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과 식사 약속을 잡은 날이 어느새 성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일정이 등록된 오늘 날짜의 달력을 보며 긴장 어린 한숨을 삼킨 설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괜찮겠지….”
여전히 제 머릿속은 복잡하고, 잔뜩 엉킨 실타래처럼 어려웠지만 막연하게 그냥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해준 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지난번 통화를 했을 때 그가 보여줬던 무심한 배려가 그의 모습이라면, 자신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그럼 금요일 6시까지 가게 앞으로 갈게요. 그때 봐요.
약속을 정함과 동시에 잘 자란 인사를 건넨 해준은 곧바로 통화를 종료했고, 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저 역시 그대로 잠이 들었었다.
그날 무슨 꿈을 꿨더라. 소풍 가기 전날 잔뜩 들뜬 어린아이가 꿈속에서 귀여운 동물 모양의 풍선을 들고 뛰어다니듯, 저 역시 촬영 현장에 나가 분주한 환경 속에서 대본을 들고 서 있는 꿈을 꿨더랬다.
아침에 일어나 멍한 정신 속에서도 설아는 어이가 없어 얼굴을 매만지며 픽픽 웃음을 흘렸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고작 식사 약속에 이런 꿈을 꾸는 저 자신이 우스워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걷기도 전에 뛰는 꼴이었지만, 잔뜩 겁먹은 현실의 이설아와는 달리 꿈속의 이설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가 넘쳤었다.
“…좋겠다.”
즐거운 일보다 힘든 일이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촬영 현장일지라도, 그곳에 있고 싶었다. 이만큼 웅크리고 살았으면 이제는 일어서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
지난 5년간 애써 억누르고 못 본 척, 잊은 척했던 꿈이 자꾸만 가슴을 두들겼다. 내밀어진 한해준의 손을 어서 잡으라고 뒤흔들었다.
“한해준 감독…….”
“한해준이 왜요?”
해준의 이름을 멍하니 중얼거리던 설아가 놀라 뒤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지현이 음료 한 잔을 내밀며 옆에 앉았다.
“저 그때 진짜 놀랐잖아요. 웬 잘생긴 손님이 왔나 했는데, 그게 한해준이라니…. 대체 왜 왔던 거예요?”
제 몫으로 챙겨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크게 털어 마신 지현은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물며 궁금증이 가득 서린 시선을 던져왔다.
질문이 한가득 쌓여있음을 나타내는 그 눈을 바라보던 설아는 용케도 지금까지 참아왔다 싶어 작게 웃었고,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앞에 놓인 딸기 스무디를 마셨다.
“오래 참았다? 바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언니가 세상 무너진 얼굴로 핸드폰만 쳐다보는데 어떻게 물어봐요. 그래서 대체 뭔데 그래요? 한해준 감독이 같이 뭐 하자고 찾아온 거예요? 언니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진짜 감독은 맞대요? 감독 얼굴이 그 정도면 배우 얼굴은 어느 정도여야 돼요? 한해준 감독 작품에 출연하는 남자 배우들은 기 안 죽는대요?
“천천히 물어봐도 돼. 어디 안 가.”
뭐가 그렇게 궁금했던지 숨도 안 쉬고 말을 내뱉은 지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설아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환 선배랑 아는 사이였나 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자세히는 모르고.”
“와……. 그 감독님은 진짜 인맥 최고다. 다음에 가게 오실 때는 저 있는 날 오라고 말 좀 해줘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람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성격을 지닌 탓에 지현은 얼굴을 볼 기회가 몇 없었던 지환과도 쉽게 친분을 쌓았다.
처음 카페 일을 시작했을 때, 지환은 하루가 멀다고 카페를 찾아왔었다.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늘 저를 유심히 살피며 걱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늘 활기찬 지현과 함께 일을 하게 되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으로 한숨 같은 웃음을 뱉었었다.
- 괜찮은 애 같다, 설아야. 그러니까 혼자 지레 겁먹고 숨지는 마. 부딪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지환의 말에 끊임없이 고민하던 설아가 자신의 사정을 얘기하기로 결심한 것은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지현의 모습 때문이었다. 거짓 없이 투명한 눈을 마주하며 웃어오는 모습에 설아는 순식간에 벽을 허물어트렸다.
자신의 사정을 들은 그날 지현은 펑펑 울며 화를 냈다가 말해줘서 고맙다고 껴안았다가, 혼자 술잔을 가득 채워 마시며 욕을 내뱉다가를 반복했다.
- 언니 나로는 못 미더워도 그래도 말 해줘요. 지금처럼 혼자 속 아프게 어? 속 썩지 말고요. 나 언니랑 안 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니 좋은 사람인 거 진짜 잘 알거든요? 그러니까 난 누가 뭐래도 언니 편이야.
울음을 가득 담은 말을 건네며 저를 쏘아보던 지현은, 그대로 술잔을 내밀어 내려져 있던 제 잔에 짠-하고는 술을 들이켰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 화를 내주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똑같이 코가 찡해졌던 설아는 그날 이후, 지현에게만큼은 숨기는 것 없이 전부를 말하게 됐다.
모든 걸 알아도 지현은 저를 배신하지 않고 믿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진정될 때까지 궁금증을 삼키고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 설아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환 선배가 한해준 감독님한테 내 시놉시스 넘겼거든.”
“대박. 인맥만 최고인 게 아니라 하는 일도 최고인 감독님인 걸 제가 몰랐네요. 그래서요? 한해준 감독님이 작품같이 하자고 했어요?”
본인이 더 설래하며 몸을 들썩거리는 지현을 흘깃 본 설아는 곤란한 듯 웃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응. 그렇긴 한데….”
“와, 언니 이제 진짜 잘 될 일만 남았네! 드디어 세상이 우리 언니 글발 죽이는 작가인 거 알게 되는 거잖아요!”
나 그럼 미리 사인받아둘까요? 언니 글 쓰려면 가게는 어떡하죠? 물론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긴 해요. 한해준 감독님이랑 언제 또 봐요?
신나서 말을 하던 지현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설아의 모습을 보더니 설마, 읊조리며 순식간에 표정을 구겼다.
“언니 설마 안 한다고 했어요?”
침묵이 긍정임을 알았는지 지현은 허, 참,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음을 와득 씹어 먹더니 버럭 화를 냈다.
“언니 미쳤어요?! 그걸 왜 거절해요, 왜!”
“알잖아, 너도.”
“이 언니 진짜 또 답답한 소리 하시네.”
점점 커지는 지현의 목소리에 설아는 생뚱맞게도 지금 가게가 한가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지현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언니는 진짜 나한테 혼나야 해.”
“이제 질문할 건 없는 거야? 더 물어봐도 되는데.”
“질문이 문제가 아니죠. 언니 대체 왜 안 한다고 했어요?”
“그냥.”
앞에 놓인 딸기 스무디를 빨대로 한입 먹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 안 가득 남는 달콤함과 달리 뱉어진 말은 쓰디썼다.
“내가 해도 될까, 싶었어. 아직 난 여전히 5년 전 그때 머물러있거든.”
한심하지? 덧붙이듯 중얼거리자 지현은 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지금 언니 생각은 어떤데요?”
“응?”
“하고 싶어요?”
정곡을 찔러오는 지현의 물음에 설아는 쓰게 웃었다.
“…하고 싶지.”
“…….”
“안 하고 싶을 리가 없잖아. 평생을…꿈꿔왔던 건데.”
“그럼 해요, 언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진지함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저를 보던 지현은 빈 컵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언니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벌써 5년이나 지났고.”
언니한테는 벌써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눈을 찡그린 지현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며 머리를 헝클이더니 두 눈을 마주쳐왔다.
“나는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근데 난 어떻게 해야 언니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 것 같거든. 언니도 알잖아요.”
“…지현아.”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언니 편이 더 많아요.”
나도 그렇고, 김지환 감독님도 그렇고……. 말을 전부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트린 지현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멍하니 시선을 흘리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털어버리곤 다시 말을 시작했다.
“다른 거 다 신경 쓰지 말고, 언니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래도 뭐라 할 사람 없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언니 같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툭 치는 지현의 행동에 설아 역시 가볍게 웃었다.
“그럼 언니. 오늘 마감은 부탁해도 될까?”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었고, 설아는 지현을 따라 눈을 찡긋하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려고.”
6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까이에 놓인 노트북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지현을 바라보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이내 해맑게 웃었다.
“파이팅!”
주먹을 쥔 두 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려 파이팅 자세를 취한 것은 덤이었다.
* * *
해준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가게 앞으로 나가 있어야겠다 생각한 설아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가게를 나섰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시선을 옮기던 설아는 시야에 잡히는 인물에 움직임을 멈췄다.
“어….”
주차된 차에 기대어 느른하게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는 해준은 아직 설아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묘하게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네.”
바람에 날려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설아는 천천히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해준의 그림자 끝이 설아의 발끝에 밟혔고,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린 해준과 설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언제 무표정으로 있었냐는 듯 입가에 예쁜 실선을 그으며 입을 열었다.
“왔어요?”
아무 표정 없던 차가운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는 모습을 본 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따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못 먹는 거라든가.”
기대어 서 있던 차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는 조수석 문을 열었고, 설아를 향해 타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해산물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감사 인사를 하며 조수석에 오르자 그는 옅게 웃으며 문을 닫았고, 보닛 앞쪽을 돌아 운전석으로 들어섰다.
“벨트.”
“아, 네.”
조용한 차 안에 달칵 안전벨트 채우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느긋한 손짓으로 시동을 걸었고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 말 없는 그를 흘깃 쳐다보자 예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해준은 신호에 걸렸을 때 조수석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식 괜찮아요?”
어느새 그의 입꼬리는 예쁜 실선을 그린 채였다. 웃지 않으면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 미소를 띠면 더없이 달아 보였다. 그리고 해준은, 저와 대화를 나눌 땐 계속 입가에 웃음을 띤 상태였다.
그 간극을 느낀 설아는 작게 오른 의미 모를 울렁거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 많이 고파요?”
“아뇨, 괜찮아요.”
“분위기도 좋고 맛은 더 좋긴 한데, 조금 떨어져 있어서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저는 괜찮아요. 일하면서 음료 많이 마셔서.”
“그러게. 설아 씨한테 커피 향 나네요.”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그냥 나오는 바람에….”
한 손으로 핸들을 슥 돌리던 해준은 설아를 바라보다 소리 없이 웃었다.
“아니, 좋다는 거였어요. 나도 좋아해요, 커피.”
“자주 드세요?”
“작품 할 때는 거의 달고 살죠.”
피식 웃은 그는 설아 씨는요? 하며 물었다.
“쓴 건 잘 못 마셔요.”
“또 어떤 걸 좋아해요?”
질문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그를 바라보자 해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설아 씨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기억해두려고요.”
그는 말끝에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작가님으로 모셔야 할 분인데.”
농담처럼 말을 건넨 그 덕분에 설아 역시 부담감에 얼어붙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끝까지 안 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음. 그럼 계속해서 설득하겠죠? 설아 씨가 귀찮아서라도 하겠다고 할 때까지. 그러니까 안 한다는 선택지는 아예 빼줘요. 우리 둘 다 그건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해준은 핸들에 몸을 기대듯 숙이며 좁아진 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좀 더 한적해진 거리의 풍경과 어둑해진 하늘을 보던 설아는 문득 지금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꽤 좋다고 생각했다.
“감사해요.”
“뭐가요?”
“그냥……제 글 욕심난다고 해주셨던 것도 감사하고, 맛있는 밥 사주시는 것도 감사하고요.”
손가락에 걸치듯 잡고 있던 핸들을 돌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들어서자 자갈밭을 구르는 바퀴가 느껴졌고, 그 앞엔 꽤 큰 규모가 숨겨진 한식당이 있었다.
널찍한 주차장 구석에 능숙하게 차를 넣은 해준은 천천히 시동을 껐다. 바로 내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뱉었다.
“그런 글 볼 수 있게 해준 게 영광이었죠. 밥도 설아 씨가 같이 먹어주러 나온 거고.”
설아는 천천히 해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내가 더 고마워요.”
한없이 단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