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첫 작품이라고 했거든.”
“근데?”
“익숙해, 문체가. 착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민재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 해준을 응시했다. 어릴 때부터 촬영장을 드나들며 동화 책 대신 시나리오를 읽었던 해준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고, 작품을 보는 시선도 남달랐다.
아주 살짝 개연성이 떨어질 뿐인 티 나지 않는 오류를 귀신같이 집어냈고, 표절 작품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분명 그건 맞을 터였다.
“표절 아니야?”
해준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람 아니야. 그것보단, 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가를 매만지던 해준은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한 듯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설아 씨 대본 작업 어느 정도 진행되면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너도 그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마. 괜히 기사 나면 부담스러워할 거야.”
“……뭐.”
기다렸다는 듯 말을 뱉어내는 해준의 모습에 작가의 이름이 설아냐는 질문도, 대체 누가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냐는 질문도 하지 못한 민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회사의 대표는 저 자신인데, 어쩐지 한량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한해준이 대표인 것처럼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함에 울컥했던 민재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고, 한숨을 토해내며 뱉을 뻔한 욕은 삼켜냈다.
하도 귀찮아하는 성격 탓에 결심하기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마음먹은 해준이 망설이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민재는 어지러웠던 생각을 정리하며 앞으로 할 일들을 떠올렸다.
“어떤 작품이야?”
“공상.”
“너 SF 물 싫어하잖아.”
“그랬지.”
현실성이 전혀 없는 공상은 저랑 안 맞는다며 평소 질색을 하던 해준이었다. 그런 그가 택했다고 하니 민재는 대체 어떤 작가가 쓴 어느 정도의 작품일지 궁금증이 일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할 정도야?”
“나도 당황스러워.”
헛웃음을 켠 해준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궁금하게 하는 게 있다고 해야 하나. 그냥, 눈이 가더라고.”
멍하니 천장에 달린 등을 응시하던 해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고, 눈을 감으며 소파 깊숙이 몸을 눕혔다.
부족한 부분이 전혀 없던 시놉시스의 뒷부분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작품을 쓴 이설아라는 사람에게도 순수한 궁금증이 생겼다.
하얀 토끼, 라고 생각했던 첫인상 그대로일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작품 앞에서 보이는 그녀의 강단 있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어두운 차 안에서 설아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을 땐, 작게 소름이 올라올 정도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쪽 업계에 몸담으면서 설아만큼 눈을 빛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빠르게 활활 타올랐던 만큼 쉽게 꺼지는 것이 열정이라는 것을 해준은 잘 알고 있었다. 생각과는 다른 환경과 쉽지 않은 상황의 연속에 다들 작품 제작을 그저 일로써 받아들였다.
하지만 설아에겐 아니었다. 그녀에게 글을 쓰는 것은 일이 아니라 꿈이었고, 전부였다.
현실에 사는 해준에게 그런 이상적인 설아는 상성부터가 달랐지만, 왜인지 그녀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저, 문득 들었다.
그런 눈빛을 보일 정도로 글을 좋아하는 그녀가 이렇게 웅크리고 살아야 했을 그 사정이란 건 뭘까. 굳이 설아의 상처를 헤집으면서까지 캐묻고 싶지는 않았기에 저버린 질문이었지만, 솔직히 제 욕심대로라면 묻고, 알고 싶었다.
이왕이면 전부를 알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우리 속에서 꺼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그 눈빛을 보고 싶었다. 설아가 원한다면……얼마든지 책임져 줄 자신이 있었다.
“…우리 작업실에 책상 하나 더 들어갈 곳이 있었나?”
해준은 조용히 읊조리며 고개를 들었고, 태블릿을 보며 일정을 조율하는 민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 작가님 모시려고?”
“아니, 그냥.”
정곡이었던 듯 묘하게 시선을 비껴 내리며 말하는 해준을 보고 픽 웃은 민재는 다시금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아직 뚜껑도 안 열어봤으니까.”
“너도 보면 말 바뀔걸. 네가 먼저 설아 씨 찾아갈 수도 있어.”
설아 씨 제작발표회 때 긴장하면 어쩌지, 부터 시작해서 시청률 공약을 거네 마네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리던 해준은 민재가 그만 좀 하라 한마디 던지자 말을 멈췄고, 묘한 눈빛으로 민재를 바라보다 그의 태블릿을 뺏어 들었다.
“뭔데.”
“읽어봐, 너도.”
순식간에 내려받은 시놉시스를 화면 가득 띄운 그는 태블릿을 민재에게 건넸고, 어서 읽어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 해준의 시선을 황당하다는 듯 받아내던 민재는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시놉시스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스크롤을 내려감에 따라 눈썹이 내려갔고 이내 시선을 들어 올린 민재가 입을 벌리며 저를 쳐다보자 해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야……. 뭐냐, 이거…?”
“내가 말했지?”
“…….”
“우리 작가님 대단하다고.”
자랑스럽다는 듯한 음성은 덤이었다.
* * *
결심을 다진 후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 설아 씨 후회 안 하도록 잘해야겠다. 고마워요, 믿어줘서.
그날, 또다시 겁을 집어먹기 전에 한 걸음을 내디뎠던 그 차안에서 해준은 입가에 까만 동굴이 지도록 환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저절로 안정되는 다정한 음성에 저 역시 긴장을 풀고 약하게 웃어 보였다.
조급해할 필요도, 겁을 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즐기면 된다고 말해준 해준 덕에 설아는 그날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용기를 낸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예전의 이설아가 봤으면 이제야 좀 사람답게 행동한다고 하겠다.”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긴 설아는 가볍게 손을 굴려 막힘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한번 용기를 가진 후로 설아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그동안 못해왔던 걸 전부 털어내기라도 하듯, 온종일 대본 작업에만 몰두했다. 어깨가 결리고 눈이 피로해질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고, 대충 컵라면으로 밥을 해결했다.
해준은 천천히 여유롭게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설아는 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평생을 꿈꿔왔던 일이었다. 지옥 같았던 지난 5년을 드디어 벗어나게 된 설아의 입가에 떠오른 옅은 웃음은 계속해서 피어있었다.
“아……어떡해.”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너무 좋다, 진짜….”
노트북 화면 한가득 떠 있는 글자를 응시하며 중얼거리던 설아는 피식 웃으며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고개를 들어 흰 천장을 바라봐도 글자가 보이는 것 같아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뜬 설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노트북을 닫았다.
혼자서 글을 쓸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자꾸만 치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제 글이 공개되고, 다른 누군가가 제 글을 토대로 연기를 하고, 그리고……
“…잘하고 싶다.”
해준이 제 글을 바탕으로 영상을 만들어내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설아는 한 치의 의심도 거짓도 없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봤던 해준을 떠올렸다.
“조급해하지 말자.”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제 글이 욕심이 나서 같이 하고 싶다고 말해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믿어준 만큼, 기대해준 만큼 보답해주고 싶었다.
“…못 할 것도 없지.”
설아의 가장 큰 재능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저앉아 죽은 듯이 있던 이설아라면 몰라도, 용기 내 일어난 지금의 저 자신에게 무서운 건 없었다.
그가 봤던 시놉시스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써 내려갈 자신이 있었다. 해준이 완성된 대본을 보면 어떤 표정에, 어떤 말을 건네 올까. 의미 모를 울렁거림을 느끼며 설아는 설핏 웃었다. 하루빨리 완성된 대본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잉-테이블 위에서 작게 진동하며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본 설아는 화면 가득 떠오른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여보세요?”
- 소식 들었다, 설아야.
촬영 현장에 있는 듯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전해진 목소리는 기쁘다는 티를 확 내고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말을 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아 설아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제가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 됐어. 해준이는 어때. 만나보니까 나쁘지는 않지?
장소를 옮겼는지 조용해진 수화기 너머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설아에게 있어 그는 좋고 싫음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한 사람이었다. 설아는 입가에 실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좋으신 분 같아요. 감사하고.”
달캉-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게 숨을 내뱉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잠깐의 정적 후 지환은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 걔가 좀 한량 같고 성격에 하자도 좀 있지만, 믿어 봐도 될 거다.
해준이 지환에 관해 말할 때도 그러했듯, 지환이 그에 관해 말하는 지금도 내용과 상관없이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런 둘의 관계성에 설아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책임지지 못할 말은 절대 안 하는 애야. 오히려 책임진 게 너무 많아서 현실에 타협하고 사는 애니까…….
할 말을 생각하듯 지환은 정적과 함께 숨을 뱉어냈다. 두 어깨 가득 무거운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해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혹 저 자신도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시 잠깐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털어 버렸다.
- 설아 너라면,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았어. 너도, 해준이도 서로한테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설아는 해준이 어깨에 짊어 메고 책임져야 할 부담이 아닌, 그가 의지할 수 있도록 곁에서 걷는 동료가 되고 싶었다. 해준이 말했던 ‘팀’이 되고 싶었다.
“내가 선배한테도 진짜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알죠?”
- 고마우면 잘 돼. 나중에 어디 가서 내 이름 말하는 거 까먹지 말고. 인생 최고의 선배님이라고 꼭 말해야 한다?
“나중에 선배나 저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 하긴, 우리 이제 경쟁자지? 작품상은 양보 못 한다.
“선배 저 학교 다닐 때 상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거 알죠?”
- 네가 나랑 동기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었어, 그렇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 오는 지환의 모습에 설아 역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래전 알던 대학 후배를, 볼품없이 넘어져 버린 옛 후배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경 써준 지환이었다. 그런 그에게 감사함을 말하라면, 분명 그건 말로써 전부 표현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설아의 마음을 잘 아는지, 지환은 늘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줬고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 왔었다, 지금처럼.
“선배.”
- 그래.
“진짜 고마워요. 선배 아니었으면…나 다시 할 생각 못 했을 거예요.”
수화기 너머 지환은 답이 없었다. 설아는 천천히 말을 뱉었다.
“선배 덕분에 용기 냈고, 선배 덕분에 한해준 감독님 손잡을 수 있었어요.”
선배가 사람 한 명 살린 거야, 알죠? 작게 웃으며 덧붙이자 지환은 픽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말을 전했다.
- 나는 그냥 말 몇 마디 했을 뿐이야. 설아 너 스스로 극복한 거지. 고맙다, 그동안 버텨줘서.
더 빨리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들릴 듯 말 듯 전해진 지환의 말에 설아는 코끝이 찡해옴을 느꼈고, 언제나 지환이 그랬듯 이번엔 자신이 먼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드라마 하다가 힘들 때 찾아가면 같이 술 한잔해줘야 돼요, 알겠죠?”
- 온종일도 가능하니까 언제든지. 한해준이 구박해도 찾아와. 내가 걔는 확실하게 처리해줄 자신이 있으니까.
“한 감독님이 되게 잘 해줘요. 걱정 안 해도 돼요.”
- 걔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물어오는 지환의 목소리에 설아 역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응. 되게 친절하시던데요?”
- 한해준이? 네 덕분에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들어본다.
늘 웃어주는 모습이나,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떠올리며 말한 것이었지만 지환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 말했잖아. 성격에 하자가 좀 있다고. 감당하기 좀 힘들 땐 그냥……정신 차리라고 한 대 쳐라. 그럼 정신 차릴 거야.
진지하게 말을 잇는 지환의 모습에 설아는, 지환에게 많이 맞았다던 해준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 총 사전제작이냐?
“아뇨. 대본 어느 정도 나오면 바로 시작하기로 했어요.”
해준은 여유롭게 사전제작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설아는 하루빨리 촬영 현장에 나가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해준은 별다른 말 없이 설아의 선택을 존중했다.
- 힘내자, 설아야.
“…고마워요, 선배.”
- 드라마 기대한다, 이 작가.
…이 작가.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해버린 지환 덕에 설아는 이미 끊긴 전화를 붙들고 환히 웃으며 감사 인사를 말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