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만을 모시기 위해 신의 반려로 선택된 이는 신이 허락한 시간만큼 영원히 젊음을 유지한 채 홀로 죽는다.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오로지 신만을 품는 인생을 사는 것도 모자라 여러모로 재단된 삶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사람.
성녀, 이스티아는 신을 조각한 석상 앞에 섰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대신전 서관, 기도실에 스며들었다. 조각난 달빛을 받아 차분히 내려앉은 은빛머리칼이 순간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몸이, 그녀가 손에 쥔 나무 의자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석상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석상에 박아 박살난 의자가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비처럼 내렸다. 그 충격으로 다친 손바닥에 피가 맺혔지만 이내 피가 사라지고 찢겼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늑대처럼 매섭게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아 공허했다. 텁텁하게 말라가는 입술을 움직이며 다시 말을 만들어내려 했을까,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온 신관들이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촛불의 빛이 이스티아가 있는 곳을 비춰내렸다.
박살난 의자와 굳건히 서있는 이스티아의 뒷모습이 신관들의 눈에 담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스티아 님.”
“의자가 왜 이렇게…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스티아 님?”
이스티아는 그들의 말에 그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저를 부르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싶은 기분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건 오로지 신의 목소리 뿐인 탓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네가 너무 불쌍해!]
시끄러워.
[연애를 하고 좀 살아야지! 안 그래?]
시끄럽다고.
[네가 사랑을 하지 않으면 세계를 멸망시켜버릴 거야!]
“나흘 동안 못자다가 이제 좀 자나 싶었는데 그걸 깨운 것도 모자라 뭔 개소리야!”
피곤에 찌든 눈을 꾹 감으며 머리칼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망할 신 때문에 이성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해 한계에 다달했다.
“일단 너 죽고 나 살자, 이 개자식아.”
잠을 자지 못해 정상적인 회로를 돌릴 수 없는 머리로 그런 결론을 내린 이스티아는 곧장 그 말을 실천으로 옮겼다.
머리를 붙잡고 소리를 치던 이가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서 다시 한 번 석상을 향하자 주변에 있던 신관들이 헉, 소리를 내며 그녀를 붙잡았다.
한명은 팔을, 한명은 몸을, 한명은 다리를. 다닥다닥 붙은 그들은 호들갑을 떨며 조잘거렸다.
“한 번, 한 번만 봐주자! 네? 한 번만 봐주자구요, 우리!”
“아, 놔 봐. 놔보라고.”
“성녀니임…!”
애원하는 신관들의 소리를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힘으로 이겨먹으며 날카로운 나무 파편을 든 팔을 높게 들어올렸을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할 수가 없는, 지금 상황에 대하여 털어놓을 수 있는 이의.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이스티아 님.”
“알베르 수석 신관님…!”
이스티아의 곁에서 그녀를 뜯어말리던 신관들은 구세주를 만났다는 생각에 눈가를 촉촉히 적시고 그를 쳐다보았다.
다만, 알베르는 그들의 처절한 눈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이스티아에게로 다가갔다.
“안경은 어디다 두고 오셨습니까. 잘 보이시지도 않죠?”
공허한 눈동자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흐릿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누군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의 장난도.
“…알베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머리 위에 뭘 달고 다니는 거야, 너….”
“예?”
알베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벽이건만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연보랏빛의 긴 머리칼이 그의 고갯짓에 따라 흔들렸다.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이스티아만을 담았다. 걱정이 묻어 있었다. 긴속눈썹을 가져 예쁘장한 얼굴이 가까이에 있으니 눈이 그곳에 고정될 법도 하였지만 이스티아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
[후보 1]
후보라는 요상한 글씨가 그의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그래. 알베르는 모를 것이다. 오로지 성녀만이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신의 언어였으니.
[네 반려 후보라는 뜻이야!]
[후보들 중에서 진짜 네 반려를 찾으면 돼! 그러면 세계 멸망 같은 건 안 할게!]
망할, 망할, 망할.
“역시 부숴버려야 해.”
이스티아는 알베르를 향해있던 고개를 다시 석상으로 돌린 뒤 더듬더듬 옆에 있던 뭔지 모를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손에 착 감기는 것이 이번 건 확실히 석상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세게 주고 팔을 크게 움직였다.
“아! 이스티아 님! 도끼는 안 돼요! 그건 진짜 안 돼요!”
잘못없는 신관들만이 절규하는 소리가 기도실을 울렸다.
* * *
소란이 일어났던 새벽으로부터 몇시간이 더 지난 아침, 그 소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은 3시간의 잠을 취하고 일어났다.
쌓인 피로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새벽 때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본능으로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개같이 군 다음 날 현타가 온 것과도 같은 상태가 된 이스티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스티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만, 안경만 찾고.”
항상 그녀를 옆에서 보살피는 시종인 메데아였다. 매일 아침 6시에 맞추어 오는 이였기에 이스티아는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았다.
이스티아는 뿌연 시야에 눈을 문지르며 안경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안경을 어디다 뒀더라. 침실에 마련된 업무책상으로 간 그녀는 산처럼 쌓인 서류들 사이를 비집고서 둥근 안경을 찾아냈다.
새벽에 피곤에 미쳐 안경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침대로 직행했다가 신의 개소리에 머리가 더 돌아버려 그대로 방을 나왔던 터라 외로이 방치되어 있다는 게 티가 났다.
더러웠다. 엄청.
“왜 여기에 잉크가 묻었냐.”
이스티아는 꿍얼거리며 안경 알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길을 따라 지문이 남아 더러워지기는 커녕, 더 깨끗해졌다.
정화의 힘을 이런 곳에 쓴다는 걸 신은 알까. 그녀는 시야를 맑게 만들어줄 안경을 쓰고서 대강 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린 후 입을 열었다.
“들어와.”
허락의 말과 동시에 메다아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정하게 하나로 말아올린 회색빛 머리칼은 평소와 같은데, 주름진 입가에 자리한 인자한 미소는 평소와 달랐다.
잔소리를 하기 직전인 메데아다. 입과 달리 웃지 않고 있는 냉정한 녹색 눈동자를 보면 안다.
새벽의 일도 그렇고, 찔리는 게 많은 이스티아였기에 괜히 콧잔등을 긁으며 메데아의 말을 기다렸다.
“제가 감히, 이스티아 님께 한마디 얹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
“예의상 물어본 것이니 그리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이스티아가 절망하는 동안 메데아는 이스티아의 아침 준비를 도우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추기경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 해도 새벽에 저지르신 일은 결코 용서받을 일이 아닙니다. 신께 도끼질이라니요, 그것도 성녀가.”
“그럴만 했어.”
“그 말을 듣고 납득해줄 이는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추기경 님께서 돌아오시면 대체 무슨 말이 오고갈지, 저는 두렵답니다.”
“새벽에 바로 연락 넣었겠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어쩐지 다들 아침부터 분주하다 싶더니.”
“괜찮아.”
신 앞에서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한들, 신이 아직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는 한 그에 불만을 내놓을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멍청한 이가 신이 괜찮다는데 신이 사랑하는 성녀를 건드릴까. 전에 한 번 그러한 일 때문에 신이 강림한 적도 있는데, 또 그런 과오를 저지른다면 신전에서 쫓겨나는 것은 그 자일 것이다.
성녀도 동의한 적당한 선에서 움직일 터였다.
“다음에 또 이번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오늘보다 더한 잔소리를 할테니 각오해두십시오.”
“응.”
“그럼 전 조식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양은 조금만. 잠을 제대로 못잤더니 입맛이 없어.”
“많이 드셔야 체력이 붙고, 움직일 힘이 나고….”
“그래, 그래. 내일부터 많이 먹을게.”
“하…알겠습니다.”
메데아는 눈에 보이게 한숨을 내쉰 뒤 방을 나갔다. 저런식으로 이스티아를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이는 메데아가 유일할 것이다.
이스티아는 제국의 황태자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녀였고, 무덤덤한 성격과 매서운 눈매가 함께 만들어낸 카리스마는 사람을 굳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녀가 어릴 때부터 딸처럼 여기며 보살폈던 메데아에게는 다 소용없을 뿐이지.
메데아는 조금만 가져다 달라는 이스티아의 말을 싹 무시한 채 보통 사람들이 먹는 양의 조식을 챙겨왔고, 이스티아는 메데아의 감시 아래 배를 두둑히 채웠다.
“이거 보세요, 다 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도 내가 대단해, 죽겠어.”
앞말보다 뒷말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메데아는 깔끔히 그를 무시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알베르 님께서 실리 정원에서 이스티아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가봐야겠네. 업무는 집무실에서 볼테니까 여기있는 서류들을 다 그쪽으로 옮겨둬.”
“알겠습니다.”
알베르를 만나기 위해 테이블에서 일어서니 메데아가 기다렸다는 듯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금실로 꽃이 새겨넣어진 새하얀 재킷에 구김이 없는지, 손으로 쓸어내리며 바지 끝단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됐습니다. 완벽해요.”
“고마워.”
이스티아는 짧은 감사 인사를 남겨둔 뒤 곧장 방을 나섰다.
실리 정원으로 가는 길, 신전 복도는 무척 조용했다. 아직 아침 기도를 드릴 시간이 아니라 한들, 신관들이 아직까지 잠에서 허우적거릴 리가 없었다.
메데아가 그랬지. 다들 바삐 움직였다고.
아무래도 성녀가 허락한 적당한 선에 아슬하게 걸치는 일을 진행할 모양이었다.
알베르가 저를 찾는 용무를 어느정도 알 것 같아 작은 한숨을 내쉬며 정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차와 디저트들이 준비된 티테이블과 함께 고요히 정원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는 알베르가 보였다.
“알베르.”
“아, 오셨군요.”
인기척을 내자, 알베르의 시선이 이스티아에게로 옮겨졌다. 제비꽃을 닮은 눈동자에 피곤이 가라앉은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새벽에 일이 있고서 한숨도 자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함에 이스티아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예쁜 얼굴에 몹쓸짓을 했어. 많이 잘 수 있게 했어야 했는데.
잠을 더 자지 못한 것은 본인이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한 건 본인이지만, 고작 3시간 잤다고 아무렇지도 않아진 이스티아는 그리 생각했다.
축복을 받아 일정 나이에서 더 늙지도 않고, 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죽을 수도 없는 몸을 타고 난 탓인지, 이스티아는 본인의 고통에 무감했다.
그런 그녀를 챙기는 건 언제나 메데아, 아니면 알베르였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를 위해 피로회복에 좋은 자스민차를 준비해두었지 않은가. 정작 본인은 이 차가 피로회복에 좋은지 어떤지 하나도 모를테지만 말이다.
이스티아는 제 앞에 따듯한 상태로 자리한 자스민차를 마시며 서둘러 알베르가 본론을 이야기 하길 기다렸다.
“새벽에 있었던 일로 잠깐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회의에 날 안 꼈다는 건, 추기경의 명인가?”
“네. 곧 성녀의 증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 기고만장해졌을 추기경의 얼굴을 생각했더니 너무 빡쳐. 만나면 인사보다 주먹이 먼저 나갈지도 몰라.”
이래서 머리가 굳은 늙은이들은 안 된다니까.
이스티아는 혀를 쯧, 차며 살구잼이 발라진 쿠키를 한입 베어물었다.
성녀의 증명은 그녀가 성녀로 인정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이미 6살 때 진행했다. 한 번 증명된 이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재차 확인하는 건 그 전 성녀나 성자 때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기행이었다.
그런데 이스티아는 왜 이러느냐? 이유는 간단했다.
전 성녀나 성자는 단 한 번도 신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행동을 하지 않았고, 성심성의껏 신의 곁을 보필했다. 하지만 이스티아는 그 반대라면 반대였다.
신의 명에 반발심을 그대로 드러냈고, 신의 석상을 부수려고 한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에 추기경이 말을 꺼냈다.
‘신이 그녀를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추기경은 그러한 이유로 성녀가 불경한 행위를 할 때마다 성녀의 증명을 다시 진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스티아는 코웃음 치며 허락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그러십니까?”
알베르는 그녀가 좋아하는 쿠키가 담긴 접시를 그녀의 앞쪽으로 살짝 밀어넣으며 물었다.
세벽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기 그지 없다.
“신이 사랑을 하래.”
“…예?”
“안 하면 세계를 멸망 시키겠대.”
알베르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허공에 물음표를 그려냈다. 신이, 사랑을 권했다고?
이해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게, 성인(聖人)은 신의 뜻을 받들어 신 이외의 것을 사랑할 수 없는 몸이라 하였으니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난 거짓말 못해. 알잖아.”
성녀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이다.
신의 의중을 알지 못해 무어라 더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을까, 이스티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내가 불쌍하대.”
“….”
“이 이야기, 다른 이에게는 절대 말하지마. 괜히 시끄러워지니까.”
“그렇지만, 세계의 멸망이 달린 일입니다.”
“알아.”
오늘의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마냥 그녀는 차분히 답한 뒤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성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 정해져 있고 그리 믿고 있지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쪽은 신이었다.
엉망진창인 교리. 신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별것도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원칙. 그를 속으로 비웃으며 이스티아는 다시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알베르.”
“네.”
이스티아가 손을 뻗는 과자가 무엇인지 확인하며 하나하나 세심하게 그녀의 앞으로 밀어넣던 알베르가 올곧게 그녀를 바라봤다.
온갖 꽃과 보석에 비유 되며 수많은 신도들이 아름답다 칭송하는 어여쁜 얼굴이 이스티아의 눈에 박혀들었다.
이스티아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간 있으면 나랑 결혼이나 할까.”
신만큼이나 감정이 없을 거라 말 많은 그가 처음으로 이스티아의 앞에서 동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