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수많은 생각에 잠겨 당황스런 제 표정 하나 감추지 못하던 알베르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결혼이라는 건 그 사람과 남은 인생을 평생 함께하게 되는 것으로, 그리 쉽게 결정하시면 안 되는 사항입니다. 아무리 세계의 멸망이 걸려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성녀님의 인생을 희생하시는 선택은 결코….”
“싫으면 싫다고 해.”
“…예, 싫습니다.”
“그런 점도 귀엽네.”
아무런 감정 없이 툭툭 말을 내뱉은 이스티아는 알베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지. 나도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이 아이도 날 좋아하지 않는데 신은 무엇 때문에 후보로 넣었을까.
그리고, 후보는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걸까.
신이 봤을 때 착한 아이를 후보로 넣었나, 생각하며 차를 홀짝였다.
‘진짜 반려가 있다고 했지.’
신은 보통 인간이라면 상상도 못할 아득한 미래까지 훤히 알고 있다. 그것을 가르쳐 주느냐 마느냐는 신만의 권한이고.
사랑을 해라. 진짜 반려를 찾아라.
보통 같았으면 바보 같은 말이라 치부하고서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신이 먼저 세계의 멸망을 걸어온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시답잖은 짓에 세계의 멸망을 논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알려주기는 싫으니 이딴식의 말을 한 걸테지.
아마 신이 말 한대로 하다보면 결과적으로 세계의 멸망을 막게 될 거다.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제 손으로는 무엇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이가, 자신이 만들어낸 이 세계를 망가트릴 리가 없다.
멸망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 그걸 막으려면 이스티아는 체스 말처럼 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고.
‘좀 더 거창하게, 제대로 된 이유를 붙일 수는 없었던 건가.’
멍청한 신이 할 줄 아는 거라곤 떼를 쓰는 것밖에는 없으니 그런 건 바라지도 말아야지.
세계를 지키는 것이 제 목숨이 된다하더라도, 기꺼이 그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이 이스티아였다. 그러니 사랑과도 같은 희생은 별 것 아니었다.
진짜 반려가 누굴까. 왜 그를 찾으라 했을까.
진짜라는 말을 쓴 걸 보면 정말 반려가 될 수 있다는 건데.
이스티아는 누군가를 보고 한 눈에 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사랑 한 번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랬다. 그간 만나온 모든 이들에게서 사랑을 느껴본 적 없으니 그럴 터였다.
게다가 연애를 해선 안 된다는 교리 탓에 상대를 연애 상대라 의식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 그 자극을 위하여 자신이 먼저 다가가야겠지.
아까 알베르에게 대뜸 결혼 얘기를 꺼낸 것처럼 말이다.
상대방이 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그럼 금방 찾을 수 있을텐데.
남들은 결코 공감하지 못할 무거운 고민을 하며 알베르의 앞에 있는 스콘을 가리켰다.
“알베르, 거기 있는 스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베르는 평온한 낯빛으로 스콘이 담긴 접시와 함께 크림과 잼을 그녀와 가깝게 옮겨주었다. 하지만 이스티아는 중간에 말이 끊긴 것도 모자라, 스콘이 가깝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대지 않은 채 알베르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에 의문이 생긴 알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평소와 다름 없는 말투, 표정, 눈동자.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딸기잼마냥 붉어진 귓바퀴.
“예뻐서.”
“차나 디저트에 이상한 걸 넣은 기억은 없는데, 오늘따라 대체 왜 그러십니까?”
“글쎄. 네가 예뻐서?”
“…그만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상한 게 든 게 분명해요.”
얼굴빛은 그대로지만 이스티아가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귀는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저 낯간지러운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근데, 본인 입으로 싫다고 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스티아는 스콘 위에 크림을 바르고 딸기잼을 올리며 작은 미소를 띠웠다.
그간 몰랐는데 알베르는 그냥 부끄러움을 잘 타는 모양이었다.
달콤한 스콘을 한입 베어물고서 오물거리며 그리 납득했을까, 정원으로 교황의 심부름꾼이 얼굴을 내밀었다.
성녀의 증명. 그것을 원하는 얼굴이었다.
* * *
오로지 성자, 성녀의 증명을 위해 마련된 북관 헤리카 실에 들어서자 시커먼 오수가 담긴 거대한 수조가 눈에 띄었다.
저번보다 물이 더 새카매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이스티아여, 이 일은 그대가 자초했다는 것만을 알아두길 바라네.”
“….”
“지금부터 성녀의 증명을 행하도록 한다.”
교황, 아간트의 말이 울렸다. 언제나처럼 무성의한 목소리였다.
이번이 네번째를 맞이한 성녀의 증명이다. 지겹기야 하겠지.
이스티아는 그에 공감하며 말을 뱉어냈다.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했군, 그래.”
복도를 걷는 동안 성녀가 주로 거주하는 남관에 신관들이 없었던 이유가 이곳에 있다. 저 거대한 수조에 오수를 채워넣기 위해 북관에서 열심히 움직였을테지.
이스티아는 아간트의 곁을 스쳐지나가 수조에 한걸음씩 다가갔다. 높은 수조 위로 올라가 손을 안에 넣을 수 있도록 마련된 계단으로 신관이 그녀를 이끌려 했으나 그녀는 그 손을 거절했다.
“물에 닿을 필요도 없지.”
자신에 가득 찬 얼굴로 수조에 가깝게 다가가자 그녀의 모습이 비춰지는 부분부터 물이 맑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수조에 손을 올리자 그 안에 있던 물이 단숨에 투명해졌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깨끗해진 물을 한 번 바라본 이스티아는 뒤를 돌아 아간트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시선에 매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저를 업신여긴다는 것이 느껴지는 눈이었다.
“시답잖은 짓을 했어.”
무슨 일이 있다한들 신은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 남들 눈에는 이스티아가 신께 무례하다고 보일지 몰라도 신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니.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지.”
“….”
“신께서는 그런 그대들을 용서하였으니 이번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된다.”
성녀의 위신을 의심한 자들을 용서하였다고.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말을 내려둔 뒤 이스티아는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성녀가 물러난 그 자리에서 아간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눌렀다.
“내 이럴 것 같아 이번에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는데.”
“….”
“필로아는 언제 온다하던가.”
“창립기념식 날에 맞춰 돌아오신다 하였습니다.”
“돌아오면 곧장 나를 찾아오라 일러두도록.”
오답을 내린 것에 대한 벌은 얼굴을 마주보고 주어야 하는 법이니.
홀로 복도로 나온 이스티아의 곁을 맴도는 것은 신의 목소리였다.
[아간트한테 너무 그러지마. 성인 대신 대외업무 보라고 앉혀둔 애잖아. 이번 일은 필로아의 입김이 컸을 거야.]
“그래. 문제는 추기경한테 있겠지. 근데, 추기경한테 무르게 구는 그 놈도 잘못했어.”
[어쩔 수 없잖아. 자기랑 자기 자식의 생명의 은인인 걸.]
그래. 그래서 성가셔. 그 놈은 항상 그런식으로 사람이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추기경의 재수없는 얼굴을 다시금 떠올린 이스티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내의 요양이랍시고 남부의 땅끝, 카다디아에 가있던 그는 곧 돌아올 것이다.
며칠 뒤면 위저드 교단의 창단기념식인데 그 자리를 안 지킬 이가 아니니.
얼마 후면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을까, 신이 다시 옆에서 조잘거렸다.
[근데 내가 몇시간동안 생각해봤지만 도끼는 너무했어.]
[이건 프로핀의 눈꽃 빙수로 갚아야 한다. 안 그래?]
[초코 시럽 듬뿍 뿌린 걸로.]
빙수 좋아하시네.
이스티아는 그리 중얼거리며 그의 말을 무시하는가 싶었지만 집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메데아에게 프로핀 표, 눈꽃 빙수를 가져다 달라 말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을 챙기는 것은 역시 성녀였다.
“초코 시럽 많이.”
“오늘 단 거 많이 드셨다고 하던데요, 알베르 님께서.”
“스트레스 때문이니까 이해해.”
스트레스, 라는 말에 메데아는 단번에 납득했다. 이번으로 벌써 네번째에 이른 성녀의 증명. 그러고보니 새벽 때 이스티아는 무척 화를 냈다고 들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 도끼를 비롯한 여러 무기를 들고 서관에 가서 석상을 부수려 했을 정도로.
“그런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신께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신이 사랑을 하래서.”
“아, 사랑. 이스티아 님 나잇대면 한창 할 때…이긴 한데, 이스티아 님은 안 되지 않습니까?”
“몰라. 하래.”
“하실 겁니까?”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나?”
신의 말이니 안 듣는 게 이상하기는 하다만…메데아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의 반려이기 때문에 타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금지된 성녀에게, 신이 사랑을 하라 명하다니?
왠만한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스티아가 제 입으로 말한 이상, 그녀의 말은 진실일 터다.
그럼 이제, 이스티아 님의 연애상담을 들어줄 수 있는 건가? 드디어?
6살, 신의 석상의 품에 안긴 채 발견되었던 그때부터 십여년동안 딸처럼 키워왔던 터라 내심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조금 두근거리고 있었다.
금단의 사랑. 짜릿하지 않은가.
메데아는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을 하게 된다면 부디, 꼭! 저 메데아를 의지하여주십시오. 살아온 세월이 세월인지라 많은 도움이 될테지요.”
“그럴게. 아, 그리고 이건 비밀로 해둬. 사랑을 하는 순간 성녀가 될 수 없다는 목소리 나올라.”
“비밀로 해두면 연애나 결혼, 그런 건 불가능할텐데요?”
“연애 금지해도 연애하는 놈들이 아득바득 숨기면서 하는 것처럼 하면 되겠지. 그리고.”
이스티아는 조금 말을 고르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깃펜을 들었다. 펜촉이 메데아를 향하고, 이스티아는 당당한 웃음을 내보였다.
“나중에,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뜯어 고칠 거니까.”
지금은 힘이 모자라다. 성인은 원래부터 실직적인 권력이 없는 이였으니 지금 위치까지 끌어올려둔 것도 대단했지만 아직 한참 모자랐다.
그렇기에 어설프게 이 교단을 바꾸려 했다가는 추기경과 같이 저를 적대시 하는 것들에게 소중한 이를 잃을 지도 모른다.
성을 완공한다 한들, 그곳에 혼자서만 살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거다.
그것을 막기 위한 굳건한 방패와 잘 벼려진 검이 없어.
제 야망을 꾸밈없이 드러낸 이스티아의 말을 들은 메데아는 조금 벙쩠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유별났다. 그 누구도 의문을 붙이지 않았던 교리에 처음 물음표를 만들었던 아이이자, 거부했던 아이였다.
‘성녀는 흰 드레스만 입어야 한다. 이딴 건 대체 누가 만든 거야? 게다가 머리를 묶는 것도 안 된대. 말도 안 되지. 신의 곁에 설 자를 용모만 보고 정하나?’
‘신의 말을 듣고, 수많은 이들의 구원이 되는 내가, 왜 아무것도 못하는 인형처럼 장식되어야 하지? 이런 하대를 받을 지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녀 이전까지, 성인은 모두 고분고분하고 우아하며 여린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표현되었다. 금세 깨질 것 같은 유리잔에 비유될 정도로.
신의 축복을 다른 이에게 나눠줄 수 있고, 신의 말을 들어 예언도 가능한 자가 그저 추기경의 말만 들으며 그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게 그동안의 성인이었다.
그게 옳았다. 신은 그것을 바랐다, 응당 그리 생각했다.
이스티아가 교리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성녀의 증명 때 신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
“…이스티아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난 언제나 대단해.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고.”
“네. 그러실 겁니다.”
“당연하지.”
진심을 다해 자신의 앞길을 축복해주는 것만 같은 메데아의 말을 들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이스티아는 밀린 업무를 차근차근 처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감성을 파괴하는 이가 있었다.
[눈꽃]
…하.
[빙수.]
이러는데 도끼로 안 패고 배겨?
“그래서 말인데, 메데아.”
“네?”
“눈…꽃 빙수, 빠르게 가져다 줘. 배고프네.”
“아, 참. 네. 빨리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메데아가 서둘러 집무실을 나가고, 신은 다시금 말을 걸었다.
[이스티아는 진짜 대단한 거 같아.]
“뭐가.”
[다른 성인들은 모두 이런 날 싫어했거든.]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글을 써내려가던 이스티아의 손이 멈추었다. 신이 직접 다른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뭐 먹고 싶다, 뭐 하고 싶다, 뭐가 싫다, 라는 말만 하는 되먹지 못한 놈이었으니까.
[당신은 신이 아니야! 내 신은 그렇지 않아! 신은 그렇게 경거망동하지 않아! 하면서, 날 엄청 부정했거든. 결국엔 다 신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하긴. 이 교단에서 말하는 신은 네가 아닌 것 같긴 해.”
[너조차도 내 실체를 보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인간들이 나를 직접 보고 판단해서 글을 썼겠어.]
“그래, 그래.”
[지금껏 딱 한명이었어. 내 모든 걸 본 아이는.]
그 한 명이 누구일까. 조금 궁금해지는 말이었다. 그 자가 이 교단을 만들었을까? 아니, 그렇다면 이따위로 막 재단된 교단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이스티아는 그 아이를 닮았어. 아, 외형이 닮은 게 아니라 성격 같은 게.]
“나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니, 그 시대 사람은 참 행복했겠네.”
[어…음…그래, 자의식이 강한 건 좋은 거니까!]
신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는 아마 엄지를 치켜 세우고 있을 거다. 그냥, 직감이 그러했다.
…망할놈.
속으로는 그리 욕해도 이왕 신이 말을 건 겸, 새벽에 말했던 것에 대해 묻기로 했다.
“반려를 대체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어, 어? 음, 들이대다보면…알지 않을까?]
“뭐?”
[응! 그래. 열심히 들이대!]
그러니까, 누군지도 모를 후보에게 들이대는 게 정답이라고?
의심이 가는 발언이었지만 어차피 그럴 예정이기도 했으니 일단 순응하기로 했다.
“개소리 같지만 일단, 응. 그래 알겠어.”
[어? 진짜? 와! 역시 이스티아야. 너무 좋아. 이백년은 함께 하고 싶어. 아니다, 삼백, 사백년!]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없어.”
[응. 물론 진짜로 그렇게 오래 살려두고 싶은 마음 없어. 뭐든 적당히가 좋은 거지. 적당히가.]
적당히가,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침울한 것 같아 의문이 든 순간, 아이처럼 방방 뛰는 음성이 그 생각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빙수 왔다! 빙수! 나 지금 네 몸 들어가도 돼?]
이 놈은 세계를 창조하여 지금 이 제국을 세운 신이 아니라 빙수를 먹지 못하고 죽은 빙신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