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건물들이 줄을 선 거리에는 한적함이 머무르고 있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매끄럽게 거리를 달리던 고급 세단은, 주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층 빌딩 앞으로 들어섰다.
재빠르게 달려와 인사를 하는 주차요원에게 차키를 넘기며 차에서 내린 남자는, 햇빛이 따가운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뚜벅뚜벅 경쾌하게 울리는 구두소리에 돌아본 직원들이 그에게 인사를 전했지만, 남자는 별 반응 없이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각 잡힌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왔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목 인사를 하며 말하는 비서를 흘깃 내려다본 남자는, 비서의 말을 듣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음에 묻어 날카롭게 흘러나온 예민함이 확연히 느껴져 비서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거슬리지 않는 소음이 낮게 깔린 로비 분위기와 다르게 남자와 비서 주위만 얼어붙은 듯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나운 눈빛으로 엘리베이터 불빛을 바라보던 남자는 불현듯 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쩔까?”
“어떤 걸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냥, 전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털며 뻐근한 목 주위를 푼 남자는 입가를 매만지며 비소를 흘렸다.
“거슬리네.”
유독 가라앉은 대표의 심기를 살피던 비서는 대답하기보단 침묵을 택했고,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던 듯 대표는 말없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일 봐.”
“예?”
“넌 일 보라고.”
쫓아오지 말라는 말을 돌려 말한 남자는 닫히는 문 사이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비서를 바라보다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올라가는 숫자와 다르게 기분은 점점 바닥을 쳤다. 곧 자신의 기분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더 예민해진 남자는 쯧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10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가 띵-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고, 남자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길게 뻗은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 앞에 다다른 남자는 넥타이를 풀러 내리며 문을 열었다.
집무실 한 가운데 놓인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보고 차가운 웃음을 흘린 남자는 천천히 책상을 향해 걸었다.
“사람이 들어오면 인사를 좀 하지?”
JS 엔터테인먼트 대표 강준석이라 크게 적힌 명패를 손으로 훑으며 자리에 앉은 남자, 강 대표는 미동 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찬형을 보며 벗은 수트 상의를 의자에 대충 걸쳤다.
“인사성이 영 별로네…. 바닥부터 다시 연습하고 싶다고 투정 부리는 거야 지금? 응?”
“…왜 부르셨어요.”
“대표가 소속 배우 만나자고 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뻔뻔스레 흘러나온 강 대표의 말에 테이블 끝에 고정한 시선을 움직이지 않던 찬형은 헛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강 대표가 앉아있는 책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희가 그냥 소속사 대표랑 소속 배우는 아니지 않나요.”
“그럼?”
매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찬형을 빤히 응시하며 강 대표는 입을 열었다.
“너랑 나 사이에 뭐가 또 있니?”
“대표님.”
“그래, 대표지.”
한순간에 눈을 치켜뜬 강대표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매만지며 찬형을 향해 비소를 흘렸다.
“내가 네 대표야, 윤찬형. 이건 까먹으면 안 되지. 누가 보면 네가 대표인 줄 알겠어.”
“…하실 말씀이 뭡니까.”
제대로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강대표의 모습에 찬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시선을 테이블 언저리로 돌렸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있고 싶지 않았다.
꼿꼿이 선 찬형의 모습은 고가의 가죽 소파 위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해 보였다. 강 대표는 아무 말 없이 찬형을 살폈고, 찬형은 그저 대표실 안 조용히 울리는 시침소리를 들으며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제대하고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는 건방진 내 배우 얼굴 보려고 불렀지. 널 부른 명분이 이거면 충분할까?”
내 배우. 토가 올라올 만큼 역겹고 뻔뻔한 소리에 찬형은 욕설을 삼키며 입술을 짓이겼다.
“…장난은 그만 하세요.”
“버릇도 없고, 재미도 없네. 네가 뭐가 예쁘다고 나나 걔나…,”
“대표님!”
죽은 듯이 앉아 조용히 말하던 찬형이 일순 큰소리로 외쳤고, 대표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아직도 걔한테 묶여 있니?”
이설아. 결국은 나와 버린 그 이름에 찬형은 노기를 가득 담아 강 대표를 바라보았고, 그런 찬형이 보내오는 시선의 의미를 알았음에도 강 대표는 그저 안타깝다는 듯 조롱 어린 시선을 던졌다.
“열 받지? 너 내가 걔 얘기하는 거 싫어했잖아.”
경고했잖아, 찬형아. 강 대표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어.”
“…….”
“누가 그런 멍청한 인터뷰를 하라고 했냐고. 네가 그렇게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애였던가? 그렇게 하면 뭐가 바뀔 줄 알았니?”
아……. 낮게 목을 울려 신음한 찬형은 그제야 강 대표가 저를 왜 불렀는지 짐작이 가서 미간을 구겼다. 강 대표가 말하는 인터뷰는 필시 제대를 하고 난 직후, 진행했던 것을 말하는 거였다.
“아직도 그 꼴인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뭐가 자랑이라고 그걸 떠들고 다녀? 나한테 들키지 않을 궁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공개적으로 떠들어?”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던 듯, 평소 말을 길게 하지 않는 강 대표가 숨을 쉬지도 않고 빠르게 말을 뱉었고 가만히 듣고 있는 찬형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뭐…꼭 다시 한번 함께 하고 싶어? 언제 너희가 같이한 적이 있기나 해?”
고개를 숙인 찬형의 턱을 붙잡아 저에게 돌린 강 대표는 붉은 기가 올라온 찬형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이설아가 다시 돌아올 거 같니? 너 버리고 돈 받고 떠난 애한테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 찬형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뱉는 강 대표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던 찬형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씹던 입 안쪽 살을 놓았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자신의 턱을 붙잡은 강 대표의 손을 쳐내며 찬형은 짓씹듯 말을 뱉었다.
“이 정도도 하면 안 돼요? 대표님 말대로 아무것도 변하는 거 없어요. 대표님 말대로…저희 끝났어요. 근데….”
“…….”
“뭐가 무서워서 아직도 설아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예민해지세요, 대표님답지 않게.”
“뭐?”
“뭐 켕기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붉어진 눈을 숨길 생각도 없이 저를 노려보는 찬형을 내려다보던 강 대표는, 아침 일찍 건네받았던 찬형의 인터뷰를 봤을 때보다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미쳤니?”
“그래 보이세요?”
“기어오르는 것도 적당히 해야 귀엽게 봐주지, 찬형아. 적당히 해. 진짜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찬형의 어깨를 세게 누르며 말한 강 대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찬형을 향해 그만 돌아가라며 짧게 말했다.
대답 없는 찬형을 그대로 두고 책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 강 대표는 여럿 쌓인 서류 봉투를 성의 없는 손길로 툭툭 밀며 대충 눈으로 훑었다.
그런 강 대표의 행동을 눈으로 좇던 찬형은 한숨을 내뱉으며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었다. 대표실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강 대표가 찬형을 불러 세웠다.
“이제 작품 시작해야지.”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는 찬형을 개의치 않고 강 대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시놉시스 들어온 거 많아. 매니저 통해서 보낼 테니까 읽어봐.”
“…….”
“내 배우가 거품이었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거든. 물론 너라면 알아서 잘할 거 알지만, 혹시 몰라서 말해. 오늘 같은 일 또 안 생기게 잘해.”
찬형은 대답 없이 문을 쾅 닫으며 복도로 나섰다. 외면하고 묻어놨던 온갖 감정이 치밀어 올라 숨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울컥 차오른 이름 모를 감정에 목이 메와 찬형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너무 우스워 찬형은 울음이 묻은 웃음을 흘렸다.
“꼴좋다.”
가장 소중한 것을 저버린 결과가 이거였다. 고작, 이 정도였다. 이유도 모른 채 저버려야만 했지만, 받아드려야만 했다. 그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의 자신은 그랬다. 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도 저는 똑같았다.
한심함에 찬형은 실소를 내뱉으면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저의 세상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던, 제일 큰 사랑을 주고받았던,
“……설아.”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설아의 이름을 겨우 내뱉으며 찬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말끝에 매달린 감정은 더없이 무거웠다.
* * *
콧김을 잔뜩 내뿜으며 차에서 내린 민재는 전투력이 그득한 눈빛으로 아파트 꼭대기 언저리를 노려보다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 드라마 하기로 했어.
예상하지도 못한 소식에 멍해진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해준은 이제 됐지, 한 마디를 내뱉으며 통화를 종료했고 민재는 그제야 이미 끊긴 전화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봐도 연결이 되지 않는 통화에 온종일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스튜디오에 박혀있던 민재는 급한 것만 대충 처리함과 동시에 해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진짜 죽었어, 한해준.”
어딘가 확 돌아버린 사람처럼 서재에 들어앉아 꼼짝하지 않던 자식이 도리어 드라마를 하겠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한해준이, 최소 한 달의 휴식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 외치던 그가 드라마를 하겠다니.
“제대로 설명 안 하기만 해 봐 진짜.”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23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는 잔뜩 분노한 민재를 토해냈고, 민재는 거침없는 손짓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해준!”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민재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해준을 찾다 작게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해서…우리 쪽이랑…,”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해준이 눈만 슬쩍 옮겨 민재를 쳐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무시를 해?”
더 열이 받은 민재가 씩씩거리며 다가서자 해준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짓을 했고, 민재는 쿵쿵 발을 굴리며 입을 닫았다.
“네. 급할 건 전혀 없어요. 설아 씨 대본 어느 정도 나오면……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되니까.”
저에게 보내는 성가시다는 눈빛과 달리 다정한 음성에 민재는 열 수 없는 입 대신 눈으로 그에게 온갖 욕을 쏟아부었다.
“네. 그럼 다시 연락드릴게요. 푹 쉬어요. 네. 설아 씨도요.”
끝까지 다정한 음성으로 통화를 하던 해준이 끝엔 옅은 웃음까지 흘리며 통화를 종료하자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재는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소리쳤다.
“약 처먹었냐?! 목소리는 왜 그 모양 그 꼴이야? 웃, 웃어?”
“시끄러워.”
순식간에 미간을 구기며 귀찮음이 잔뜩 묻어난 음성으로 말을 뱉은 해준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서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뭐냐고 진짜. 설명을 해줘야지!”
“드라마 한다고 했잖아. 그게 전부인데.”
물 마시러 들어온 부엌까지 자신을 쫓아와 말 거는 민재가 성가셔 대충 손을 휘저어 뒤로 물린 해준은 한입에 물을 가득 털어 넣었다.
“그게 전부인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할 거면 그냥 입을 아예 닫고 있지 이 자식아!”
끄응-낮게 앓는 소리를 낸 해준은 빈 잔을 싱크대로 내려놓고 민재를 이끌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몸을 눕히듯 앉아 다리를 길게 뻗자 민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드라마 한다고?”
“어.”
“김지환 감독님이 부탁했던 그거? 감독님 때문에?”
“아니. 형이 부탁했던 그때 그건 맞는데, 하려고 하는 건 내 의지.”
“왜?”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눈썹을 팔자로 세운 해준이 민재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으니까.”
“객관적으로 봐도?”
“솔직하게 말해?”
“뭔데.”
“우리 회사로 아예 불러들이고 싶을 정도야.”
낮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는 해준을 모습을 바라보던 민재는, 그의 모습에서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아 허-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작가는 뭐래?”
“고민 많이 하는 거 같았는데 하겠대. 믿어줘서 고맙지.”
나른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뱉는 해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민재는 그저 물끄러미 해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해준 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겉만 보고 한해준은 다정한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곤 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결과, 한해준은 다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일 앞에선 더없이 냉정했다.
그런 해준이 지금은 진정으로 다정한 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무의식으로 흘러나온 음성인 건지 얼굴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지만, 민재에게 있어 이는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그 작가라는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혼자 조용히 생각하던 민재는 해준이 그를 부르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근데 민재야 뭔가 좀….”
“어?”
망설이듯 손으로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던 해준은 이내 손을 멈췄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