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럴 땐 스스로에게 미친 짓 그만하고 술 좀 끊으라고 훈계를 하며 일어난다. 내가 이 자식들을 다 끌고 왔나? 다들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퍼져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전화기를 찾다보니 끊어졌다. 부재중전화가 8통.
‘이제야 전화를 했군. 나도 안 받는다 안 받아!’
확인해 보니 연주가 아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무슨 일 있나? 또 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 규영이 오빠? 다들 전화를 왜 이리 안 받아요? 기철이 오빠 같이 있죠?”
“ 어~ ,너무 많이 마셨나봐.”
“ 설마 여태 잔거야? 다들 취해서 자느라 전화를 못 받은 거야? 미쳤나봐. ”
“ 그랬나봐. 아직 다들 자 ”
“ 일어나라 그래요. 지금이 몇 시 인줄 알아요? 4시가 다 되어가요.”
“ 설마 벌써? 장난아냐? ”
“ 빨랑 기철이 오빠 깨워서 정신 차리고 전화하라 해요. 우리 아빠가 찾으셔요. ”
시간을 보니 정말 3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소연이란 아이 첫 대면부터 명령질 이더니 반말까지 섞어가며 잔소리가 계속이다. 꼭 초등학생 혼내는 선생님처럼 오빠들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꼭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카리스마가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큰일 낼 것 같다.
“ 야, 민기철! 얼른 일어나 소연이 계속 전화해서 난리다.”
“ 놔둬~ 걔 원래 오지랖이 넓어. 이모부 닮아서....”
“ 그래 ,니 이모부가 너 찾으신단다. 정신 차리고 전화 드려.”
“ 소연이 전화 왔다고? 여기로 온데?”
“ 뭔 미친 소리야? 여길 왜 와? 어떻게 알고? ”
“ 어제 니가 주소 불러 주더만 뭘 .”
“ 엥? 내가? 언제? 야 윤지훈, 니가 알려준 거 아냐?”
생각해 보니 새벽에 소연이랑 통화 한 것도 같다.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소연이가 물었으면 그냥 대답해 줬을 것이다. 카리스마에 눌려서....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 여보세요? 다들 일어났어요? 현관 앞 이예요. 문열어주세요.”
“ 야,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해? ”
“ 빨리 안 열어요? 열어요. 얼른!”
“ 좀 기다려!”
이렇게 황당할 때가 있나, 짜증이 확 나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기철이 저 놈은 일어나지도 않네. 화가 나서 발로 차며 깨웠다. 지훈이는 벌써 말끔히 하고 문 열러 가는 구나.
“ 야 좀 기다려 임마!”
문이 열렸다.
“ 나 기철이 이모부 되는데 좀 들어가도 되겠나? ”
“ 아, 예~ 들어오시죠. 집은 엉망이지만.......”
“ 어, 이모부 오셨어요? ”
“ 소연이가 온 줄 알았어요.”
“ 소연인 안 왔어. 나 혼자 왔네. ”
이모부 목소리를 듣고서야 기철이 녀석이 깨서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 넌 친구 잘 뒀다고 날 찾아오지도 않는 거냐? ”
“ 아니요, 오랜만에 만나서 한잔 한다는 게 좀 많이 마셨네요.”
“ 좀 앉으세요.”
권하고 둘러보니 앉을 만한 구석이 없다. 엉망인 집이 상당히 민망하다.
“ 다들 정신 차리고 밖으로 나가자. 해장국 사 줄테니....”
“ 네, 먼저 좀 씻겠습니다. ”
근처 해장국집에 네 남자가 둘러앉았다. 우리에겐 아침이었으나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어서 식당은 한산했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살 것 같다.
“ 기철이 집으로 들어 와라. 친구도 좋지만 부모님 걱정하신다.”
“ 걱정 마세요. 기철이는 제가 쫓을 거예요. 이모부님 ,저 이 자식하고 안 친합니다. ”
“ 허허허, 자네가 개그맨 해야겠네. 재미있는 친구야.”
“ 그렇죠? 재미있는 제가 개그맨 안하는데 저놈이 한데요. 글쎄.”
“ 난 진지하게 웃길 수 있어. 까부는 너하곤 차원이 다르다니까?”
“ 진지하게 웃겨? 그럼 그게 호러지 개그냐?”
“ 인생의 깊이를 모르는 네가 어찌 알겠냐?”
“ 인생? 깊이? 야, 너 지금 나 웃겼다. 개그맨 해라 해.”
다들 국물 들이키기 바쁘면서도 한바탕 웃는다.
“ 자네들 오늘 처음 봤네만 내 젊은 날의 친구를 생각나게 해주어 반갑고 고맙네.”
“ 친구 분들 자주 못 만나세요?”
“ 인생을 소풍 나온 것으로 비유한 시인이 있었지?
하늘로 돌아간 친구가 요즘 들어 부쩍 보고 싶었는데 자네들을 보니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이 흐뭇해서 좋아.”
“ 자랑은 아니지만 저희들 나쁜 짓 않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훌륭한 놈들입니다.”
“ 지훈이라고 했나? 자네, 고시원에 산다고 들었는데...”
“ 네, 아직 취업 준비 중입니다.”
“ 자네도 기철이랑 같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살겠나? 방값은 안 받을게. 이층에 방이 여유가 있어서...”
“ 민폐가 될 텐데 저까지요? ”
“ 우리 소연이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내가 아들이 없잖나! 나이 들어가니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 할 아들 가진 이가 가끔 부럽기도 해.”
“ 이모부님, 이 도둑놈들을 어찌 믿으시고 ... 그러시는지...”
“ 저희야 좋지만 죄송하고 염치없어서 ......”
“ 나랑 술 마시자고 들어오라는 것은 아니고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 기 좀 받아 볼까 하고.......”
농담처럼 허허로이 말씀하시지만 외로움이 묻어났다.
“ 받아 주시면 저희야 정말 감사하죠.”
“ 자네들이 내 집에 있으면 규영이 자네도 자주 오지 않겠나? 사람 사는 것 같이 시끌시끌 그렇게 살았으면 싶어. 자네도 같이 들어와 살아도 좋고.”
“ 아휴, 전 얘 네들 하고 아주 안 친하다니까요. 그렇지만 소연이하고 친하니까 자주 들르겠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이 녀석들에게는 잘 된 일이다. 나까지 보텔 필요는 없겠지.
사실 혼자 사는 게 편해져서 여럿이 같이 북적대는 것이 신나는 일만은 아닌지라 그 정도에서 선을 그었다. 분명히 소주 사들고 자주 들락거릴 것은 틀림이 없을 테지만........
#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통과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입국장의 검색대를 통과할 때는 잔뜩 주눅이 들어버렸다. 영어실력이 변변치 않으니 설명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고 신발까지 벗도록 하여 통과시키는 검색대에서 주머니에 박혀있는 금속장식 때문에 다시 검색을 받을 때는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그 정도에 겁먹을 거였으면 애초에 떠나올 생각도 못했을 텐데 .... 사실 자신감을 갖고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파도에 쓸리듯 떠밀려온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달리 갈 방향도 기력도 없이 밀려와 도착한 곳이 여기다. 도시 지하철을 이용해 버클리대학 부근의 학생호텔(기숙사)로 찾아갔다. 미리 약속되었던 방은 3층의 8호 혼자 쓰는 방이다. 비용을 아끼려고 여럿이 쓰는 방을 찾았으나 알뜰한 유학생들이 다 차지하고 내게 돌아올 여유는 없었다. 방은 비교적 깔끔하고 아담했다. 침대하나, 책상하나, 쪽장 하나, 조그만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었고 샤워 시설을 갖춘 작은 화장실로 분리 되어 있었는데 곳곳에 수납공간이 확보되어 있어서 맘에 들었다. 가지고 온 옷가지와 책들을 정리하고 기숙사를 둘러보러 나갔다. 1층은 관리사무실과 공동 식당, 넓은 세미나실, 휴게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지하1층에는 운동기구를 갖추어 놓은 체육관이 있어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방에서는 전기포트의 사용은 허용하나 버너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4층 건물이지만 층마다 방이 20개는 족히 넘는 듯 했고 방 크기와 사용인원이 차이가 있었다. 얼핏 보아 동양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기숙사 건물 밖의 넓은 잔디에는 자유롭게 앉아 책을 보거나 몇몇이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먹거나 누워 자는 이도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기전에 기내식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라 아직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벌써 점심때는 훨씬 지나 오후 4시가 가까워 가고 있었다. 주변의 가까운 마트를 물어 보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다. 걸어서 20분은 걸릴 것이라 했다. 차가 없으니 걸어 다닐 수밖에....... 앞으로 내가 살 곳과 좀 친해져야 하고 또 당장에 전기포트는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아서 산책하듯 걸어보기로 했다. 유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것인지 인근 주변의 정보가 잘 기록되어 있는 안내책자가 로비에 비치되어 있었다. 하나 집어 들고 정말 20분이 걸리는지 확인할 참으로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낯선 거리의 모습은 내가 떠나온 것을 실감하게 했다.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들뜬 마음과 오롯이 혼자라는 사실이 외로움이 아닌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30분 정도 걸어서 마트에 도착했다. 우유와 식빵, 사과와 체리, 비스킷 조금을 바구니에 담았다. 먹을 것을 보니 욕심이 났으나 들고 걸어갈 생각을 하니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토스터기와 전기 포트, 머그컵 하나 스푼 하나 접시 하나 양치 컵 하나 ... 딱 하나씩만 샀다. 나 혼자니까 ......
자전거가 주르르 늘어선 코너에 다다르니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산 물건들을 그냥 들고 가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고 앞으로의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렴하면서도 앞에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하나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산 것들을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서 왔던 길을 되짚어가면서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낯선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자신 있게 달릴 만큼 용감하지 못하고 천천히 되짚어 가면서 길을 익혀두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기숙사 밖, 세우는 곳에 세워두고 방으로 돌아와 물부터 끓였다. 커피 한잔이 간절했다. 커피는 한국에서 챙겨 온 것으로 익숙한 향기의 커피를 마시며 낯선 창밖을 내다보았다. 주변에 그다지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탁 트인 시야가 시원했다. 자전거 길이 쭉 뻗은 끝 쪽으로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감돌아간 길 끝이 참 예쁘다. 해가 지려하는 하늘과 그 빛에 얼룩지는 잔디, 늘어선 그림자들이 길게 눕는다.
‘엄마, 아저씨, 소연이 그림자다.’
노을 진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아빠 , 나 보고 있지? 나 오늘은 그 사람 생각 조금 밖에 안했어요.
아주 조금만 한 것 같아... 아주 조금....’
##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속 연결이 안 된다 더니 이젠 전원이 꺼져있단다.
이상하다. 언젠가부터 먼저 연락하는 적이 없었다. 내가 전화를 해도 받는 목소리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 같이 느껴졌고 또 무언가에 화가 나서 그러나보다 했다. 그 무언가에는 별 관심 두지 않았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또 제자리에 와 있었으니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번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내가 뭘 잘 못했나? 모르겠다. 특별한 것이 없는데 ....... 개운치 않는 기분에 짜증이 밀려온다. 벨이 울린다. 여전히 연주의 전화가 아니다.
“ 여보세요? 규영 오빠? 소연이예요. 오늘 우리 집 집들이 하는 거 들으셨죠?
저녁 6시까지 늦지 않게 오세요. 알았죠?”
“ 어, 그래. 그런데 뭐 사가지? 소주 사가면 되나?”
“ 어휴, 또 술. 아버진 막걸리 좋아하세요.”
“ 골고루 사가지 뭐. 이따 갈게...”
“ 네, 지훈 오빠는 집에 있구요. 기철이 오빠는 오디션인가 보러 나갔는데 시간 맞춰 온대요.”
“ 오디션? 진짜 그런걸 보러 다닌다고? ”
“네, 아까 얼어붙은 얼굴로 잔뜩 긴장하고 나갔는데, 웃기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그러네요.”
오디션인가 시험인가 잘 되면 좋겠지만 지훈이와 둘이서 계속 내기하듯 누가 더 많이 떨어지나 하게 될까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식 진짜 안 웃기는 놈인데...
다시 연주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연주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였나? 집 전화번호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적어둔 것이라도 있을까 싶어 책상 속을 뒤져보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찾아가 볼까? 연락이 안 된지 1주일 ... 생각해 보니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내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은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아예 전원이 꺼져있다. 폰을 잃어 버렸다면 미리 나에게 알려왔어야 했다. 어디 아픈가? 이렇게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화가 났다. 집에 있기도 답답하고 일단 집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와 보는 연주의 집이라 어색했고 또 상황이 멋쩍게 만드는 상황인지라 초인종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만나면 뭐라 해야 하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갑자기 당황스러운 게 조심스러워지기 까지 했다. 그러나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다. 1층 경비실로 갔다.
“ 실례합니다. 말씀 좀 여쭐게요. 203호에 아무도 안 계시는데 언제 오시는 지 알 수 있을까요?”
“ 무슨 일이신데요? ”
“ 사람을 찾아 왔는데, 휴대폰은 꺼져있어 연락이 안 되거든요.”
“ 그 집에 누굴 찾아 오셨어요? ”
“ 이연주씨 찾아 왔습니다.”
“ 아, 그 집 딸래미 찾아 오셨구만. 근데 그 집 딸 없어요.”
“ 없다뇨?”
“ 외국으로 유학 간다고 나한테 인사했는데... 한 일주일 되었나? 딸같이 잘 따르고 얼마나 싹싹한지 내가 아들 있으면 며느리 삼고 싶을 정도라 잘 알거든... ”
“ 잘 못 아신 것 아니세요? 지난주에 통화 했거든요.”
“ 잘 못 알긴, 아무튼 집에 없어요. 택시에 커다란 짐 보따리를 싣는 걸 내가 도와주었는데 뭘....... ”
“ 그럴 리가 없는데........”
“ 나중에 다시 와서 물어 보든가 해요. 이사를 간 건 아니니까.......”
외국으로 유학? 일주일 전? 어떻게 말도 없이? 이럴 수가 있지? 아저씨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닐까? 이건 말이 되질 않잖아. 갑자기 왜? 어디로 가버렸다는 거지? 이게 무슨 짓이야? 도대체 왜?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경비아저씨에게 연주 어머님 오시면 꼭 전화 부탁드린다며 나의 연락처를 남겼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분명해. 이렇게 사라져버렸다는 걸 나더러 믿으라고?
“ 야, 너 어디야? 집 못 찾는 건 아니지?”
“ 지훈아, 연주가 사라졌어.”
“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연락이 안 돼? ”
“ 장난치는 거겠지? 혹시 너 뭐 아는 거 없어?”
“ 거기 어디냐? 일단 와라. 얼굴 보고 얘기하자.”
“ 넌 뭐 좀 아는 구나? 그렇지? 뭔데? 연주가 뭐라고 했어?”
“ 내가 알긴 뭘 알아. 일단 이리로 오라구, 어른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
단 한 번도 상상한 해 본 적이 없다. 연주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바라보면 항상 그 자리에서 날 보고 있었단 말이다. 이렇게 내가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고 내가 부르면 언제든 곁으로 다가와 내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서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디를 둘러봐도 그녀가 없다.