라도 하나….’
이젠 짜증보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은아가 현관문을 조금 열었다. 문밖으로 고개만 빼꼼히 내민 그녀는 활짝 열린 옆집 현관문과 그곳을 드나드는 이삿짐 직원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짐을 끊임없이 안으로 들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오는 것으로 보였다.
“이건 어디에다가 놓죠?”
서랍장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직원이 뒤를 돌아 이사 들어오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질문했다.
“창가 쪽이요.”
문을 닫으려던 은아는 옆집으로 이사 오는 사람의 얼굴을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기다렸다. 마침내 계단을 끝까지 오른 것은 훤칠하게 잘생긴 이십 대 중반의 모델 같은 남자였다. 매끄럽고 흰 피부에 빠져들 것만 같은 깊고 큰 눈매, 차가운 인상을 주는 콧대와 턱선, 그리고 그 얼굴에 걸맞은 매우 큰 키와 긴 팔다리.
은아는 남자의 외모에 정신이 팔려 대놓고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그는 상자를 들고 있었다. 직원이 먼저 자신의 집에 들어가길 기다리던 남자는 은아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당황해서 얼어붙어 버린 은아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먼저 가벼운 목인사를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은아는 덜 풀린 목으로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남자가 집에 들어간 후에야 은아는 자신이 세수도 안 했을뿐더러 목이 늘어난 티에 무릎이 나온 츄리닝 바지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이런 쪽팔리는 경우가 다 있지…?’ 은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은아는 그때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옆집 남자와 어떤 질긴 인연이 앞으로 펼쳐질지에 대해.
짐들이 가득한 원룸 한가운데 도운이 누웠다. 하루종일 이삿짐을 챙겨서 새로운 집으로 와서 짐을 옮기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 한끼도 먹지 못해서 더욱 지칠만 했다. 피곤한지 눈을 감고 한참 있던 그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몸을 움직였다.
“...여보세요” 깊게 잠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도운아, 이사는 잘 갔어? 고모가 뭐 도와줄건 없고?” 염인이었다.
“...됐어..피곤해.”
“그래 알았다. 아무튼 넌 꼭 그래야겠니? 전에 살던 곳이 우리 집이랑도 가깝고 좋았잖아.”
“...이젠 아버지가 그 집을 알잖아.”
“...그래 알았어. 암튼 너나 오빠나 고집불통이다.”
염인과 통화를 마친 도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 졸업 후, 아버지가 있는 회사로 들어가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건축 사무소에 들어가고부터 그와 아버지의 관계는 끝이 났다. 사실 한참 전부터 이미 부자의 관계는 끝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금이 가고 있었다. 서서히 터질 날만을 기다리며.
그 후에는 아버지가 자신이 사는 곳을 알게 되면 이사를 가고, 그러면 아버지는 또 사람을 시켜 그를 찾게 하고, 그럼 또 도망치고..의 지긋지긋한 반복이었다.
한참을 바닥에 누워 멍을 때리던 도운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 방을 가득 채운 짐들을 풀 때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