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이 막 끝나갈 무렵의 루시아나 카페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대학교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점심 식사를 마친 대학생들이 가볍게 디저트를 즐겼다 가기 안성맞춤인 카페로 소문이 자자하여서, 이 시간대에는 항상 대학생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여학생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나 남학생들의 시끌벅적한 잡담 소리, 노트북 타이핑 소리 등이 짜증 날 정도로 내 귀를 간지럽힌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습니까?”
“카라멜 마끼아또…, 3잔, 주세요. 아, …뜨겁게요.”
“11,700원입니다.”
점원에게서 받은 진동기를 들고 남은 자리가 있나 천천히 둘러본다.
다행히도 구석 쪽에 4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비어있었기에, 빠르게 걸어가 메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휴우.”
무사히 주문을 마치고, 자리도 잡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평소에 카페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던 탓일까. 남들은 자연스럽게 하는 이런 행동 하나하나도 나에겐 무척이나 긴장되고 버거웠다.
게다가 지금은 오후 1시, 루시아나 카페에 손님이 가장 많을 시간. 덕분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 지금 이 시간에는 아무리 카페와 사람들을 싫어해도 무조건 루시아나 카페에 와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지잉-.
주머니에 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내 유일한 절친인 유진이와 하나뿐인 남친인 도현이, 그리고 내가 있는 단체 대화방의 알림이었다.
‘하유진 : 현지야 카페엔 잘 도착했어? 주문은 내가 할 테니 무리 안해도돼!’
‘강도현 : 우리도 지금 카페 앞이야. 힘들면 카페 밖에 나와있어.’
메시지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직까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긴 하지만, 나도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다. 그런데도 유진이와 도현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나를 걱정해준다. 애들이 걱정해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다.
‘빨리 오기나 해. 주문까지 다 해뒀으니까.’
나는 멈추지 않는 미소를 겨우 집어넣으며 단체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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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와 도현이가 카페 입구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갈색 머리와 아이돌을 해도 될 정도로 잘생긴 얼굴,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끼고 다니는 그의 마스코트인 검은 뿔테 안경. 저 남자가 바로 나만의 유일무이한 남자친구인 강도현이다.
도현이는 커다란 키를 이용해서 카페를 전체적으로 싹 훑어보고는, 구석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높이 흔들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에서 도현이와 팔짱을 낀 채 해맑게 웃으며 걸어오는 저 여자는 세상에서 내 하나뿐인 절친, 하유진이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와 어울리는 새하얀 셔츠를 입은 유진이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며 ‘현지야ㅡ’ 하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탓에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봤다. 다행히도 유진이의 목소리에 신경을 쓴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카페에 사람이 많아서 살았다. 하마터면 사람들의 관심이 나한테 쏠릴 뻔 했던 걸.
“현지야! 그동안 잘 지냈어? 너 보고 싶어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유진이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내 양손을 붙들고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천사 같은 유진의 미소를 바로 앞에서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우리 못 본 지 겨우 2주일밖에 안됐잖아.”
“뭐어? 겨우라니! 2주면 무려 14일, 336시간이라구!”
“….”
유진이의 시간계산법을 들어보니, 갑자기 정말 오랫동안 얘네들과 못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려 336시간이라니.
“현지야, 오랜만.”
“응, 도현이도.”
오랜만에 만났다고 뛰도록 기뻐하는 유진이와는 다르게, 도현이는 평소보다도 더 침착한 어투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마 유진이처럼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이 2명이나 있으면 내가 정신없어 할거라 생각해서 조용히 말하는 거겠지. 사귄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 정도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다. 도현이는 배려심이 깊으니까.
“자, 그럼 우린 이쪽에 앉자!”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는 도현이와 손을 잡고 내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유진이와는 다르게 도현이는 계속해서 어색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유진이가 달라붙는 걸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이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저번에 크게 싸웠을 때 서로 평생 말 한마디도 안섞을 거라더니, 지금은 팔짱도 끼고 손도 잡고 있잖아. 친구는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말이 맞나보다.
“아, 맞다. 현지야 네가 아까 주문했다며! 정말이야?”
내가 보낸 메시지가 생각났는지, 유진이가 약간 놀란 듯이 물어봤다. 나는 대답 대신 갖고 있던 진동기를 꺼내 보여줬다.
“짠.”
“와아, 대단해!”
진동기를 본 유진이가 양손을 모으며 감탄을 하더니, 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리 현지가 주문도 혼자 할 줄 알고, 많이 컸구나…. 정말 감동이야.”
“…뭔가 엄마가 처음으로 학교에 다녀온 초등학생 딸한테 해줄 것 같은 대사야.”
“아하하, 미안미안.”
머쓱한 듯이 손을 치우는 유진이를 바라보며 괜찮다는 의미로 가볍게 미소를 지어줬다.
“….”
잔뜩 들뜬 유진이와는 정반대로, 도현이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말 한마디 안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돌처럼 앉아있기만 하고 있다. 뭔 일이 생긴 건가, 살짝 걱정돼서 도현이한테 말을 걸어보려는 순간-.
지이잉ㅡ.
손에 들고 있던 진동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
“아, 내가 가져올게!”
말이 끊겨 당황한 내 손에서 자연스럽게 진동기를 가져간 유진이가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유진이에게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때다 싶어 도현이에게 말을 걸었다.
“…도현아, 혹시 뭔 일 있었어? 약간 우울해 보여서.”
걱정이 담긴 내 물음에 도현이는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눈은 나를 마주치지 않고 다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응? 아, 괜찮아.”
“…정말?”
“응….”
그렇게 짧은 대화가 오고 간 후, 도현이는 또다시 침묵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부러 조용히 있는 줄로 알았지만 계속 상태가 저 모양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 뭔가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여자친구한테도 상담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라니. 대체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이 이상 캐묻는 건 여자친구로서의 매너가 아닌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그러는 사이 유진이가 카라멜 마끼야또 3잔을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고마워.”
“응? 현지가 주문까지 해줬는데 이 정돈 일도 아니지!”
가져온 카라멜 마끼아또를 각자에게 나눠준 유진이는 다시 도현이 옆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나는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아직까진 쓴맛 밖에 안 느껴지네.
원래 커피는 써서 전혀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 유진이와 도현이가 그나마 덜 쓰다며 추천해준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작으로 어찌저찌 입에 댈 수 있는 수준까진 올라왔다. 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커피는 지금까지 한 모금도 못 마셨을 거다.
커피뿐만이 아니다. 유진이와 도현이는 언제나 내가 힘들 때마다 큰 도움을 준다. 고민이 있을 땐 자기 일처럼 열심히 공감해주고, 궁금한 게 있을 땐 몇 분 만에 정보를 찾아와 나에게 알려준다.
이렇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나도 애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둘은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며, 나를 배려해주며 도와줄 만한 상황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도와줄 기회가 생긴다면, 꼭 내 힘으로 도와주겠노라 다짐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라고 생각한다.
“도현아.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줘. 네 여자친구잖아. 내가 의지는 안 되더라도 혼자 끙끙 앓으면서 고민하는 거보단 훨씬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내 말에 도현이가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도 나 자신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긴 문장을 한 번도 더듬지 않고 명확하게 말한 건 거의 처음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무의식적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 같은 느낌이였다.
“현지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내 남자친구인 강도현의 고민을 들을 수만 있다면, 도현이를 도와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야만 한다. 혼자 고민을 짊어지지 않도록, 여자친구인 내가 보살펴줘야 한다. 지금까지 도현이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나에게 상담해줘. 부탁이야."
"……."
잠시 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러간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최대한 비장한 표정으로 도현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자, 도현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알겠어. 말할 게.”
드디어 도현이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순간 도현이가 나를 의지해준다는 기쁜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번질 뻔했지만, 있는 힘껏 참아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 도현이가 저렇게까지 숨기려고 한 일이라면, 분명 엄청 괴롭거나 힘든 일임이 틀림없다.
무슨 얘기를 꺼내든 담담하게 듣고, 공감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줘야 한다ㅡ, 그렇게 생각하며 도현이의 입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입은 연 건 도현이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말할 게, 우리 둘 사귀기로 했어. 오늘부터.”
“…뭐?”
지루하단 듯이 무심하게 꺼낸 유진이의 말은, 도현이의 고민은, 역시 생각대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