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오늘 왜 이렇게 멍해요?”
“잠을 좀 못 잤더니 피곤하네.”
“어쩐지……저 오늘 원두 받으러 나가야 하는 날인데 괜찮아요?”
“혼자 충분해. 잘 다녀와.”
일주일에 한 번 지현은 음료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받기 위해 인근 공방으로 향했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다녀오겠다며 나가는 지현을 보며 설아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지난 밤, 지환은 결국 시놉시스를 넘기겠다는 말만 남긴 채 돌아갔고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려움은 입을 닫게 했고, 눈을 감게 했다.
“나도 모르겠다, 이젠…….”
선배는 시놉시스를 결국 넘겼나? 한해준 감독이 정말 내 작품을? 정말, 하는 건가? 아니야, 거절해야지. 어떻게 거절을 하지. 애초에 그쪽에서 싫다고 했을 수도 있어. 기대하지 마. 나는 지금 하고 싶은 건가? 아쉬운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계속할 때쯤 핸드폰이 울렸고, 설아는 깜짝 놀라며 재빠르게 확인했다.
[오늘 한해준 감독이 갈 거야. 얘기 잘해봐.]
“무슨 이 선배는 일 처리가……나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합시다.”
더 큰 고민을 껴안게 된 설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긴장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 * *
“너 어디가? 약속 있었나, 오늘?”
작품이 끝나면 한동안 집에서 나가지 않는 해준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던 민재가 웬일이냐는 듯 물었다.
“지환 형 부탁.”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한 해준은 차키를 챙기며 신발을 신었다.
“드라마?! 김지환 감독님 만나러 가는 거야?! 나도 갈래! 뭐야, 너 진짜 드라마 하려고?”
“아니, 시놉시스 쓴 작가. 드라마 안 해. 쉰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 집에 안 가? 일 안 해?”
네가 일복이 넘쳐도 거절할 게 따로 있지…김지환 감독님 부탁을 까……? 너 그거 아니야……
“미쳤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데 새끼야! 쉬긴 뭘 쉬어 당장 일 해!”
입과 눈을 양껏 이용해 욕을 하는 민재를 귀찮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해준은 집 밖으로 나섰다.
“The Snow라고 했나.”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지하 1층을 누른 해준은 거울을 보며 옷깃을 정리했다. 여유롭다 못해 느린 그의 손짓은 한없이 권태로웠다.
“아, 귀찮다. 진짜….”
작품이 끝나면 적어도 한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알기에 가장 가까이서 일을 돕는 민재 역시 아무런 일도 가지고 오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그럴 예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지환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면.
- 부탁 좀 하자. 시놉시스 읽어봐.
‘형 저 작품 끝나면 쉬는 거 아시잖아요. 딴 거 할 기력이 없어요.’
- 너 그것도 재능 낭비야. 일단 한 번 읽어봐. 글 잘 써.
‘하…누군데 형이 이렇게까지 하지?’
- 직접 만나서 얘기해 봐. 나도 더 강요는 못 하겠고. 꼭 한번 읽어봐라, 해준아. 너도 알 거다 그럼.
애초에 지환의 부탁은 해준에게 있어 거절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알아 온 형이자 존경하는 감독이었고, 동료였다.
자신이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곁에서 묵묵히 응원을 보내왔고, 때때로 찾아오는 회의에 휘청거릴 땐 별다른 말없이 술잔을 함께 기울여줬던 든든한 버팀목.
- 내가 직접 하고 싶었는데…그럴 여건이 안 되기도 하고, 염치도 없더라고. 생각나는 게 너밖에 없었다. 부탁한다.
‘감독 한해준’에게 김지환은 이정표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인간 한해준’이 아닌 ‘감독 한해준’에게 부탁을 건네 왔다.
해준이 평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는 지환이 부탁을 해왔다는 것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평소에 부탁이라고는 하지도 않는 사람이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절절해….”
손에 꼽는 지환의 부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해준은 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존경하는 그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그것과 작품은 별개였다.
애초에 드라마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저였고, 어중간한 태도로 작품에 임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가 보내준 시놉시스는 읽어보지도 않았다.
한 작품을 끝내고 찾아오는 수많은 감정은, 바쁘게 작업하던 때에는 못 느끼던 피로와 함께 찾아왔고, 좋지 못한 상태에서 참여한 작품에서는 보란 듯이 티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나른한 태도로 운전을 하던 해준의 눈에 이윽고 The Snow가 들어왔다. 이름처럼 하얀 간판 위에 쓰인 글자를 대충 눈으로 훑은 해준은 후-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으며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말이 잘 통하는 작가면 좋겠네.”
부디 얘기가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해준은 느린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게 안도 전체적으로 하얗게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내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던 해준은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메인 바에서 음료를 만들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네, 어서 오세…요.”
음료를 만들다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본 여자의 얼굴에 잔뜩 피어오른 감정은 당황이었다. 흘러내린 옆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며 여자는 눈을 굴렸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잠시간 의아함을 가졌던 해준은 곧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말을 붙였다.
“다름이 아니라, 이설아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아…….”
“안 계시나요?”
“아……네…그게…원두! 받으러 가셨거든요….”
설아가 가게에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해준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려 했던 그의 생각이 무너졌고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언제쯤 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가게 마감 전에는 아마…오실걸요? 뭐…안 오실 수도 있고…….”
이상하게 아까부터 기어들어 가듯이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해준은 자신이 불편해서 그런가, 생각하며 음료 한잔을 빠르게 시키고 구석에 놓인 테이블 석에 자리를 잡았다.
“나 여기서 지금 뭐 하냐….”
생각하지도 못한 기다림에 어이가 없어진 해준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었다. 긴 다리를 꼬며 눕듯이 앉은 그의 시선에 잡힌 것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존재감을 내비치며 적당한 빛을 내뿜는 샹들리에를 빤히 응시하던 해준은 빛에 피로해진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전부 하얗네.”
가게 이름부터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심지어는 메인 바에서 만든 음료를 들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여자까지. 가게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꼈던 것 분위기가 다시금 와닿아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이 움직이며 다가온 그녀는 테이블에 음료를 내려놓은 후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고, 그런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올린 해준은 빨대를 입에 물며 그녀의 등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시원한 음료가 목울대를 넘어가자 나른하게 풀어졌던 몸에 잠시나마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시원함에 잔을 내려놓은 해준은 등을 좀 더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제 어쩔까, 늘어진 몸과 반대로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쯤 이었다.
“저 얼굴은 반칙 아닌가…”
작게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에 살짝 눈을 치켜떠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자 아까의 하얀 여자가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색함을 온몸에 두르고 있던 여자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다시 눈을 돌렸고, 그에 해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얀 토끼.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그는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못 볼 것도 없지…….”
작게 중얼거린 그는 지환이 보냈던 메일에서 파일을 내려받았다. 애초에 볼 생각도 없었던 시놉시스였다. 할 의욕도 없는 상태에서, 정성 들여 썼을 글을 눈으로 훑는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해준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니. 그럴 바엔 차라리 지환의 말마따나 한번 읽어라도 보는 게 낫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김지환이 인정할 정도면……질투 나네.”
몸을 일으킨 그는 은은하게 피어있던 웃음을 닦아내듯 입가를 쓸며 턱을 괴었고,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화면을 움직였다.
[무제:無題] - 과거와 미래,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재를 사는 너와 나……
작은 화면 가득 채운 글씨는 유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고작 10페이지짜리 짧은 분량의 시놉시스지만 정성이 담겼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공상은 별론데…,”
어차피 맡지 않을 작품,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한 번 읽어보는 시놉시스, 마음에 들지 않는 주제…그런 이유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화면을 움직이던 해준은 화면을 내릴수록 표정을 굳혔고, 다 읽었을 때쯤에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이거.”
화면을 다시 처음으로 올려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부족한 부분이 전혀 없는 시놉시스였다. 10페이지에 담아 놓은 서사, 세계관, 캐릭터까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완벽하게 전할 뿐 아니라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까지 심어놓았다.
해준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작품이 여태껏 제작이 안 되고 지환의 부탁을 통해 저에게 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정도의 작품성이라면 흥행은 반 이상 보장된 셈이었다. 아무리 배우가 유명하고, 연출이 뛰어나다고 한들 작가가 흔들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든 분야에서 기초가 중요하듯, 영화와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작가의 밑그림이 작품 성공의 반 이상을 좌우했다.
이 글에 어느 정도 유명한 배우가 섭외된다면, 흥행은 맡겨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지환은 저에게 부탁까지 했을까.
- 내가 직접 하고 싶었는데…그럴 여건이 안 되기도 하고, 염치도 없더라고. 생각나는 게 너밖에 없었다. 부탁한다.
“염치가 없다, 라….”
이거 또 의욕 생기게 만드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바람 빠지듯 웃던 해준이 생각을 달리할 때쯤 이었다.
“설아 언니! 대박! 오늘 새 원두 샘플 많이 받아왔어요!”
설아……?
익숙하지 않으나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든 해준의 눈에 비친 것은 방금 막 들어온 여자가 자신에게 음료를 만들어준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신나게 얘기하는 모습이었다.
“하?”
유쾌하지 않은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 * *
해준과 설아가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는 적막만이 자리 잡았다.
설아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고, 해준은 그런 설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해준은 헛웃음을 지었고 그 소리에 움찔한 설아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해준을 바라보았다.
“원두 가지러 가셨다는 이설아 씨는,”
“…….”
“저한테 음료 만들어주고 계셨네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이런 경험 처음이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테이블에 팔을 괴고 그 위에 턱을 올린 해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설아는 더 할 말이 없어지는 기분에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입을 열었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제가 생각 보다 잘생겨서 놀라셨나 보네요.”
아……죽고 싶다…….
감독보단 배우라고 하는 게 더 믿음직스러울 것 같은 그의 비주얼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것이 그에게까지 닿았을 줄이야.
초면인 해준에게 별의별 모습을 다 보이는구나, 생각한 설아는 겨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설아의 표정을 지켜보던 해준은 그녀의 생각을 안 들어도 알 것 같아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설아 씨도 알죠? 오늘 제가 여기 왜 왔는지.”
“네. 김지환 감독님 부탁받고 오신 거죠.”
“이설아 씨가 직접 다 쓴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해준은 아, 외마디 말을 내뱉으며 의자 뒤로 등을 기댔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오늘 작품 못 하겠다고 거절하러 온 거예요.”
설아는 나지막이 말하는 해준의 모습을 대답 없이 그저 바라보았다.
“작품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힘들기도 했고, 솔직히 드라마는 자신 없었거든요.”
“네, 알아요. 사실 이번 일은 거의 지환 선배가 벌인 일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죠.”
이곳에 올 때까지 그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그랬는데,
“근데 하고 싶어졌어요.”
눈앞에 있는 그녀가 펼쳐나갈 이야기의 뒷부분이, 궁금해졌다.
“이설아 씨랑 같이 작업하고 싶어요. 같이 합시다, 우리.”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말을 건네는 해준의 모습에 설아는 괜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핸드폰 화면 속에 띄워져 있던 것은 분명 자신의 시놉시스였다.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이설아를, 알아봐 준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기뻤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아는 잘 알았다. 용기 없는 걸음은 결국 몇 발자국 걷지 못한 채 멈춰 서버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으므로.
“제안은 너무 감사드려요.”
사실은, 같이 하고 싶었다.
“근데 이런 건 사실 좀 부담스러워서요. 죄송하지만 못할 것 같아요.”
그 순간 이후로 가장 바라왔던 시간임이 분명했지만, 설아는 또 고개를 돌렸다.
“바쁘신 분 괜히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동요하는 모습으로 말하는 설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해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과는 제가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네?”
“하지 말라면 꼭 하고 싶어지는 거, 알아요?”
“…….”
“이런 글을 본 이상 포기가 안 되죠. 이설아 씨한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이제부터 이설아 씨 설득할 생각이거든요.”
눈을 마주쳐오며 그는 말갛게 웃었다.
“잘, 버텨 봐요. 얼른 넘어 와주면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