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있는 걸까. 우연의 일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요 며칠사이에 우연이 너무 많았다. 날 감시하고 있는 걸까. 감시하고 있구나. 감시하고 있다. 감찰관에게서는 오만하고 거북한 냄새가 났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구나.
“경장 연봉이 얼마나 되죠? 차 타야지, 밥 먹어야지, 집세 내야지, 가끔 친구들한테 한턱 쏴야지. 그게 사회생활이니까. 그잖아요?”
‘그잖아요?’를 할 때 유난히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가 시큰거렸다. 혼자 살고 날씬해서 월급정도로도 가뿐하네요. 치현은 억지로 말을 삼켰다. 감찰관은 조금씩 치현에게 다가왔다. 그 뒤로 본청 감찰과 직원과 현장에 있던 순경 몇이 뒤따랐다. 뒤는 벼랑, 앞에는 사냥개들. 고전비극의 재연. 치현은 주인태가 좋은 성격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우리 이경장님 되게 피곤해 보이신다. 잠은 좀 잤어요? 아, 당직이셨나. 차암 일선 서들 환경이 열악해요. 이래가지고 친구나 가족들 볼 시간도 없겠네. 근무시간 중이면 모를까.”
“여기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맥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면 안 되죠. 사실 인맥이라는 게, 넓은 것보다는 얼마나 좋은 사람들하고 친해지는가가 더 중요하거든요. 나쁜 놈들하고 만나봐. 어떻게 되나.”
감찰관은 그러면서 옥상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치현은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까. 주인태의 손짓에 부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옥상을 꼼꼼히 뒤졌고, 일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인태는 무전기를 들고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시를 내렸다.
치현의 뒤편으로 건장한 본청 직원 두 명이 섰다. 그들은 긴장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레이싱 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주 여기서 끝을 보려고 작정을 하셨네요, 감찰관 나리.
치현은 눈을 감았다. 공사장에 있는 인원들은 대략 20~30명 정도 된다. 한 번에 돌파하기에는 다소 무리를 해야 하지만, 지금은 다들 분산된 상태다. 각개격파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약간의 운이 따라준다면, 옥상인원들만 제압하면 된다. 겸사겸사
감찰관도 던져버리고.
치현은 눈을 떴다. 옥상 수색은 이미 끝났지만, 감찰관의 등쌀에 다들 찾은 곳을 또 찾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전기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지만,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과 진해지는 짜증과 초조함을 보아하니 소득이 없기는 밑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치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7분. 조금 더 있어도 됐지만, 현장 꼴을 보아하니 더 있어봤자 시간낭비일 뿐이다. 치현이 떠나려 하자, 본청 직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잠깐 동안, 자제력을 잃었다. 찰나의 순간을 틈타 오래된 것이 되살아났다.
포식자의 눈이 번뜩였다.
세대와 세대를 거쳐도 사라지지 않을 태곳적 공포의 각인. 포식자와 피식자. 영원에 영원을 포개도 채워지지 않을 간극을 품은 단순한 명제.
직원은 가까스로 넘어지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게 주춤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린내와 소금기 있는 땀. 공포의 냄새가 났다.
“어디 가냐?”
“오후 출근이라서 말입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치현은 한껏 순진하게 굴었다. 진심으로 물어보는 것처럼, 정말로 주인태가 무슨 생각을,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무슨 각오로 여기에 왔는지 모른다는 것처럼. 과연 감찰관의 반응은 치현이 기대한 대로였다.
“그러니까 누구 마음대로!”
마음대로, 음대로, 대로, 로, ㄹ. 옥상에서 감찰관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치현과 감찰관을 쳐다봤다. 너 같은 인간은 탐욕스럽지. 식욕이나 권력욕뿐만 아니라 권위와 존경에 대해서도.
혹시, 간헐적 단식이라고 들어봤나? 몸에 좋아.
치현은 양팔을 들며 으쓱했다. 빈손도 좀 흔들어주고.
“너 이...”
“감찰관님!”
치현을 향해 달려가려는 감찰관을 직원들이 붙잡아서 말렸다. 분노와 부끄러움, 당혹, 허탈, 짜증... 내 것이 아닌 냄새라서 고소했다.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순경과 공사장 직원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치현은 천천히 차를 몰며 공사장에서 빠져나왔다.
공사장에는 돈 가방이 없다. 언제 사라졌는지, 어떻게 내 인지에서 벗어났는지가 궁금했지만, 그건 본질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어디로 갔는지가 중요하다. 일단 인근 CCTV와 어제 현장에 도착했던 앰뷸런스 블랙박스를 확보하자. 가능하면 주변 차량들의 블랙박스도.
나에게 그런 권한이 있나? 게다가 감찰관까지 붙었는데.
치현은 액셀을 밟았다. 중고차의 엔진이 숨 가쁘게 웅웅 거렸다. 아직 잡히지 않은 형수파의 조직원들이 꽤 있다. 하나씩 잡아가면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잠적했다는 이종철까지 닿게 되리라. 그렇게 쌍둥이파까지 가서 김원규에 대해 물어보는 거다. 누구와 만났고 누구 밑에서 일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지. 구멍은 막고, 쥐는
잡는다.
이가 시큰거렸다. 치현은 차를 세웠다. 딸깍딸깍딸깍. 비상등이 깜빡거리는 소리가 시계소리처럼 들렸다. 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살인사건까지 접수한 상태지만, 팀장 성격이라면 반차정도는 허락해줄 것이다. 오늘 오후, 밤, 내일 새벽. 이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까? 충분하고도 말고. 추적하고 물어뜯는 것의 반복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잘해온
위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혜연. 액정에 떠오른 선명한 글자에 치현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화가 반갑기도 했다.
“어디서 볼까요? 나 슬슬 나가려고 하는데.”
며칠 전에 서로의 당직 휴무와 휴가를 맞춰서 점심약속을 한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미안, 급하게 일이 생겨서 못 만날 거 같아. 미안.”
잠깐의 침묵. 수화기 너머로 한숨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화가 났고, 대부분은 아쉬움으로 가득 찬 한숨이다.
“미리 좀 연락하지 그랬어요.”
혜연은 오늘 약속을 위해 휴가까지 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치현은 자기도 모르게 변명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나도 퇴근하다가 급하게 불려갔어. 미안해.”
“어쩔 수 없죠. 어, 그럼 지금 근무 중? 길게 통화해도 괜찮아요?”
치현은 슬쩍 시계를 바라봤다. 12시 22분. 부지런히 가지 않으면 늦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끊기에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괜찮아. 잠깐 통화정도는.”
“에이, 진짜 바쁜 거 맞아요?”
짐짓 화가 난 척 꾸민 말투. 분위기를 바꾸려는 혜연의 배려였다. 치현은 맞장구를 쳤다.
“일이 생겼다고 바로 바빠지는 건 아니거든. 서서히 바빠지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바쁘면 바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생각해보니 그러네.”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치현 역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언제 볼 수 있어요?”
“지금은 장담 못할 거 같아. 시간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고 그런다. 괜찮다니까요. 휴가동안 알아서 잘 놀 테니까. 시간 나면 연락해요.”
“오늘 무슨 계획 있어?”
“글쎄, 그냥 집에서 못 봤던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밀린 집안일도 하구. 근데 점심시간 끝나가는 거 같은데, 괜찮아요?”
“아직은.”
혜연은 치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고, 치현은 그녀를 억지로 더 붙잡으려고 했다. 둘은 날씨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나서야 통화를 종료했다. 치현은 다시 차를 몰았다. 이는 잠잠해졌다.
치현은 점심시간을 조금 넘기고 나서야 출근했다.
“어 왔냐? 오늘 하루정도는 쉬지 그랬냐.”
“괜찮습니다.”
태경은 어깨만 으쓱했을 뿐이었다. 철민이 치현을 보고 반색했다.
“야 마침 잘 왔다. 운전 좀 해라. 나하고 같이 탐문 좀 나가자.”
“쯧쯧. 후임 그만 부려먹고, 운전은 네가 해라. 당직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사람 하나 잡으려고?”
“네네 알겠습니다, 문태경 경사님. 선배님 밑에서 배운 게 사람 잡는 거뿐이라 이 모양이네요. 거 치현이 말고 저도 좀 아껴주시죠?”
“어휴, 이걸 확 밟을 수도 없고.”
철민의 투덜거림에 태경은 짜증으로 화답했다. 강력팀 막내인 명호가 둘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저때라면 모든 일에 신경이 쓰이는 법이지. 치현은 명호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늘 있는 일이야. 그냥 넘겨. 명호는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다시 자신의 업무에 집중했다.
“야야 가자. 이러다가 하늘같으신 선배에게 밟히겠다.”
“치현아, 저놈 그냥 확 박아버려라. 아주 쫙쫙 밟아서 쥐포로 만들어!”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팀장인 승태가 들어오자, 철민은 치현을 끌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는 팀장의 잔소리를 감지하는 것에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운전은 내가 할 테니 넌 조수석에 타라.”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졸음운전이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하거든? 난 아주 오-래 살고 싶으니까 조수석 타.”
어차피 자기가 운전할 거면서 아까는 왜 그랬을까. 치현은 강력팀 내에서 가장 순수한 것은 어쩌면 철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치현은 잠깐 철민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빈말로도 순수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애 딸린 아저씨의 얼굴이다. 더 있다가는 수염 숭숭 박힌 유치원생 박철민군을 상상할 판이었기에 치현은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피해자 마지막 거주지로. 고시원이더라. 참, 너 아직 신원 못 들었지? 이름은 김기영, 58년생. 대구 출신. 정부 지원금 받고 있고, 직업은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쪽으로도 파보면 나올 거 같아서 역 쪽으로 협조 넣었다.”
주소가 고시원에 노가다 일꾼이라면 불규칙한 벌이에 때문에 노숙도 자주했을 것이다. 최소한 안면이라도 튼 사람이 있겠지.
“신원이 벌써 나왔습니까?”
“신분증이 멀쩡히 있더라고. 하 진짜. 과학수사니 뭐니 다 좋은데 말이야. 기초적인 건 좀 우리가 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냐? 주머니에서 지갑 살짝 꺼내는 걸로 현장훼손 안 되잖아. 지갑 하나 꺼내면 되는 일로 몇 시간이고 마냥 손가락이나 빠는 게 효율적이냐?”
현장훼손해서 며칠, 몇 십 년 날리는 거보다야 낫지요, 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자 그대로 난폭운전을 겪게 될 테니까.
“정 못마땅하면 그냥 우리 전부 다 감식반 기초과정 수료하게 해주던가. 그런 거 생기면 내가 제일 먼저 신청한다.”
“감식반 가시게요?”
“미쳤냐. 그냥 주머니에서 지갑 빼는 거나 하려고 하는 거지.”
둘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고시원이었다. 대명 고시원. 명의 ㅇ자는 오래 전에 떨어져나가 흔적만 남아있었다. 고시원이 다들 고시텔로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도시의 구석에는 대명 고시원 같은 곳이 존재할 것이다. 아마 도시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살아남겠지.
탐문은 철민이 맡았다.
“김기영? 누구더라. 아, 그 504호 아저씨? 사진보니 알겠네. 알기는 뭘 알아, 다들 새벽부터 나갔다가 한밤중에 들어오는데. 그 양반은 좀 특이해서 기억하는 거고. 노가다를 뛰는 건지, 아니면 어디서 구걸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돈푼 좀 만지면 들어왔다가 떨어지면 나가곤했거든? 그래서 오래 있을 거 아니면 차라리 여관 같은데 가라고 했는데. 대답이 가관이더라고. 사람이 집이 있어야 구실을 하는데, 여관은 집이 아니라고. 나 참. 안 그래도 지난 주 부터 방세도 안내고 코빼기도 안 비치는데, 어디서 잡았나봐? 죽었다고? 에이 참. 짐? 진즉에 다 갖다버렸지. 방세 밀린지가 언제인데. 뭐 대단한 것도 없더구만. 그냥 옷 몇 개하고 가방이 전부던데.”
헝클어진 몸에 헝클어진 파마를 한 여자는 지루해하며 대답했다. 그녀에게서는 어떤 긴장이나 미심쩍은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단지 싸구려 염색약과 파스 냄새, 반찬가게들의 자극적인 조미료 냄새만 날 뿐이었다. 철민의 질문이 대강 끝나자, 치현이 슬쩍 끼어들었다.
“방세 밀리는 일이 자주 있었나요?”
“안 밀렸지. 돈 없으면 칼같이 나갔거든. 내가 그래서 여관이나 가라고 한 거고. 아니 여기가 무슨 모텔도 아니고. 사람 자주 들락날락거리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거든. 청소 같은 것도 해야 하고.”
치현은 구석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바퀴벌레를 슬쩍 쳐다봤다. 계단의 구석에 쌓인 먼지 속으로 들어간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방세는 어떻게 계산하시죠?”
“주 단위로 계산하지. 다들 벌이가 일정치 않으니까.”
“방세가 밀리면 얼마나 기다려주시나요?”
“밀리면 다음날 12시에 싹 치우지.”
“다른 곳도 그렇게 빨리 치우나요?”
“그건 다른데 가서 물어봐야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장사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데.”
여자는 그래도 형사 앞이라고 신경질을 억누르는 것이 역력했다. 물어보나마나 다른 곳보다 빨리 치우고 있을 거다. 70~80년대 빨간 벽돌로 지어진 낡고 지저분한 고시원이다. 다시 짓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 무너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익을 뽑아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패스트 푸드점처럼.
“자주 어울리던 사람은 있었나요? 친구라던가.”
“못 봤어.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솔직히 여기서 누가 친구를 사귀겠어? 뭐 그래도 방에서 술 먹은 적은 없었던 거 같긴 하네. 청소할 때마다 깨끗했으니까.”
탐문은 그걸로 종료였다.
“에이, 연료 값도 안 나왔다.”
철민은 투덜거리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경찰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는 맞는 말이다. 사람을 건지지도 못했고, 물건을 찾지도 못했다. 얻은 것이라고는 담을 수 없는 몇 마디 말뿐이다. 하지만 치현에게는 이른바 탐정놀이를 하기에 충분한 성과였다.
하나. 피해자 김기영은 상당히 재활의지가 강한 노숙자였다. 그의 사연은 모르지만, 환갑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일을 하며 안정적인 거처를 잡으려고 했다. ‘사람이 집이 있어야 구실을 한다.’, 라.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세우고 준수했다. 방값에 가혹한 이런 고시원을 택한 것도 스스로를 자극하기 위함이었을까?
둘. 고시원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노가다 일꾼이 거처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술을 아예 마시지 않거나 즐기는 타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풍기던 도수 강한 소주 냄새는 뭐였을까. 용의자의 속임수? 아니면 오랜만에 생긴 즐거운 일?
치현은 김기영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간혹 노가다일 따위로 돈이 좀 생기면, 일시적인 쾌락보다는 먼저 의식주를 확보해 삶을 복원하려고 하는 자기 통제력 강한 완고한 늙은이. 아마 나름의 신념도 가지고 있으리라. 자신한테 어울리는 쉰내 풀풀 나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삶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 치현은 김기영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세상은 그가 사라짐으로서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까. 구멍이 난 그림을 우리가 고칠 수 있을까. 뚜둑. 꽉 움켜진 주먹에서 뼈마디가 요동쳤다. 아마 절대 고치지 못하겠지.
“길 잘못 들었다. 하, 이래서 운전할 때 여자 목소리가 들리면 신경 쓰여서 안 된다니까. 이놈의 고물 네비. 확 바꾸던가 해야지.”
“형수님은요?”
“차라리 목소리가 낫다. 잔소리 할 때는 뺨을 안 꼬집거든. 돌아가는데 시간 걸리겠다. 좀 막히네.”
“그럼 잠깐 쉬겠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놈이 감히 주무시겠다고? 오냐, 어디 한번 눈뜰 때 기대해라.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떨어뜨려 주마.”
치현은 피식 웃으며 시트를 뒤로 젖혔다. 내비게이션 지시와는 반대로 가 놓고는 내비게이션 탓하다니. 양과 양치기는 서로 닮는다고 하던가. 어째 모두 팀장을 닮아버린 모양이다. 치현은 선배가 만들어낸 실수에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지금은 해체된 걸 그룹의 유행가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