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엔딩크레딧
작가 : 문달
작품등록일 : 2019.10.24
  첫회보기
 
8. 가장 화려하게
작성일 : 19-10-29     조회 : 259     추천 : 0     분량 : 6138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와, 설아 씨 진짜 장난 아니다.”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굳이 여기서 수정 들어가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파일로 출력하여 건네준 대본을 읽은 해준은 작게 감탄하며 설아와 눈을 맞췄고, 설아는 그런 해준을 바라보다 입가에 가느다란 실선을 그렸다.

 

 “언제 이만큼을 다 쓴 거예요.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빨리하고 싶어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잇는 설아의 모습을 보던 해준은 저 역시 웃으며 턱을 괸 팔을 살짝 기울였다.

 

 “이젠 내가 열심히 일할 차례네요.”

 

 설아의 대본 작업이 시작된 후로 해준은 그녀의 카페에 걸음 하는 일이 많아졌다. 챙겨 먹고 일하라며 포장해온 도시락을 건네기도 했고, 설아가 써 내려간 대본을 읽으며 앞으로 진행될 제작의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설아의 대본 자체에는 해준이 조언할 부분은 전혀 없었다. 초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구성이었고, 흡입력 있는 내용과 살아있는 문체가 가득했다.

 

 작업이 진행될 때마다 해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이 재능을 숨기고 살았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설아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카페에 자주 오면서부터 안면을 트게 된 지현은 그런 설아를 보고 깔깔 웃으며 말했었다.

 

 - 감독님 덕분에 우리 언니 글발 쩌는 거 세상이 알겠네요. 아니다, 감독님이 우리 언니 덕분에 대박 나는 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뱉던 지현의 모습에 설아는 작게 웃으며 지현에게 일하러 가라며 손짓했고, 해준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느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피웠었다.

 

 - 지현 씨 말이 맞죠. 설아 씨 덕, 나도 좀 봐보려고요. 우리 작가님이 워낙 대단해야지.

 

 - 아, 역시 천재 감독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난 한 감독님도 진짜 마음에 든다니까요?

 

 -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 해줘서.

 

 꾸밈없는 지현의 밝은 모습에 해준 역시 그녀가 마음에 들었었다. 설아의 곁에 있는 사람이니만큼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그녀의 모습에 해준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얼음이 녹아 표면에 물기가 생긴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해준은 또다시 빠져들어 갈 만큼 대본에 집중하고 있는 설아를 보며 설핏 웃었다.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미동도 없이 눈만 굴리는 그녀를 보던 해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네?”

 

 “천천히 해요, 천천히. 목 아프겠어요.”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해준의 손에 놀라 고개를 든 설아는 그의 말을 들은 후에야 인지한 듯 아- 외마디 내뱉었다. 우드득 들린 뼈 소리에 민망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설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감독님은 안 바쁘세요?”

 

 “어, 나 지금 빨리 가라고 눈치 주는 거예요, 혹시?”

 

 바쁜 일정이 있지만 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건넨 말에 해준은 울상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너무 자주 왔죠? 설아 씨 대본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었어야지.”

 

 처음 같았으면 그가 진짜로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겠지만, 해준과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설아는 그가 꽤 장난기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도 그 장난의 연장선이란 것을 아는 설아는 그저 눈썹을 늘어뜨리고 있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매일 출근 도장 찍으셔도 돼요. 워낙 바쁘신 분이라 걱정돼서 물어본 거예요.”

 

 “바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지금 집중하고 신경 쓸 건 우리 작품밖에 없어요.”

 

 우리 작품……. 작게 따라 읊으며 설아는 저절로 올라가려는 얼굴 근육을 붙잡으려 애썼다. 들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뭉클하고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그를 알아서인지, 아니면 해준의 무의식인지 그는 늘 ‘우리 팀’ ‘우리 작가님’ ‘우리 작품’처럼 우리라는 점을 빼먹지 않고 다정스레 말했고, 설아는 그때마다 자신이 정말 작품을 시작했다는 것을 실감했고, 널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야만 했다.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설아 씨가요? 이미 완벽한데 거기서 얼마나 더 잘하려고 그래요.”

 

 눈을 작게 휘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선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심심찮은 격려나 빈말이 아닌 그의 진심이 가득한 말이었다.

 

 “제 파트너가 천재 감독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저도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와.”

 

 작게 탄식하며 웃은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듯 턱을 괴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감동이긴 한데, 설아 씨는 이미 충분해요.”

 

 “…….”

 

 “오히려 그 천재 감독이 노력해야지…. 설아 씨가 파트너를 해주는데.”

 

 해준은 느긋하다 못해 살짝 느리다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말을 이었고, 설아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눈을 감으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깊게 감았다 눈을 뜬 해준은 투명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설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

 

 “근데 난 맛있는 것도 잔뜩 준비해주고 싶거든요.”

 

 시선을 내리깔아 테이블 언저리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 해준의 모습을 보던 설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 끝을 바라보았다.

 

 흰 테이블 모서리에는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영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cooing. 달콤하게 속삭인다는 뜻의 영단어. 이 카페를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두가 달콤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며 새겼던 단어였다.

 

 펜을 놓고 스팀기를 잡았던 이설아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해준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도 설아의 귀엔 달콤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설아 씨가…부담이 될 수도 있어요.”

 

 “…….”

 

 “내 환경 때문에도 그렇고……상황이 좀 그래요, 여러모로. 시놉시스 전달하고 캐스팅 작업 들어가면 기사가 계속 풀릴 거예요.”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이미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다 알 것만 같았다.

 

 그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장난을 주고받고 있어 의식하지 못했을 뿐, 해준은 현재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가족, 지환과의 친분, 인맥보다 뛰어난 실력.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그런 그가 드라마 판에 뛰어든다니, 그건 영화계와 드라마계 모두 놀랄 일이었다. 작품은 순식간에 화제에 올라 수많은 관심과 손가락질의 중심에 서게 될 터였고, 끝에는 해준과 함께하는 작가에게 관심이 쏟아지게 될 것이었다.

 

 해준은 겁먹지 말고 즐기라 했지만, 그저 마음 편히 즐기기엔 처해있는 상황이 가볍지는 않았다. 해준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걱정 어린 얼굴로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설아 씨가 주목을 받게 되겠죠.”

 

 그런 상황이 오는 게 달갑지 않다는 듯 해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설아 씨가 겁을 먹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약속할 수 있어요. 근데…설아 씨가 부담을 느낄 상황이 없을 거라고는 확신을 못 주겠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감독님이랑 같이 하기로 했는데, 제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의 찌푸려진 미간보다는, 활짝 펴진 상태에서 눈이 느른하게 접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설아는 위로하듯 그에게 말을 건넸고, 해준은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주목받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나는 최대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주고 싶어요, 설아 씨한테.”

 

 해준은 그렇게 말했지만, 설아는 제가 아닌 해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빛을 받은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받으며 그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해 보일 생각이에요. 그게 설아 씨한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일 것 같고.”

 

 홀로 이 문제에 관해 고민을 많이 한 듯, 해준은 알게 모르게 찌푸려진 미간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고, 설아는 그런 그를 그저 바라보다 눈을 휘며 웃었다. 자신이 신경 쓰지 않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쓴 그에게 고마웠다.

 

 “주목 좀 받으면 어때요.”

 

 “…….”

 

 “천재 감독님하고 작품 하는데…그 정도는 저도 각오했어요.”

 

 테이블 사이로 무겁지 않은 정적이 내려앉았고, 설아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입안에 가득 남은 달달함이 나쁘지 않았다.

 

 “감독님도 예상하셨겠지만…꽤 오랫동안 글을 못 썼어요, 제가.”

 

 설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고, 해준은 다정한 시선을 계속 마주쳐왔다. 마치 괜찮다는 듯, 위로해주는 것처럼.

 

 “글이 전부인 삶을 살다가 그 전부를 잃었을 땐 정말……무너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힘들었겠어요.”

 

 “…힘들었죠.”

 

 자조적으로 웃은 설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대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래서 지금 저는 무슨 상황이 와도 괜찮을 것 같아요.”

 

 “…….”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때보다는 무섭지 않을 테니까.”

 

 너무 소중해서 쉽게 만지지도 못하겠다는 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대본을 만지는 설아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해준은 그녀를 따라 대본에 손을 올렸다.

 

 “설아 씨는 그냥 아무 신경 쓰지 말고 즐기면 된다고 했던 말 아직 유효해요.”

 

 차분한 시선으로 대본을 바라보던 해준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설아와 눈을 맞췄고,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나 한번 믿어보라고 했잖아요. 전부 책임질 준비 됐으니까.”

 

 입 안 가득 남았던 달달함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설아는 작은 울렁거림을 느꼈고, 생각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입이 움직였다.

 

 “안 물어보세요?”

 

 “뭐를요?”

 

 “제가 왜 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요.”

 

 잔뜩 긴장 어린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설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해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이 설아 씨한테 전부였다면서요. 그 전부를 포기할 정도의 일이었으면, 그건 분명 설아 씨한테 상처일 텐데…나한테 그걸 헤집으면서까지 알 권리는 없으니까요.”

 

 그의 무심한 배려에 설아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해준이, 저를 신경 쓰고 배려하고 있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저를 바라보며 해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청청하게 웃었다.

 

 “솔직히 내 욕심대로라면 궁금하고 알고 싶죠. 어떤 사정이었을지 알고 싶고…할 수 있다면 위로도 해주고 싶고, 도움도 주고 싶고요.”

 

 그때 그 사건 이후로 설아는 제 주위에 높은 벽을 잔뜩 세웠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자신에게 상처 주지 못하도록 하려는 자신만의 방어기제였다. 그 벽을 넘고,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몇 없었다.

 

 근데 지금 해준이 그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주 조심스레, 들어가도 되냐 물으며 벽 안쪽의 있는 사람이 놀라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설아 씨가 괜찮아졌을 때, 내가 믿을만해 졌을 때, 그때가 언제가 되든 말해줘요.”

 

 그 미약한 힘에도 설아는 벽이 무너짐을 느꼈다. 해준이 머지않아 제 영역에 온전히 발을 들이게 될 것을 직감했고, 작게 탄식했다.

 

 “고생 많았다고 위로해줄 수도 있고, 견뎌내 줘서 고맙다고 격려해줄 수도 있으니까.”

 

 술 한 잔 마시면서 같이 울어줄 수도 있어요-.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해준은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밝은 조명 빛을 받으며 웃는 그의 모습을 잊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고 설아는 생각했다. 뇌리에 박힌 그의 모습을 곱씹으며 설아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나중에 술 꼭 사주셔야 해요. 저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당연하죠. 언제든 말만 해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뱉은 해준은 짧게 여러 번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이제 가봐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스튜디오로 가시는 거예요?”

 

 “네, 촬영 감독님이랑 회의가 잡혀서요.”

 

 고개를 끄덕이며 설아는 카페 밖으로 나서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리쬐는 햇빛에 손을 들어 올려 빛을 막자, 그를 바라보던 해준은 성큼 힘들지 않게 한 걸음을 옮겨 빛을 등지고 섰다. 덕분에 얼굴로 쏟아지는 빛이 차단되어 설아는 한결 편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설아 씨 대본 어느 정도 나왔으니까 이제 팀도 꾸리고 캐스팅도 진행하려고 하는데, 괜찮아요?”

 

 “네. 사실 전 이쪽 일은 거의 모른다고 봐야 하니까…감독님 믿고 따라갈게요.”

 

 “와. 영광인데요.”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본 해준은 쯧- 짧게 혀를 치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띄우며 설아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제작팀이랑 같이 회의 한 번 해요. 다들 설아 씨 반길 거예요.”

 

 “네. 대본은 믿고 맡겨주세요.”

 

 “내가 설아 씨 아니면 누구를 믿어요.”

 

 얼른 들어가 보라며 손짓하는 해준에게 설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작가님 힘내세요.”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설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환한 웃음을 가득 피운 설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해준 역시 입가에 동굴이 지도록 환히 웃었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9 9. 나를 살게 하는 10/29 283 0
8 8. 가장 화려하게 10/29 260 0
7 7. 팀 메이트 10/27 250 0
6 6. 윤찬형 10/26 269 0
5 5. 한 걸음, 한걸음 10/25 244 0
4 4. 내가 더 고마워요. 10/25 271 0
3 3. 우리 작가님 10/24 269 0
2 2. 유쾌하지 않은 첫 만남 10/24 258 0
1 1. 패배자들 10/24 46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